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는 3월 26일 고영구 변호사를 26대 국정원장 후보로 내정했다. 공표는 안했지만 기조실장에는 인수위원 출신의 서동만 교수(상지대 교양학부)를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가 3월 27일부터 국정원 업무현황 보고를 받는 자리에 서 교수를 배석시킨 것에서도 확인된다.
노 대통령이 정치권 출신이 아닌 '민변' 회장 출신의 실무형 인사를 국정원장에 앉히려는 것은 정치개입을 차단하고 조직을 혁신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국정원 안팎에서는 고영구 후보자가 개혁 성향이라는 것 말고는 국정원 조직의 책임자로서 갖춰야 할 해외 및 대북 분야의 전문성은 취약하다는 점에서 국정원 개혁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학자 출신으로 노 대통령과 가까운 서동만 교수를 기조실장에 내정한 것도 '시대 흐름'에 어긋난다. 핵심 요직인 기조실장은 국정원의 조직 관리 및 예산 편성·집행을 관장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측근 인물'을 통해 돈과 인사를 틀어쥐려고 한다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다. 노 대통령측은 '오해'라고 펄쩍 뛰겠지만 세상 인심은 그렇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국정원 전문가인 Q 교수는 이렇게 우려를 표명했다.
"노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이 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듯하다. 국정원은 (개혁의) 방향만 잘 잡으면 된다.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원장과 기조실장에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청와대가 돈이 없기 때문에 대통령의 '통치자금'을 마련하려고 그런 것 아니냐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김대중 정부 때도 초기에는 그랬다. 특히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을 기조실장에 앉히면 '색안경' 쓰고 볼 수밖에 없다. 정보기관의 조직관리와 예산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사람보다는 시스템 보완이 필요하다
이 전문가의 지적처럼 좀더 우려되는 것은 학자인 서 교수에게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정규직원만도 5000여명이 넘는 국정원의 조직관리와 예산을 맡긴 것이다. 연륜이 40년 넘은 조직의 관리와 예산을 '외부 인사'에게 맡기는 것은 조직의 사기 차원을 떠나 우스운 일이다.
오히려 국정원 내부에서는 '옥상옥'으로 불리는 기조실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역대 대통령들이 정권 탄생에 기여한 측근들을 기조실장에 임명해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온 만큼 이번 기회에 조직을 이원화시키는 기조실을 폐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직원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도 전해진다.
서울 출신의 서동만 교수는 95년에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정 1945-1961' 제목의 논문으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 교수 본인도 인수위 시절에 전공을 살리는 대북 3차장을 원했고 '인사청탁'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서 교수에게 자리를 주려면 3차장 같은 '전공'과 관련된 자리가 제격이라는 지적이다.
그 대신에 기조실장에 굳이 '외부 인사'를 앉히려면 차라리 재경부 관료나 '예산 전문가'를 보내는 것이 좋다는 지적도 있다. 국방부도 방대한 국방예산과 방위력 개선사업을 관장하는 차관(보)에 예산 전문가를 앉혀 예산관리시스템을 개선하는 효과를 거둔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이른바 '통치 자금' 명목으로 국정원 예산을 한푼도 가져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구여권 관계자들도 이 점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그럼에도 국정원 예산은 각 부처의 예비비 등의 명목으로 '은닉'돼 있고, 국회도 예산 총액만 심사할 뿐 세부 항목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심사를 할 수 없어 여전히 최고 통치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돈을 끌어다 쓸 수 있게 돼 있다. 국정원 예산의 정치권 유입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결국 현재의 시스템 아래서 최고의 방지책은 대통령의 의지뿐인 셈이다. 물론 지금 노무현 정부에서도 방지책은 '대통령의 의지'뿐이다. 지금 국정원에 시급한 것은 '사람'보다는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