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한 진검(眞劍) 승부를 벌인 검사들은 때때로 검사(檢事) 아닌 검사(劍士)처럼 비쳐졌다. 검사들은 마치 진법(陣法)을 펼치듯, 자리 배치에서부터 신경전을 벌였고 대통령은 초전(初戰)부터 수적으로 우세한 검사들의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불행한 과거가 여러분과 저 사이에 이런 갈등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토론회 말미의 노 대통령 진단처럼 평검사들과의 불신의 간극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아무리 용감해도 '고양이 앞의 쥐' 신세
검사들은 청와대와 법무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밀실 인사'와 '원칙 없는 인적 청산'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검찰을 잘 알지 못하는 장관이 외부의 정치세력과 협의해 인사를 할 경우 새로 발탁된 검찰 수뇌부가 검찰의 중립성을 확보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었다. 검사들은 이를 위해 제도 개선부터 먼저 하자고 했다.
노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의 인사 제청권을 검찰총장에게 달라는 검사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 대신 이번 인사는 '원안'대로 하되 다음부터는 인사위원회를 설치해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양측은 당연히 평행선을 그었다.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토론회를 시청한 네티즌과 국민 대다수는 검사들의 오만과 무례함을 탓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인사권자인 대통령 앞에서 검사들의 처지는, 그들이 아무리 '용감'한들 '고양이 앞의 쥐' 신세이다.
그 쥐들은 때때로 '고양이'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고양이가 다른 쥐한테 전화 건 사실, 고양이의 오지랖 넓은 형이 여기저기 전화한 해프닝 등등…. 그뿐이었다. 어떤 쥐도 끝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는 못했다.
'8인회'라는 고양이 목 방울 달기
그것은 이른바 '8인회'라는 방울이다. 8인회는 노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7기 동기생 가운데 비슷한 또래끼리 토론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굳어진 친목모임으로 알려져 있다. 모임 참석자는 노 대통령과 강보현·이종왕 변호사, 정상명·이종백 검사, 판사 2명, 헌법재판소 연구관 1명 등 모두 8명이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 전인 2001년까지는 이 모임에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8인회'는 3월 3일 이 모임의 일원인 정상명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이 법무부 차관에 내정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3월 6일 당시 강금실 법무장관이 김각영 검찰총장에게 고검장 승인인사 4명에 관한 '인사지침'을 통보하는 과정에서도 8인회 멤버인 이종백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이 검찰 요직인 서울지검장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또 한 사람의 검찰 출신 '8인회' 멤버인 이종왕 변호사는 신임 국정원장 하마평에 올랐다.
3월 7일 처음으로 전국 평검사 회의가 열리고 거기에서 "법무부가 통보한 '인사방침'은 검찰 개혁의 출발이 아닌 밀실인사의 결과일 뿐이다"는 반발 성명이 채택된 것은 이런 정황과 인사 의도에 대한 불신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즉 노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 덕택에 혜택을 받은 인사들이 수뇌부를 구성할 경우 검찰의 정치적 독립은 또 다시 요원해진다는 위기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이런 의혹은 3월 7일 오후 열린 청와대 비서실 브리핑에서도 일부 제기되었다. 기자들이 "검찰의 반발기류가 대통령의 사시 동기 등 소위 '8인회'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묻자 문재인 민정수석은 "터무니없는 얘기다"고 부인하고 "장관이 아직 인사안을 제출하지 않았지만 과거에 비해 기수·서열 파괴 폭이 넓어서 그런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해명했다.
'8인회' 멤버들 검찰-국정원 요직에 거론
3월 9일 토론회에서 나온 노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해명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참모들이 정상명 검사를 법무차관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했다. 그때까지 정 검사를 만난 일이 없고 동기 검사 누구로부터도 들은 적이 없다. 내가 가슴이 뜨끔해서 전화를 했다. '여러 가지로 미안합니다. 앞으로 잘 좀 도와주십쇼.' 그렇게 두세 마디 하고 끊었다."
노 대통령의 해명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8인회' 멤버 가운데 현직 검사 2명이 모두 법무부와 검찰 요직에 중용되고 검찰 출신 변호사 1명도 국정원장으로 오르내리는 현실 앞에서 검사들의 우려와 불신을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더구나 그 가운데 일부 인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줄타기를 해온 '정치검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평검사들의 진정성과 충정을 믿는다면, 물론 9일 토론회에서 평검사 대표가 밝힌 다음과 같은 발언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이번 인사는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밀실 인사의 답습이었다. 객관적인 기준과 투명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정치권이 임의로 발탁하는 인사는 또다시 정치권에 줄대기를 초래해 결국 정치권에 대한 예속만을 심화시킬 뿐이다. 과거 정권 교체기마다 개혁을 위한 인적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매번 파격 인사가 이루어졌지만 오히려 중립성 훼손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개혁을 위한 인적 청산을 내세워 과오가 증명되지 않은 검사를 퇴진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또 발탁인사라는 명분으로 도덕성과 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검찰간부가 중용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외압타령'만 한 나약한 검찰
절차적 정당성은 중요한 명제이다. 그러나 고양이 앞의 쥐들은 '방울'을 달지 못한 채 115분 내내 답답하게 '인사위원회 타령'과 '외압 타령'만 했다. 참다 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일갈(一喝)했다. 언론인들이 감옥에 가고 해직을 당하면서 스스로 언론자유를 지켰듯이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정치인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검사들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그런데도 SK그룹 수사에 참여한 검사는 이렇게 고해했다.
"나는 SK그룹 수사팀에 있다.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여러 난항이 있다. 그 난항이 검찰의 현 주소를 말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변호인이 아닌 외부인으로부터 외압이 있다. 여당 중진인사도 있고 정부의 중진 인사도 있다. 다칠 수 있다고 한다. 수사 지휘팀에 그런 외압이 있다. 그게 검찰의 현 주소이다. 여기서 밀리면 정치검사가 되는 것이다. 너희들이 봐주지 않았냐고 장관이 말했다. 그것이 현 주소이고, 제도적으로 보장해 달라고 간청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들도 그렇게 해서 국민들로부터 사랑 받고 싶다."
'외압'에 맞서봐야 불이익이라는 것이 고작 진급이 늦어지거나 한직으로 밀려나는 것일 뿐인 검사들이 실토한 '외압 타령'은 듣기에도 민망한 것이다. 그것은 '약한 자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강한 자에게 칼을 들이대는 진정한 검사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였다. 국민들로부터 사랑 받을 길 또한 요원해 보였다. 그게 검찰의 현 주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