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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인사권 문제를 놓고 대통령과 검찰이 진검승부를 벌인 것이다. 노대통령은 개혁의 이름으로, 검사들은 검찰 독립을 놓고 첨예하게 맞섰다. 서로 낯을 붉힐 정도로 논쟁은 치열하였다. 국민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논쟁으로 먹고산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검찰, 그 중에서도 가장 언변이 좋은 열 명의 평검사 대표들과 그들로부터 '토론의 달인'으로 칭해진 대통령의 한판이니 한국 최고의 토론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는 3류 논쟁으로 마감하였다.

대화도, 토론도 없었고 논쟁뿐이었다. 서로 입장만 확인하였을 뿐 합의를 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본말의 전도, 반칙, 상대방 말 빼앗기, 논리의 오류가 연이어졌다. 먼저 반칙을 한 것은 대통령이었다.

원탁으로 자리를 배치하지 않고 대통령이 높은 자리에서 검사들을 내려보는 구조를 취하였다. 하지만 치졸한 반칙을 일삼은 것은 검사측이었다. 용어, 논점 일탈 등 지엽적인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였고 상대방이 말하는 중에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대통령의 청탁, 형의 문제 등 사실로 입증된 것도 아닌 것으로 대통령을 흠집 내려 하였고 논지의 핵심도 비켜갔다. 이름하여 인신공격의 오류다. 이것이 토론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최고 엘리트인 검사들이 왜 이 오류를 답습하였을까? 이런 방법이 아니면 대통령을 '제압'하지 못할 것 같아서인지, 아니면 그런 식으로 피의자들을 몰아친 것이 군사독재 정권 이래 한국 검사들의 수사로 관습화한 한 양태인 지 묻고 싶다.

검사들은 두 시간 내내 인사위원회를 만들고 인사 제청권을 달라고 떼만 썼지 왜 그래야 하는 지 논리적 근거를 대지 못하였다. 그들은 대안도, 제도적 보완도 없이 당위적으로 자신들에게 인사권을 달라는 말만 되풀이하여 주장하였다. 장관의 제청권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운 논리의 전부였다. 검찰이 권력기관이므로 인사권을 외부에 주어 견제를 해야 한다는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자 결국 검사들 스스로 순환논리에 빠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검사들은 용어 등 지엽적인 것에 대한 집착, 밤을 새워 고생한다는 정황론, 외압에 맞서는 것이 검사의 본령일진데 자신 스스로 외압에 맞서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 자가당착의 우, 그리고 논리에서 벗어난 유추를 쏟아내는 실수를 남발하였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 백미는 히딩크론이다. 한 검사는 히딩크에게 전권을 주었기에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른 것이라며 검찰총장에게 인사의 전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지의 가장 큰 오류는 유비추리의 오류와 범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4강에 들어간 것은 붉은 악마 등 국민의 열광적인 성원, 축구협회의 지원, 홈그라운드의 이점 등이 작용하였는데 히딩크의 선수 선발권이라는 극히 지엽적인 것을 전체로 확대하였다. 더불어 범주가 다른 것은 비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비유를 하려면 비유의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검찰과 축구선수, 히딩크와 검찰총장 사이에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

전 세계가 검찰의 인사권을 검찰총장에게 주지 않는 것은 권력을 가진 집단을 견제하기 위함인데 축구선수가 권력을 가졌는가? 백보 양보하여 축구의 비유를 허용해도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검사는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하는 선수에 가까운가, 선수들이 규칙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살피며 규칙을 어긴 자에게 벌을 주는 심판에 가까운가? 초등학생도 거의 맞힐 문제다. 축구로 비유하면 선수가 아닌 심판이 검사와 통한다. 그러면 히딩크에게 월드컵 심판 선발의 전권을 주어 한국 경기 때마다 한국 사람이 심판을 보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소가 웃을 일이다.

누가 착하면 손해 보는 사회를 만들었는가

이날 검사의 말을 들으며 어두운 과거가 떠오른 이는 필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검사의 말에 시비를 따지는 것은 바로 검사들의 이런 궤변들이 억울한 사람들을 벌하고 강자를 보호하면서 검찰의 중립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기술'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열정에 찬 젊은이들이 편안한 삶을 버리고 기꺼이 조국 민주화의 밀알이 되려 하였을 때 독재정권의 편에 서서 위와 같은 논리로 세 치 혀를 놀려 용공, 이적분자의 굴레를 씌운 이는 과연 누구인가.

검사에게 압력을 가하는 세력은 정치인만이 아니다. 재벌, 관료, 언론, 지역유지 등의 힘에 의지해 무고한 국민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이들은 또 누구였던가. 오죽 했으면 그 동안 한국 사회에서 관용어가 되어버린 말이 무전유죄(無錢有罪)와 "착하면 손해 본다"는 것이었는가.

빽 없는 국민은 몇 백원을 훔친 죄로 1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힘깨나 쓰는 재벌이나 정치인은 수천 억을 횡령해도 늘 무죄방면이나 집행유예, 병 보석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벌을 받고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가. 국민의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마를 날이 없다. 옛말에도 법이 바로 서지 않으면 백성들이 수족을 둘 곳을 찾지 못한다 했다.

그런 면에서 9일의 토론은 본말이 전도되었다. 검찰의 독립이 목적은 아니다. 검찰이 어느 편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사회정의를 지켜내기 위한 방편으로 검찰의 독립이 필요한 것이다. 검사들이 그 동안의 과오를 반성하기를 애당초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 한 검사도 말로나마 국민이 더 이상 억울한 피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검찰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지 않았다.(물론 이 점은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그날 대통령에게 당당하게 할말을 하던 젊은 검사들에게서 임금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선비나 일제 경찰에 맞서서 "조국 독립 만세"를 외치는 독립투사의 모습이 전혀 겹쳐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인사권 타령만 반복하였지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였기에 국민들 대부분이 그들의 주장이 정의가 아니라 집단을 위한 것임을 읽고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5년 뒤를 몇 차례 거론하여 속내를 드러냈다. 그리하여 그들의 당당함이 강한 자에 맞서는 용기라 아니라 "정권은 유한하고 검찰은 영원하다"라는, 그리하여 대통령보다 더 눈치를 볼 사람은 검찰 선배라는 특권의식과 오만함을 보여주었다. 만약 이들이 이날 대통령에게 한 것처럼 외압을 요구하는 검찰 선배나 수뇌부, 부조리한 강자들에 맞서서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면 지금 국민들이 이처럼 그들을 불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 검찰 수뇌부였거나 노쇠한 검사였으면 덜 참담하였을 것이다. 3, 40대의 젊은 검사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로 선발되었다는 자들이 집단이기주의와 특권의식, 오만함에 물들어 있고 자신들을 옹호하는 논리조차 비논리와 오류로 일삼는데 어느 누가 한국 검찰의 미래를 밝다 하겠는가.

그래도 코피를 쏟아가며 밤을 새우며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정의를 지켜내려고 어려운 조건에서 고군분투하는 평검사들이 더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들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검찰 수뇌부를 대변하였을 것으로 헤아려본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날 보인 평검사들의 모습이 진정 우리 검찰의 실상이라면 검찰의 개혁은 인사나 제도 개혁을 통한 정치적 중립만으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검사가 만들어지는 제도 자체의 개혁이 없이는 어떤 개혁도 미봉책이다. 중세인과 근대인을 가르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성찰의 여부이다.

지금도 검사들이 자신이 범한 잘못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권력의 사수에만 골몰한다면 한국 검찰은 중세 봉건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인류 문명사는 성찰을 통한 진보의 역사였다. 반발할수록 검사의 위상은 전락하는 줄 왜 모르는가? 진정 검찰을 생각한다면 반성부터 하라. 검사들의 진지한 성찰, 그를 통해서만 한국 검찰은 정치적 독립과 국민의 신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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