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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경이의 등교 첫날. 회사 지각을 각오하면서 학교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집에서 5분 남짓 짧은 거리, 언니 손잡고 학교 정문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은 먼 여행을 나서는 아이를 보는 것 같아 복잡하기만 하다. 아이는 뭐가 즐거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든 채 다람쥐처럼 학교로 쏙 들어갔다.
'과연 이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고민의 직접적인 원인은 내가 사는 과천에 초등학생 연령의 대안학교가 3월에 개교하기 때문이다. '대안학교'. 교육에 관심 없는 학부모가 어디 있으랴마는 대안학교에 대한 고민은 현재 사회적 지탄이 되고 있는 사교육 열풍과는 다른 측면일 것이다. 오히려 그런 경쟁구도에 무차별하게 노출된 과거 자신들의 전철을 아이들이 밟지 않기 위해 대안학교를 설립하고 그 곳에 보내는 부모들의 '결심'은 높이 사줘야 되지 않을까?
지난 1년간 학부모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교장선생님과 대립의 각을 세웠던 나로서는 우리 동네에 대안학교가 개교한다는 소식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월 40만원 가량과 몇 달치 월급을 한꺼번에 기부금으로 내야하는 경제적 부담은 차후문제였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만한 희생은 어차피 각오하던 터. 특히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2년 전 발생한 왕따로 인한 자살사건은 내가 학운위에 참여하게 된 동기이자 우리 나라 공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접하게 된 계기였다. 그 당시 분당에서 대안학교 설립을 주도한 분이 집에 오셨을 때 큰아이(4학년)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보내겠다고 약속도 잊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나의 학창시절을 반추하면 대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학교' 때 육성회비를 못내 뺨을 맞아 교탁에서 교실문까지 나동그라진 친구와 때린 선생님, 중학교 때 조회시간 운동장에 쓰러지는 친구들의 얼굴들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더욱이 고등학교 시절 우리들은 오래된 팝송의 뮤직비디오(the wall)에서 묘사했듯이 '공부공장'에서 잘 정제되어 나온 소시지에 불과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배정받은 곳은 설립된 지 1년밖에 안된 신설 고등학교. 그곳에 입학하자마자 우리들은 밤 9시까지 책과 선생님의 몽둥이에 혹사당해야했고, 체육이나 교련시간에는 꼬박 학교 운동장 돌멩이 치우는 사역에 동원되었다.
성적을 기준으로 상·중·하 세 개 반으로 나누어 실시하는 분반수업은 우리의 인간성을 철저히 파멸시키고 그 많던 청소년들의 꿈조차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목표는 오직 하나 점수 향상.
매주 치르는 시험성적에 일희일비하고 그렇게 보낸 3년, 학교는 덕분에 서울대를 비롯한 각 우수대학교에 입학을 가장 많이 시키는 서울 시내 소위 명문고등학교로 매스컴의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 훈련의 조금이나마 혜택을 받았지만 기껏 고등학교 학창시절 가장 즐거운 기억이란 게 토요일 하교시간에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종점인 남가좌동의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고작이었다면 16, 17, 18세 이 3년 간 나의 인생은 르네상스 이전 중세 암흑기였음이 분명하다.
오죽하면 우리 동기생들은 졸업 후 학교가 있는 중곡동을 보고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농으로 말했을까.
그리고 대학을 다니면서 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근본적이고 확실한 방안은 혁명 아니면 교육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난 지독하게도 제도권 교육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도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결혼 후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가장 큰 이유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우리나라 교육풍토에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는 절박함이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탄생하고 어느 정도 위안을 삼을 수 있었지만 한계는 여전했다. 이민을 가지 못할 바에야 말 그대로 이곳 한국에서 '대안'을 찾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 난 우리 아이를 그 살벌한 지옥으로 보내고 있다. 왜? 물론 과천에 대안학교가 생기기 전인 큰아이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나중에 분당으로 보내자는 기약이 있었기에 이처럼 유별나게 고민하진 않았다.
과천에서 대안학교의 설립논의는 몇 년 전부터 있어 왔다. 공동육아와 방과후교실 학부모와 교육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대안학교 설립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왔고 지난해 여름 학교부지와 건물 문제가 해결되더니 급물살을 타 3월 개교를 의한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평소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대해 침 튀기며 비판을 서슴지 않았기에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었다. 사전 학부모모임에도 참석하고 아이를 2박 3일 예비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막상 취학통지서가 오고 예비소집에 이어 3월이 가까워지자 작은아이를 대안학교로 보내기에는 마음이 흔쾌히 허락되질 않았다. 기부금은 은행대출을 받으면 되고, 월 수업료는 어차피 현재 지출되고 있는 학원 수강비에서 '세이브' 된다는 계산으로 오히려 경제적인 부담은 덜어졌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설립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도 아니며 교육프로그램이 미흡해서도 아니다. 의무교육을 시키지 않은 범법자가 되거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가 나중에 검정고시를 치루어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떨친 지 오래이다.
'흔쾌하지 않음'에 대해 난 스스로 당황했다. 왜? 자문은 이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없으므로 빨리 답을 내려야 했다.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만약 우리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내면 나부터 공교육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그동안 공교육을 비판한 것이 대안 없이 단순히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었던가. 지난 1년간 학운위에 참여한 동기는 공교육에 대한 나름대로 책임의식의 발로였는데…. 이런 고민에 대해 누군가는 "대안학교가 공교육에 발전적 모델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직 거리감이 있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이 결론은 너무 거창해서 닭살이 돋는다. 두 번째 현실적인 이유는 몰지각한 경쟁구도가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라면 이렇게 치열한 현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은, 글쎄 "사자 교육법"이랄까, 그런 심정도 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왜곡된 경쟁구도' 속에 아이가 각박하게 자라지 않도록 배려해야하는 부모로서의 관심이 전제되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대인관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대안학교는 5-6명 또래의 소수 친구들을 싫으나 좋으나 6년 동안 친구로서 지내야 한다. 그러나 제도학교 역시 훨씬 많은 친구들과 사귈 기회가 보장되어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좀 더 폭 넓은 대인관계의 기회를 가지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교육적 요소이다. 더구나 초등학교의 연령인 경우 그 기회는 더욱 소중하다. 물론 대안학교가 활성화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이런 이유로 해서 난 오늘 하경이를 제도권 교육 속으로 밀어 놓았다. 그렇지만 역시 마음이 개운치 않다.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언젠가 대안학교 보내는 문제를 논의하다가 아내가 한 말이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대안학교든 제도학교든 아이가 재미있다면 어디든 게의치 않겠다고 복잡한 심사를 정리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당분간은 학교 가는 아이를 볼 때마다 살어름을 걷는 긴장감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아이가 걷는 길이 정 아니라고 판단되면 난 그때 '대안'을 선택할 것이다.
"학교 재미있었니?"
"아니, 하나도 재미없어. 너무 시시한 것만 하고.."
하경이의 심드렁한 대답이 첫날부터 나의 심사를 꼬이게 만든다. 부모란 이렇게 힘든 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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