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경주 한국의 술과 떡축제'가 지난 3월 29일부터 벚꽃이 막 꽃망울을 터뜨린 경주 보문단지에서 열렸습니다. 지난 1999년에 시작돼 올해로 5회째를 맞는 이 축제는 팔도의 유명하다는 술과 떡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한마당 흥겨운 축제였습니다.
60종 이상의 전통떡과 역시 60종 이상의 전통술이 사람들의 이목을 잡기 위해 분주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그렇게나 많은 떡이 있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익숙한 인절미, 시루떡, 절편 등도 갖은 모양과 맛으로 새롭게 태어나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와 맛을 자랑하며 관람객들의 눈과 입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떡 뿐만 아니라. 주당들이 본다면 금세 흐뭇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질 것 같은 갖가지 종류의 전통술이 관람객을 맞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맛과 향으로만 술의 품질을 결정하면 안되겠지요. 인삼은 물론이고 갖은 약재와 성분이 들어 있어 우리의 몸을 울끈불끈 기운차게 만들어줄 건강주들이 가득했습니다.
일본 나라(奈良)시 등 해외의 자매도시에서도 참가해 그네들의 술과 떡을 선보였습니다만, 우리 떡에는 맛과 모양에서 크게 못미칠 것 같았습니다. 일본에서 술과 떡 축제가 열린다면 자매도시로 참가할 우리 떡이 일본사람들에게 그렇게 생각되겠지만, 어쨌든 여긴 우리 땅 아닙니까.
만들어진 떡을 보고 먹기만 한다면 재미가 없겠죠. 행사장 곳곳에 마련된 참여마당에서는 떡메치기, 술 재료 알아맞히기 등 관광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도 진행됐습니다. 처음에 쑥스러워 망설이던 사람도 사회자의 능숙한 진행과 강요(?)에 못이겨 무대에 오르고, 이내 사람들로 둘러 싸인 무대는 들썩들썩거렸습니다.
진달래화전을 부치고, 떡메를 치는 등 관람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습니다. 거기다가 잘하면 선물도 받을 수 있으니 인기가 대단했지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행사장 중앙에 위치한 공연장에서는 쉴새없이 우리나라와 해외 자매도시의 전통예술이 공연됐고, 그 주위로 투호 던지기, 널뛰기, 전통 닭싸움 등 민속, 전통이라 불리어지는 거의 모든 행사들이 없는 것 빼고는 다 벌어 졌습니다.
인근 호텔에 마련된 특별전시장에서는 전통술 제조과정이 시연되기도 하고, 술과 떡에 관련된 다양한 전시물도 준비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축제는 시끌벅적한 야외에서 즐겨야 제맛이지요. 카메라를 둘러맨 사진가들과 기자들, 그리고 방송국의 취재열기도 대단했습니다. 대구의 모 방송국은 아프리카 출신의 리포터를 보내 한국의 전통 술과 떡에 대해 자세히 취재하더군요. 러시아 무슨 방송국에서도 카메라를 보내 취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축제를 다 둘러 본 셈입니다. 불과 1시간여 동안 둘러보고 이런 생각이 들어 내가 제대로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혹시 오늘 행사만 그런가 싶어 일정표를 봐도 6일 동안의 스케줄이 대동소이했습니다.
좀 특별한 일정이라고 하면 술과 떡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너훈아, 패튀김, 조영필이 등장하는 이미테이션 가수쇼, 재즈댄스, 에어로빅 시연이 준비돼 있더군요.
그리고 변두리 공터에서 가끔 열리는 중소기업상품전이나 야시장 등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국적불명의 각설이 쇼도 '역시' 있었습니다. 이상한 분장을 한 각설이들이 관람객들(주로 낮술이 벌겋게 취하신 아저씨나 아주머니)을 상대로 질낮은 농담 따먹기를 하는 내용이죠.
다리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하는데 행사장을 몇 번 더 둘러봐도 새로운 것은 없었습니다. 이제 전시된 술과 떡을 사서 맛보는 것만 남은 것 같네요. 벌써부터 행사장 곳곳의 나무 그늘마다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술과 떡을 팔고 있는 천막이 불만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몽고의 파오처럼 생긴, 똑같은 모양의 흰색 천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거기서 팔고 있는 떡은 모두 같은 용기에 포장돼 있습니다. 똑같은 축제 스티커가 붙어있는 포장용기는 우리의 전통떡이 아니라 공장에서 찍어낸 과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술도 마찬가지네요. 소주, 맥주, 양주로 삼분돼 있는 시장에 몇 년전부터 모 업체의 선전으로 전통주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참 반가운 현상임에 틀림이 없지만, 한국의 술과 떡 축제에 철저하게 상품화된 술만 참가했다는 것은 어째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똑같은 천막에서 똑같은 용기에 담긴 떡을, 또 대형할인마트나 백화점 주류코너에나 어울린만한 고급스런 용기에 담긴 술을 사가라고 강요하는 것 같네요.
5일마다 서는 시골장을 경험하신 분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정과 푸근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TV에서도 잊을만하면 시골장에 리포터와 카메라를 보내지 않습니까. 다 이유가 있겠죠. 좀 야박하게 말하면, 아직도 그런 풍경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상품성이 있는 것이기도 하겠고, 점차 사라져 가고 있으니 희귀성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시대에 전통문화의 상품성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번 술과 떡 축제가 열리길 기다리며 내심 왁자지껄한 가운데서도 사람 사이의 정과 고향에 온 것과 같은 푸근함이 느껴지길 기대했었기 때문에 생기는 아쉬움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벤치에 앉아 아픈 다리를 쉬면서, 직접 술과 떡을 빚어 잘 어울리는 그릇에 담아 역시 잘 어울리는 곳에서, 비록 돈을 받고 파는 것이지만, 관람객들과 나눈다는 의미를 살릴 수는 없을까, 혼자 고민해 봤습니다.
요컨대 술과 떡이라는 물질적 대상에 대한 축제가 아니라 그 대상을 창조해내고, 나누는 과정을 대상으로 한 축제를 만들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주위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이벤트들이 연관성 없이 따로 놀지 않고, 술과 떡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어울릴만한 흥겨운 놀이로 채워졌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도 생겨났습니다.
우리 문화에서 술과 떡이 지니는 의미는 나눔과 정일 것입니다. 이 축제의 기획의도에서도 나와 있듯이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술과 떡을 빚어 이웃과 나누며 '우리는 하나' 라는 공동체 정신을 일깨우고 상부상조하는 우리의 아름다운 정서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문화관광부에서도 우수 축제로 지정해 지원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규모와 시설, 그리고 다양하고 바쁘게 진행되는 다양한 행사에서 주최측의 노력과 열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제 글이 그 분들의 노고를 폄하하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술과 떡이라는 소재로 이렇듯 큰 국제규모의 행사를 만들어 주신 그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라져 가는 우리의 것을 지키고, 풍성한 지방문화를 세워 나가는데 지방자치단체의 관심과 노력이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경주시에서 마련한 이번 축제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발전해 지방문화 컨텐츠 발굴의 모범사례로 남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