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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꼴난 돈 벌려고 목숨 담보로 맡기고 열두 시간을 돌아다녔단 말이에요? 그렇게 일하고도 실업급여 하루치 받는 것보다 못 벌었잖아요! 그럴러면 편하게 집에서 쉴 것이지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한데요?"

택시기사로서의 첫날 벌이랍시고 가져온 수입금을 두고 아내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핀잔을 준다.

오늘은 내가 택시기사로서 처음 발을 내딛는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 배수원
어떤 인사로 첫 손님을 맞을까 잔뜩 긴장한 가운데, 꽃샘 추위로 차가워진 새벽 공기를 가르며 배정 받은 중형택시를 조심스럽게 발진시켰다. 그 동안 십 수년을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펜대만 굴린 샌님이 중노동이라고 다들 일컫는 이 일을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나 스스로도 궁금해 하며 첫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운전 면허를 딴 지 이십 해가 넘고 그 동안 무사고 운전에다, 무엇보다 운전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운전 능력은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시내 지리에 어둡다는 것이 가장 우려되는 것이었다.

강남에만 가면 반듯반듯하게 바둑판 같이 정렬되어 있는 길들이 그 길이 그 길 같아 헛갈리기 일쑤였고, 강북의 미로 같은 구도로와 샛길들은 방향 감각마저 상실케 했음을 잘 알기에, 어떻게 손님들이 원하는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줄 수 있을까가 가장 염려되었다. 지리에 관한 한은 진짜 '초짜'인 얼뜨기 기사가 아니던가!

긴장과 설레임을 안고 난생 처음 승객을 태웠다. 학생 같아 보이는 남자 손님이었다. 오늘이 나의 첫 근무이고 당신이 첫 손님이어서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고 했더니, 그 남학생(?)도 축하한다는 답례와 함께 앞으로 운전 잘 하시라는 덕담을 잊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 하지만 이렇게 인정이 넘치는 훈훈한 사람 사는 맛이 있지 않는가.

한데 아니나 다를까 손님의 목적지가 내가 모르는 곳이었다. 서비스에 충실하려면 손님을 편하게 모셔야 하는 것이 기본일텐데, 첫 손님부터 난 어쩔 수 없이 손님을 귀찮게 하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지시하는 대로 이끌려서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긴 하였다.

택시요금을 받고 나니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서비스업인 이 직업에 종사하려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할 텐데 과연 내가 이 일에 충실한 준비를 했었던가를 자문해 보니 부정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하고 싶다고 뛰어들었을 뿐 정말 그에 필요한 사전 지식과 정보에 대한 공부는 게을리한 것이었다. 첫 손님을 태우고 요금을 받는 순간 제일 먼저 그런 부끄러움이 몰려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드디어 나도 이 일을 할 수 있구나 하는 뿌듯함도 느꼈음을 고백한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은 내가 모르는 목적지여서 어쩔 수 없이 승객들의 도움을 받아 행선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근무가 끝나갈 즈음 대형사고를 쳤다. 바로 십 분이면 갈 거리를 나의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 삼십 분 이상을 허비하여 손님의 중요한 약속시간을 어기게 한 것이었다.

난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심정으로 그 손님에게 사죄에 사죄를 하였고, 신호 위반에 속도 위반까지 하면서 최대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그 손님은 이왕 늦은 거니 사고나지 않게 천천히 몰라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내가 뿌리쳤는데도 지폐를 던지다시피 하고는 택시에서 내려버렸다.

난 돈을 돌려주려 했지만 내가 엉덩이를 떼려고 하는 순간 그 손님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내가 그 분에게 손해배상이라도 해주어야 마땅할 텐데,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고 게다가 요금까지 지불하는 그 사람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세상은 아직 따뜻하고 메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던 점은, 택시기사란 단순히 승객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운임을 받는 직업이 아니라, 더불어 인생 상담도 해주어야겠다는 것이다. 컨설턴트까지 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같이 고민을 해주고 대화를 진지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아주머니와는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가며, 고부간의 갈등, 동서와의 알력, 시부모와 친정부모에 대한 생각, 아이들 교육 문제 등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일어나고 볼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과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다고 골 깊은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아주머니의 마음 속에 깊이 쌓인 멍울은 좀 풀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내리면서 한 마디 하신다.

"아휴, 이렇게라도 얘기하고 나니까 속이 다 후련하고 시원하네요. 조심해서 가세요."

열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전날 잠을 자지 않았기에 정신이 멍한 탓도 있었지만, 미터기 조작하고, 요금 받고 거슬러주고, 모르는 거리를 물어물어 찾아가고, 손님이 있나 없나 둘러보고, 급한 용무에 화장실 찾느라 조바심내고, 딱지 떼지 않을까 신경 쓰고 등등 그러는 가운데 훌쩍 교대 근무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정말 정신 없이 지나간 하루였다.

겨우 하루밖에 해보지 않은 생초짜 택시기사이기에 이 직업의 어려운 점과 보람된 점에 대해 뭐라 말할 자격은 없지만, 다만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루의 경험으로도 난 내 인생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중요한 것들을 직접 체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무척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앞으로도 난 그 소중하고 귀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새롭고 아름답고 찬란한 것들을 찾기 위해서, 새벽의 어둠을 가르며 서울 시내를 힘차게 활주할 것이다. 비록 일당이 실업급여 하루치 보다 적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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