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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왜 가슴 저리게 하면서도 삶의 심연을 자연스럽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성장 소설이 없을까?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데미안'과 대학 시절 어느 여름방학 때 원두막에 누워 읽었던 '젊은 날의 초상'이 나에게는 대표적인 성장소설로 각인되어 있다. 그 중에서 후자는 저자인 이문열의 분별없는 행동으로 인해 그 목록에서 조금씩 빛을 잃었기 때문에 결국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만이 성장 소설로 남아 있게 된 셈이다.

주체하기 어려운 성적인 욕구와 소위 좋은 대학을 가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던 고교 시절에 시간을 아껴가며 초라한 학교 도서실에서 읽었던 데미안은 알을 깨고 나가야 한다는 소박한 결의를 다져주기도 했고,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충만감으로 이후의 삶을 제대로 펼쳐나가야 한다는 근원적인 다짐을 할 수 있게도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번역투의 글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어 몇 가지 방법으로 우리 글을 찾아 보았지만, 결론은 그런 수준의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여러 오프라인 신문에서 앞다투어 소개한 이산하의 성장소설 '양철북'에 주목했던 것은 그런 아쉬움을 달래면서 우선 나 자신이 읽어보고 난 후에, 그 무렵을 견뎌내고 있는 고등학생 딸 아이에게 권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책 하나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우리의 고교 생활이 더욱 악화되어 모든 책들을 수능시험과 관련짓는 '바쁜 버릇'을 갖게된 아이에게 정신적 충격을 던져줄 수 있는 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램으로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문재 시인이 맨 끝에 쓴 발문까지 읽었다.

양철북이라는 다분히 작위적인 이름을 가진 고등학생이 세속에서 외할머니의 인연을 가진 스님이 주지로 있는 어느 절에서 만난 법운이라는 스님과 함께 우리나라 주요 사찰을 여행하면서 나누는 대화와 사건들을 기행문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한마디로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선문답이라는 명분으로 어설픈 난제들을 던져놓는 스님에게 고등학생인 양철북은 더 어설픈 답을 하면서 그저 스스로 감동하는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중간 중간에 운문사의 새벽 예불과 울력, 사미승의 자살과 같은 삽화들을 끼워놓기는 했지만,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그저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종류의 글이라면 차라리 동일한 필자의 기행문 '적멸보궁 가는 길'이 더 나아 보인다. 그래도 그 기행문에는 일정한 정도의 시적 긴장이 유지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시인이 쓰는 소설은 그 감칠맛 나는 글 솜씨에 전체 구성에서도 시적인 긴장이 살아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 기대가 황망하게 깨어지면서 책을 덮어야 하는 순간의 고통은 쉽사리 감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끝에 붙어있는 이문재 시인의 신변잡기 위주의 속된 주례사같은 발문은 분노의 정도를 더해줄 뿐이다.

이산하의 치열한 삶에 대해 외경심을 갖고 있는 동시대인으로서 그의 삶에 대한 찬사를 평가절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의 발문은 소설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최소한 자신이 읽은 느낌에는 솔직한 발문을 써야 한다는 것은 당위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산하가 성장소설이 거의 없는 척박한 우리 독서계에 하나의 화두를 던져주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써서는 죽도 밥도 안된다는 사실을 준엄하게 일깨워 주는 역할은 해줄 것으로 믿는다는 것이고, 그 역할이 이산하 스스로에게도 작용하여 좀 더 곰삭은 후에 진정으로 자신의 딸에게도 읽히고 싶은 그런 성장 소설을 쓸 수 있게 하는 '입에 쓴 이야기'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그럴 수 없다면 앞으로는 시만 써주었으면 좋겠다.

양철북

이산하 지음, 양철북(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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