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한 여론조사 전문가를 만나 50세주를 반주 삼아 저녁을 했다. 이 여론조사 전문가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른바 '노풍'(盧風)의 징후를 일찌감치 예보했고,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앞서는 여론조사 결과를 처음 공표했던 '지노파'(知盧派)이다.
지난 선거에서 여론의 지지도 추이를 면밀하게 추적했던 이 '지노파' 전문가에 따르면, 지난 대선전(戰)에서 노무현의 승리를 이끈 시대정신은 '노무현 정신'이나 '노무현이즘'이 아니라 '반창'(反昌)이었다. 즉 북핵 위기와 촛불시위가 오래 지속된 가운데 '전쟁이냐 평화냐'는 이분법적 택일을 강조한 노무현식 어법이 유권자들에게 상당 부분 먹혀든 결과라는 진단이다.
물론 이때 '창'(昌)에게 전이(轉移)된 메시지는 '수구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쟁광'(戰爭狂)이었다. '국민 여러분의 승리'임을 강조한 노무현 캠프의 선거참모들은 이런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노풍'의 바람이 한번 빠진 뒤로 한번도 자력으로는 지지도가 25%를 넘지 못한 점이 이런 진단을 뒷받침하는 설득력 있는 근거이다.
단정적 어법 때문에 지지도 하락 가능성
이 '지노파' 전문가는 그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는 석 달 이내에 70%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보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취임 100일도 안되어 지지도가 70% 밑으로 떨어진 경우는 없었다. 아직은 가정(假定)이지만,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때도, 이미지로 정권을 잡은 김영삼의 허상이 깨질 때도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기를 했다. 이 전문가의 예측이 맞으면 내가 술을 사고, 틀리면 그 반대로 이 친구가 술을 사기로 했다. 이 전문가가 내세운 예측의 근거를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동의하면서 '혹시 석 달 뒤에 내가 술을 사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는 대목이 하나 있다. 바로 대통령이 된 뒤에도 여전히 단정(斷定)적으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노무현식 어법'이다.
단정과 양자택일의 화법은 듣는 이의 귀에 쏙 들어오는 장점이 있다. 그런 화법이 '정치인 노무현'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 대신에 늘 설화(舌禍)를 입을 부담을 안고 있다.
부메랑이 된 '패가망신' 발언
대표적인 사례가 인사청탁 문제에 대한 '패가망신'(敗家亡身) 발언이다. 일부 언론 매체의 노건평씨 인터뷰 기사로 수면 위에 드러난 노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의 '인사개입' 의혹은 문재인 민정수석의 신속한 현지 '출장조사'를 통해 '해프닝'으로 종결되었다.
나는 아는 바로는 노건평씨를 인터뷰한 기자의 순수성(?)을 믿는 만큼 노건평씨의 '순진성' 또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인사개입 발언은 '해프닝'이라는 데도 동의한다. 그러나 국민은 동의하지 않는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렇게 외친다. "노건평씨부터 먼저 패가망신시켜라."
1절만 해도 되는데 3절까지 해야 직성이 풀린다?
또 다른 사례는 '1절'만 해도 될 것을 굳이 '3절', '4절'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노무현식 화법이다. 노 대통령은 개각 인선 배경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잦은 장관 교체로 인한 폐단을 지적하자 이렇게 답변했다.
"분위기 쇄신용 개각은 앞으로 하지 않겠다. 잘못이 있는 경우에만 개별적인 책임을 묻겠다. 창조적 아이디어가 지속적으로 공급돼야 하는 부처라 할지라도 2년 내지 2년 반의 임기는 보장돼야 한다."
"분위기 쇄신용 개각은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1절만 해도 그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된다. 그런데 굳이 "2년 내지 2년 반의 임기는 보장돼야 한다"고 3절까지 함으로써 운신의 폭을 좁히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일부 장관에 대해 시민단체가 반대한 분도 있다고 묻자 노 대통령은 이렇게 화답했다.
"김화중 장관은 누구의 추천도 받지 않았다. 내가 후보 때 김화중 의원을 청해 복지·사회정책의 학습을 부탁했다. 보건복지 영역의 과제와 핵심이 뭔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언제라도 질문해달라. 시민단체에서 거론하는 그 누구와도 비교해 보라. 그러면 내가 당선되기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이다."
'말본새'가 똑 부러지니 듣는 사람들은 화끈하다. 또 시민단체의 판단이 늘 옳은 것도 아니다. 내가 아는 바로도 김화중 장관은 능력 있는 '여장부'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김 장관에 대해 '능력 있는 분'이라고 1절만 하고 "내가 당선되기 전부터 (복지부장관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속까지 드러내지는 않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이런 비난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장관 국민 추천'이니 '5배수 추천'이니 하는 것은 '국민 사기극'이란 말인가."
더 큰 문제는 배타적인 어법
이런 화법은 노 대통령의 솔직함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지난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찍지 않은 60%가 노 대통령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스스로 선을 긋는 것이다. 40대 전직 군수와 변호사를 행자·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해 지나친 파격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고 묻자 노 대통령은 이렇게 대꾸했다.
"일부 파격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파격적으로 보는 시각이 타성에 젖어있다고 생각한다. 변화가 필요한 곳엔 변화를 추동해 나갈 인재를 발탁해야 한다."
앞서의 '지노파' 전문가는 '파격'을 '타성'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파격적인 배타적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장 여론조사를 해보면 40대 전직 군수와 변호사를 행자·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을 파격으로 보는 국민은 90%가 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이 나라 국민의 90%가 타성에 젖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나는 그의 '90% 단언'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논지에는 동의한다.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는 분들에게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 1년간만 지켜봐 달라."
국민보다 100보 아닌 50보만 앞서야
말꼬리 잡기가 아니다. 우리말에 '50보 100보'라는 말이 있지만 대통령은 50보만 앞서 나가야 한다. 100보 앞서면 국민이 따라가다 포기해 종국에는 대통령 혼자 가기 십상이다. 이런 '쓴소리'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싶다.
월간 <참여사회> 3월호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바란다'는 특집을 실었다. 이 특집에서 작가 최일남씨는 '사려 깊은 말의 신선한 울림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편지글에서 이렇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하고많은 희망사항 가운데 하필 말의 문제를 들고 나온 발상이 엔간히 소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그 때문에 흥하고 망한 국가원수가 역사에 좀 많았습니까."
하고많은 실수 중에 설화(舌禍) 때문에 국가원수가 망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그래야 내기에서도 이길 수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