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청바지 입고 운동화 신은 아이가 PC방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검색을 하고 있다." 이 문장을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리바이스 입고 나이키 신은 아이가 PC방에서 코카콜라를 마시며 구글을 하고 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상표가 다를 수 있어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내게는 후자가 훨씬 더 자연스럽고 현실감 있는 문장이다. 이 경우 리바이스ㆍ나이키ㆍ코카콜라ㆍ구글은 각자의 영역에서 일반명사에 근접한 지위를 확보한 상표다. 뭐 동의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른 상표를 떠올릴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반명사 대신 고유명사로 뒤덮여 있고, 각 부류별로 일반명사에 버금가는 지위를 확보한 상표가 있게 마련이다. 한번쯤 당신 주위의 물건들을 곰곰이 살펴보고 그 중 상표가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기를 바란다. 아마 물건의 99%에는 반드시 상표가 드러나 있든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오래 전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마시는 술이나 음료수의 상표가 노출되는 것을 금기시 한 탓에 심지어 그냥 '소주' '우유' 등 일반명사를 상표자리에 붙여 놓은 희극적인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제 다 과거의 추억이다. 영화제작에는 반드시 후원사의 막대한 지원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제임스 본드는 BMW를 몰고 오메가 시계를 차고 있으며 노키아 휴대폰으로 전화한다.

제임스 본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산다. 소니 TV로 뉴스를 보고, 윈도 운영체제로 인터넷 서핑하며, 코카콜라로 갈증을 풀고, 현대 아파트에서 산다. 만약 경제적인 제약이나 거래상 불편함이 완벽하게 제거된다면 어느 한 상표의 시장 점유율은 소비자의 머리 속에 자리잡은 인지도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기업에게 자기 상표가 일반명사의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훈장을 받는 것이나 다름 없는 셈이다. 소비자가 첫번째 떠올리는 상표가 예외 없이 최고 시장점유율을 확보한다.

후발 상표가 일반명사의 지위를 확보한 선발 상표를 따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막대한 돈을 들여 모든 대중 매체를 동원한 융단 폭격식 광고캠페인을 벌이든지 아니면 그냥 그 부류를 포기하고 자신 있는 다른 분야를 선점하면 된다.

사실 이런 전략 때문에 우리는 요즘 상표 뿐 아니라 그간에 듣도 보도 못한 무수히 많은 세부 부류의 제품들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할인점에 가서 요새 나온 치약의 종류가 몇 가지나 되는지 한 번 세어보라.

삼성이 이런 전략으로 큰 성공을 거둔 회사다. 1980~90년대를 통틀어 가전제품하면 소니가 일반명사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삼성의 기술력도 향상되고 뛰어난 제품들도 많이 만들어 냈지만 일반 가전제품 에서 소니가 차지한 일반명사의 지위는 앞으로도 절대로 뺏어올 수 없으리라 본다. 소비자의 인식이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밀한 전략적 준비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삼성은 일반 가전제품 대신 휴대전화라는 새로운 부류를 집중 공략한 결과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서 거의 일반명사의 지위를 넘보는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가 상표전파전략에서 유리한 것은 아무리 급하고 지각을 하는 한이 있다 해도 휴대전화만큼은 반드시 챙겨 나간다는 것이다. 즉 길거리에서,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24시간 지속되는 상표노출효과를 거둘 수 있다. 새로 산 집안의 TV가 아무리 자랑하고 싶어도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삼성의 휴대전화는 1980~90년대 소니사 워크맨이 가져온 상표제고효과를 삼성에게 안겨주고 있다. 삼성 휴대전화의 길거리 상표노출은 이 회사의 다른 제품에까지 그 수혜의 과실을 나누어 줄 것이다.

최근에는 고유명사의 일반명사화가 사람의 이름에까지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정몽준스럽다'는 어떤가? 지난 대선을 눈 여겨 지켜 본 한국인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몽준 가출사건의 진상이 대중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폭 넓게 유포되고 재해석되었기에 앞으로도 한동안 한국인의 새로운 형용사로서 위세를 과시할 것이다. 반면 진보누리 측에서 사전에 오른 신조어라고 한 '노무현스럽다'는 어떤가? 글쎄 그곳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감대를 얻어 형용사처럼 쓰이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거기까지가 한계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특정인의 이름이 어느 집단 내에서 일반명사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은 왕왕 벌어지는 일이다. 인터넷 카페를 가 보아도 몇 몇 유명한 회원들은 아이디가 일반명사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 언어의 부족화가 벌어진 것이다.

사실 대중매체가 보급되기 전만 해도 모든 언어는 부족적이었다. 한 마을에서만 통하는 고유의 언어습관과 단어들이 분명히 있었을 터인데 전국을 아우르는 대중매체가 보급되고 표준어 교육이 진행되면서 국가단위의 언어집단으로 통합되었을 뿐이다.

이제 인터넷의 확산으로 수십 만 개의 사이버 부족들이 자생하기 시작하면서 언어 역시 같은 경로를 걷기 시작할 것이다. 심지어 일부 세대와 집단 사이에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까지 갈 지도 모른다.

언어의 부족화 현상은 부족 내에서 일반명사의 지위를 차지한 상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부족화를 부추긴다. 요즘 10대를 겨냥한 시장관리는 더는 TV나 신문을 이용하지 않는다. 이들이 신문이며 방송을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10대용 상표는 인터넷 채팅 사이트로, PS2의 게임 속으로, 혹은 PC방을 파고들어야 한다. 어른 세대에게는 일반명사의 지위를 차지한 익숙한 상표들이 이들에게는 그저 알아듣지 못 할 방언에 불과할 뿐이다. TV 오락프로그램들이 문자공해다 싶을 정도로 자막을 남용하는 것은 바로 10대의 채팅세대를 끌어들이려는 몸부림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한 상표의 생존전략은 무엇일까? 답은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표를 바꾸고 새로운 부류의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냥 변신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만물을 관통하는 법칙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민경진은 영원히 민경진이지만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 것이며 봄에는 푸른색 재킷으로 갈아 입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검은색 정장에 자주빛 넥타이를 맬 것이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반면에 민경진이 1년 사시사철 단벌정장으로 버틴다고 가정하자. 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변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이상한 눈총을 받을 것이다.

기성 상표의 생존전략 역시 이 자연법칙을 따른다. 정체성은 변하지 않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글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있다. 구글의 로고라는 정체성은 사철 변화가 없지만 겨울이 되면 로고 위에 소복하게 눈이 쌓이고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선글라스를 낀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크리스마스에는 당연히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를 타고 있게 마련이다. 아마 부활절이 다가오면 알파벳 'O' 두개가 달걀로 변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이런 방식이다.

▲ <와이어드> 표지
ⓒ 민경진
필자가 구독하는 <와이어드> 역시 이런 전략을 따른다. 할리우드가 표지기사라면 잡지의 상징은 할리우드의 간판 모양으로 변신하고 포뮬라원이 화제라면 자동차 경주장의 깃발로 변신한다. 하지만 로고의 정체성은 그대로이며 변했기 때문에 오히려 변하지 않는 단단한 잡지의 정체성을 확보한다. 변화의 역설이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벌써 개혁피로증을 운위하며 등을 돌리는 지지자들이 있다고 한다. 성미 급한 한국인이라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하지만 어쩌랴. 필자가 보기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노무현 정부의 개혁, 즉 '참여정부'라는 상표는 만인이 두루 사용하는 일반명사로 급속하게 변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도 개혁, 재벌들도 개혁, 너도 개혁 나도 개혁 어른도 개혁 아이도 개혁….

당초 지난 대선 기간을 통해 형성된 독특한 노무현 표 개혁이라는 고유상표는 이제 일반명사로 변신하는 소득을 얻는 대신에 신선함을 잃고 평범한 생활명사로 전락하는 부작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북송금 특검 건이나 이라크 파병에 따른 대립도 큰 원인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빨리 변하는 국민들답게 어차피 싫증 내고 새로운 모습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 상표나 시장에서 성공한 기성 상표나 변화의 원칙에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변화되 변하지 않는 것이다.

참여정부라는 상표로 대표되는 개혁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을 것이되 그것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들 그리고 외피는 끊임 없이 변신하고 삶 속으로 다가와야 할 것이다. 원래 변신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법이다. 적절할 때 변신하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 때 개혁의 정체성은 더욱 신선해지고 뚜렷해지는 법이다.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역설의 법칙이다.

jean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