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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나불 머리 윗부분 즉 갑석 아랫부분에 아주 선명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도톰한 꽃잎과 확연히 드러나는 꽃술이 특히 매력적인 이 연꽃은, 모든 망상과 미혹을 깨우치고 극락정토에서 연꽃 속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종교적 열망이 담겨 있다.
비로자나불 머리 윗부분 즉 갑석 아랫부분에 아주 선명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도톰한 꽃잎과 확연히 드러나는 꽃술이 특히 매력적인 이 연꽃은, 모든 망상과 미혹을 깨우치고 극락정토에서 연꽃 속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종교적 열망이 담겨 있다. ⓒ 권기봉
이름 있는 산에는 굽이굽이 계곡이요 골마다 사찰이니, 일상에 지친 사람들은 산과 계곡을 찾아 심신을 달랜다. 충청 내륙 월악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륵리 절터를 시작으로 충주호를 향해 흐르는 것이 송계계곡이요 계곡 따라 미륵리 절터와 덕주사, 사자빈신사(四獅子頻迅寺)터가 들어섰다.

충주나 제천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서울이나 부산 등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송계계곡이고 보면, 아무리 얼음장 같은 바람이 불어도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의 피로를 말끔히 달래주기는 하는가 보다.

대한민국 여느 계곡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여름과 가을, 각각 피서객과 단풍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아온 송계계곡. 너무 많은 사람들로 복작거릴 것이 두려워서라도 비교적 한적한 겨울에 찾는다. 여유 있는 여행을 하고자 하는 이라면, 여름이나 가을 등 너도나도 떠나기만 하는 계절은 피하는 게 나을 듯하다.

따뜻하게 입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한 겨울, 수안보온천에서 미륵리 절터를 지나 송계계곡 쪽으로 5km 남짓 들어가면 사자빈신사터에 닿는다. 미륵리 절터에서부터는 길을 잘 따라가야 하니 지방도까지 세세하게 표현된 지도 한 장 미리 챙기는 것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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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갯길 ' 에 서서 미륵대원을 보다

그 이름 참 희한하구나!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불심(佛心)으로 거란족이 ‘怨敵永消(원적영소; 나쁜 적들이 영영 물러가기를 바란다는 뜻)’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구층 석탑을 세운다. 원래는 구층이었으나 지금은 몸돌 5개와 지붕돌 4개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불심(佛心)으로 거란족이 ‘怨敵永消(원적영소; 나쁜 적들이 영영 물러가기를 바란다는 뜻)’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구층 석탑을 세운다. 원래는 구층이었으나 지금은 몸돌 5개와 지붕돌 4개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 권기봉
사자빈신사터. 처음 이 절터를 찾는 이라면 이름부터 헷갈릴 만하다. 이름에 들어있는 ‘사자’가 ‘사자(死者)’인지 ‘사자(獅子)’인지, 또 난데없이 ‘빈신(頻迅)’은 무슨 뜻인지.

불교미술에는 종종 ‘정글의 왕’ 사자가 등장하곤 하는데, 사자빈신사터의 ‘사자’ 역시 동물 사자를 의미한다. “불교미술에 왜 갑자기 사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 의미를 대충이나마 알고 나면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사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물의 왕’으로서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 뿐만 아니라 사자가 포효할 때 내는 소리는 온 대지를 깨우기에 충분하리라. 사자가 인도 마가다국(國)의 아소카왕 기념 석주 시절부터 쓰이기 시작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불교미술에 나타나는 사자는 단순한 장식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을 수호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사자가 포효할 때 주변 동물들이 놀라 달아나듯, 부처가 설법을 하면 주변을 맴돌던 악귀는 도망치고 정진하는 보살들은 다시금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실제로 불교에서 부처의 설법을 두고 ‘사자후(獅子吼)’라고 부르지 않던가?

도시 먹기만 했는가? 온몸이 탱탱하게 살아있는 비로자나불이 머리에 두건을 둘렀는데 ‘나비매듭’으로 질끈 동여맸다.
도시 먹기만 했는가? 온몸이 탱탱하게 살아있는 비로자나불이 머리에 두건을 둘렀는데 ‘나비매듭’으로 질끈 동여맸다. ⓒ 권기봉
사자는 그렇다치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빈신’은 무슨 말일까? ‘분신(奮迅)’이라고도 하는 빈신은 해석하자면 ‘분발해 일어난 기세등등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사자가 포효하면 마치 온갖 금수들이 놀라 도망치는 것처럼 부처가 삼매(三昧)에 들어갔을 때 온갖 악한 것들이 복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재미없는 이야기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랴, 이름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애인은커녕 친구가 되기도 영 글러먹은 것이니 최소한 이름은 알고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각설하고, 원래 이 사찰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현종 13년, 즉 1022년 세워진 절의 이름이 왜 ‘사자빈신사’가 되었을까? 그 연유를 이 황량하기만 한 절터를 홀로 지키고 있는 석탑에서 찾을 수 있다.



황량한 절터에 석탑 한 기 남아

그다지 넓지 않은 잔디밭에 서 있는 석탑은 그냥 보기에도 앙증맞은 모습이다. 원래 탑신부만 구층에 이르는 큰 탑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그저 지대석과 하대석, 상.하층기단에 5층 몸돌까지만 남아 있다. 아마도 오랜 세월과 수많은 전화(戰禍)를 거친 결과일 텐데, 그래서 그런지 한겨울의 폐사지는 더욱 서글퍼 보인다.

전체 10행 79자의 명문은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의 내력을 설명해주고 있다. 만약 이런 기록 외에 더욱 정확한 기록들이 남아있었다면 사자빈신사터와 사사자석탑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아래 기단 정면에 새겨져 있다.
전체 10행 79자의 명문은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의 내력을 설명해주고 있다. 만약 이런 기록 외에 더욱 정확한 기록들이 남아있었다면 사자빈신사터와 사사자석탑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아래 기단 정면에 새겨져 있다. ⓒ 권기봉
바로 이 탑을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라 불렀다. 상층 기단부에 네 마리의 사자가 있기에 후대에 와서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모양새가 퍽 재미나다.

일단 숏다리에 두툼한 살집이 돋보이는 가슴, 포효하듯 벌린 입 등 일반적인 사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유순하면서도 귀여워 보이기만 하다. 아무리 사자빈신삼매(獅子頻迅三昧)에 들어 위엄을 뽐낸다 한들 그저 귀여운 아기 사자에 지나지 않을 모습이다. 위엄 있어 보이려 애쓰는 사자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런데 여기 더욱 정겨운 것이 하나 있다. 네 마리의 사자 한 복판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나비매듭’ 사나이. 두건을 두른 한 사내가 네 마리 사자의 중간에서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싼 채 정좌하고 있는데, 요상하게도 두건을 나비매듭으로 질끈 동여맸다. 지권인(指卷印)을 했으니 과거불인 비로자나불인데, 두건을 두른 모습이며 앙증맞은 나비매듭이 그 동안의 부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다. 역시 먹기만 하고 운동은 안 하고 앉아만 있었는지 온몸이 탱탱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자아낸다.

그대, '아우훔(AUM)'과 ‘침묵’을 아는가?
네 마리 사자의 입 모양에 서려 있는 진리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이나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 등의 사자들은 각기 다른 크기로 입을 벌리고 있다. 과연 여기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허균은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돌베개, 2000)에서 “네 마리의 사자가 각각 다른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는 데에는 나름의 오묘한 불법이 서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자가 입을 크게 벌려 치아가 드러난 상태를 산스크리트어(Sanskrit; 梵語)의 ‘A'(아) 발음으로, 그것보다 약간 작게 벌린 것을 ’U'(우) 발음으로, 그것보다 작게 벌린 것을 ‘M'(훔) 발음으로, 마지막으로 완전히 꽉 다문 상태는 ’M'(훔) 발음 뒤에 뒤따르는 ‘침묵’ 상태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AUM'(아우훔) 소리가 고대 인도 브라만교(敎)의 경전인 베다의 찬미와 주문의 신성한 언어로부터 왔다”며

1) “‘A'는 경험의 세계와 함께 있는 의식의 상태이고,
2) ‘U'는 꿈의 미묘한 형태에 대한 경험과 더불어 꿈꾸는 의식의 상태이며,
3) ‘M'은 꿈꾸지 않는 깊고 잠잠하고 미분화된 의식의 자연적 상태이고
4) ‘A'와 ’U'와 ‘M' 뒤에 오는 침묵은 궁극적인 신비의 세계이며, 그곳에서 선험적인 법성(法性)과 일체가 되어 법성이 자아로서 체험되는 단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그는 “‘AUM'(아우훔)의 발음과 침묵은 존재의 전체에 대한 의식을 발음으로 상징화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 권기봉
한편 이 비로자나불 머리 윗부분 즉 갑석 아랫부분에 아주 선명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까이 가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고 그저 멀리서 조망만 했다면 찾아볼 수 없었을 탐스런 연꽃 한 송이다. 특히 도톰한 꽃잎과 확연히 드러나는 꽃술이 매력적이다.

사자들은 자리를 바꾸고, 몸돌은 영영 떠나버렸네

그런데 아무리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 네 마리 사자가 아기자기하고 ‘나비매듭’ 사나이가 귀엽다 한들, 여유를 갖고 찬찬히 뜯어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다. 바로 ‘네 마리 사자의 배치’와 ‘석탑 몸돌과 지붕돌의 놓임’에서 드는 느낌이렷다.

먼저 네 마리의 사자가 앉은 모양새는 퍽 그럴 듯하지만,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의 그것과 비교하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인다. 보통 사사자석탑의 경우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이나 원통전 앞에 있는 사사자석탑 등에서와 같이 앞에서 보았을 때 왼쪽 것이 입을 가장 크게 벌렸고 오른쪽이 그 다음, 그 뒤 사자의 입은 보다 작게, 마지막으로 왼쪽 뒤편의 사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즉 앞 왼쪽 사자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벌린 입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이다.

석탑의 앞쪽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자. 입을 두 번째로 크게 벌렸다. 이처럼 네 마리의 사자는 각기 다른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다.
석탑의 앞쪽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자. 입을 두 번째로 크게 벌렸다. 이처럼 네 마리의 사자는 각기 다른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다. ⓒ 권기봉
물론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 역시 앞쪽의 두 사자들은 차례로 왼쪽 사자의 입이 오른쪽의 그것보다 많이 벌어지기는 했다. 그런데 오른쪽 사자 뒤에 앉아 있는 사자는 입을 가장 작게나마 벌리고 있어야 하는데, 묵비권이라도 행사하려는 듯 힘 있게 닫았다. 반면 그 옆의 사자는 잎을 조금 벌리고 있다.

어딘가 이상하다. 아마도 개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뒤쪽 사자들의 위치가 서로 뒤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기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만들 당시부터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기에 강하게 주장하지는 못하지만, 통일신라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사자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기에 영 찝찝하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지붕돌과 몸돌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딘지 불완전한 느낌이 든다. 원래 구층 석탑이었다고 전해지는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은, 현재 몸돌 5개와 지붕돌 4개가 전하고 있다. 그런데 탑신이 아래에서 위로 상승하면서 주는 느낌이 경쾌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급격하다.

물론 이 길손만의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1층 몸돌은 유난히 두툼한데 비해 2층부터 4층까지의 몸돌은 1층 몸돌 두께의 절반도 안 될 정도로 빈약하니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 리도 없잖은가? 결국 지금의 탑신부가 구층 석탑 중에서 차례대로 1층부터 5층까지 남은 것이 아니라 중간에 유실된 몸돌과 지붕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기록, 그 중요함에 대하여

“내 코는 누가 가져갔을까?” 산천에 널려있는 불상이나 석상들의 코는 남아난 것이 없다.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인데,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상 역시, 코는 온데간데없다.
“내 코는 누가 가져갔을까?” 산천에 널려있는 불상이나 석상들의 코는 남아난 것이 없다.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인데,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상 역시, 코는 온데간데없다. ⓒ 권기봉
그러나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불완전성을 논외로 친다면,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은 매우 중요한 탑으로 꼽힐 만하다. 그 이유는 탑에 남아 있는 79자의 ‘기록’에 있다. 특히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는 내용은, 이 탑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까지 직접 전해주고 있다. 즉 1022년 당시는 거란족의 침입이 빈번하던 때로, 불심(佛心)으로 거란족이 ‘怨敵永消(원적영소; 나쁜 적들이 영영 물러가기를 바란다는 뜻)’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 같은 기록을 바탕으로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이 만들어질 당시의 시대상과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있어, 결국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이나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 등 비슷한 형식을 지닌 석탑의 조성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은 보물 제94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사자빈신사터에 사사자석탑을 세우면서 건립 연대나 이유에만 그치지 않고 석탑의 형태나 돌의 산지(産地), 사찰의 배치도 등 보다 자세한 사항을 기록으로 남겼더라면, 후대에 이르러 개보수를 할 필요가 있을 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덧없는 상상이 그것이다. 물론 종교적 신념이 투영된 석탑을 만들 당시 무너지고 닳아 사라질 처지까지는 고려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당시 장인의 생명이 유한(有限)한데 석탑은 무한(無限)해야 하니 기록을 남기는 것이 인간된 도리가 아니었을까? 물론 당시 정확한 기록을 남겼으나 도굴 등에 의해 훼손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석탑이나 어떤 건물을 세울 때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우리네 습관에서, 아쉬움이 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네 철없는 후손들이 ‘오차 한 치 없는 기계’에 지나치게 맹목적인 나머지 그저 복원만을 위한 기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자후를 토하는 것일까? 석탑 앞쪽의 왼쪽 사자다. 이빨이 드러날 정도로, 네 마리의 사자들 중에서 가장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사자후를 토하는 것일까? 석탑 앞쪽의 왼쪽 사자다. 이빨이 드러날 정도로, 네 마리의 사자들 중에서 가장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 권기봉

석탑을 앞에서 볼 때 뒤쪽 오른쪽에 있는 사자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바로 옆의 ‘입을 가장 조금만 벌린’ 사자가 있어야 할 것으로 추정되나, 개보수 당시의 실수 때문인지 서로 뒤바뀐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탑을 앞에서 볼 때 뒤쪽 오른쪽에 있는 사자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바로 옆의 ‘입을 가장 조금만 벌린’ 사자가 있어야 할 것으로 추정되나, 개보수 당시의 실수 때문인지 서로 뒤바뀐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 권기봉

하대석의 네 면을 따라 안상이 3개씩 모두 12개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아랫부분의 꽃봉오리 모양이 풍성해 보인다.
하대석의 네 면을 따라 안상이 3개씩 모두 12개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아랫부분의 꽃봉오리 모양이 풍성해 보인다. ⓒ 권기봉

갑석 모서리 부분의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한편 남아있는 5개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4개의 지붕돌에는 각각 3개씩의 층급받침이 남아있다.
갑석 모서리 부분의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한편 남아있는 5개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4개의 지붕돌에는 각각 3개씩의 층급받침이 남아있다. ⓒ 권기봉

사자빈신사터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주변에는 도기 파편들이 널려 있었다. 특히 석탑의 뒤쪽 난간 밖에서 상당량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보존 상태가 나빠 파편에 불과할 뿐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찾기 힘들었다.
사자빈신사터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주변에는 도기 파편들이 널려 있었다. 특히 석탑의 뒤쪽 난간 밖에서 상당량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보존 상태가 나빠 파편에 불과할 뿐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찾기 힘들었다. ⓒ 권기봉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는 ‘송계계곡’으로 더욱 유명하다. 특히 여름과 가을에 각각 피서객과 단풍 관광객들을 맞아들이는데, 이 혼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한겨울에 나서는 것이 제격일 듯싶다.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는 ‘송계계곡’으로 더욱 유명하다. 특히 여름과 가을에 각각 피서객과 단풍 관광객들을 맞아들이는데, 이 혼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한겨울에 나서는 것이 제격일 듯싶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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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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