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어느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진의'일까.
노 대통령은 최근 하루 사이에 불안감과 의연함을 오가는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아마도 두 가지 모습 모두 노 대통령의 진의일지 모른다. 본래 우리네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을 놓고서도 비관과 낙관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종종 보이지 않던가.
그러나 근래 들어 노 대통령이 적지않게 우울해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지난 9일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했을 때도, 노 대통령은 그 동안 여러 어려움 속에서 우울했던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무엇이 노 대통령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지난 해 노풍을 등에 업고, 그리고 후보단일화를 통한 대역전극을 통해 드라마와 같은 승리를 이루어냈던 그가, 불과 집권 2개월도 되지 않아 불안감과 우울함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 대통령은 세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 인사문제에 관한 편중과 난맥에 관해서 여전히 지적을 받고 있다는 점. 둘째, 개혁에 관해서도 한쪽으로부터는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는가하면 한편으로부터는 개혁이 물건너갔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상황. 셋째, 자신의 측근이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불미스러운 명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
이 세가지를 들어 노 대통령은 지난날 국민의 정부가 걸었던 전철을 다시 밟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겉으로 보기에는 타당한 비교와 진단이다. 그러나 이같은 내용들은 현상적인 문제에 불과할 뿐,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지적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앞의 세가지 문제는 국민의 정부 시절과 비교하면 문제의 심각성이 그리 큰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 문제를 국민의 정부의 그것과 비교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긴장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지난 두 달간 대통령과 국민의 불안감이 동시에 증폭된 근본적 원인은 집권세력의 내적 요인에 기인한 바 큰 것으로 파악된다. 돌려 말하느라 이렇게 어렵게 표현한 것이지, 간단히 말하면 논란의 증폭과정 한복판에 노 대통령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5년 전 김대중 정부 집권 초기에도 국정 난맥은 있었지만 거기에는 야당의 발목잡기가 상당 부분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이회창 후보라는 구심이 사라진 야당은 지도력의 공백 속에서 그리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언론으로부터는 야당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물론 일부 언론의 공격적 자세에 따른 논란의 확대재생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집권세력 자신의 책임이 커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두 가지에 있었다. 첫째, 국정의제의 우선순위가 제대로 조정되지 못하거나 심지어 통제불능의 상태로 방치되곤 했다. 지난 두 달을 놓고보면 노무현 정부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는 언론과의 관계라는 의제가 자리하게 되었다. 언론개혁에 정부가 나서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정부로서는 의도치 않은 결과였을지 모르지만, 취재시스템의 변화시도와 이를 둘러싼 갈등의 현장에 대통령이 있어야 했고 장관들이 있어야 했다. 많은 국민들은 북한핵문제와 경제사정 악화라는 환경 속에서 정부가 언론과의 씨름에 그토록 매달려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둘째, 국정이 지나치게 대통령 개인의 생각 혹은 즉흥적 대응에 따라 좌지우지 되었다는 점이다. 그 동안 언론과의 관계가 최우선적 의제로 부상했던 것도 결국 노 대통령이 갖고 있던 언론에 대한 불신과 적대적 감정에 기인한 바 크다. 그리고 순간 순간 있은 그의 발언들은 소모적 갈등의 확대로 이어졌다. 언론과의 관계에 대한 이같은 대통령의 관심과 집착은 다른 국정현안들을 압도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북핵문제의 해결방안보다는 기자들과 술먹고 헛소리해서는 안된다는 금지령이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난번 국회에서의 국정연설 이후의 상황은 이와 관련하여 매우 상징적이었다. KBS 사장 선임 문제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 노 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 그리고 직후의 청와대 브리핑에서 자신의 진의를 해명하는데 집착하였다. 그러다보니 그날 국회연설에서 노 대통령이 제안했던 정치개혁방안 같은 것은 관심에서 실종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오해나 공격을 참지못하여 일일이 대응에 나서는 상황에서는 국정이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기가 힘들어진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이후 50여일 동안 적지 않은 새로운 정책들과 구상들을 내놓았다. 매일매일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을 보면, 노 대통령의 신선한 정책구상과 제안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점에서도 그는 분명 성실하고도 우리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가 넘치는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그같은 의미있는 내용들보다는 여타의 소모적인 논란들만이 국민의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 기인한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이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이 전개된 책임을 일부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에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자신의 행보가 어떠한 반응과 파장을 초래할지에 대한 예견능력, 그리고 상황에 대한 조절과 통제능력조차도 집권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의를 믿어달라는 주문은 한두 번은 몰라도 언제까지나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9일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선거때 반대편에 섰던 사람에게도 분노를 기억하지 않고, 반드시 풀고 힘을 합치자고 손을 내밀겠다"며 국민대통합의 길로 가겠다고 말했다. 진작에 있었어야 할 당연한 말이었다.
사실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노 대통령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말이 이제야 나온 것이다. 대통령이 된 입장에서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며 협력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그동안 노 대통령은 그같은 말을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대선 이후 노 대통령은 줄곧 자기 편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왔다. 인사에서도 언론관계에 있어서도 대통령과의 코드일치 여부는 우선적인 잣대가 되었다.
그같은 모습이 지난 대선에서 노 대통령을 찍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졌고, 그들의 정서를 어떻게 자극했을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에 실시되었던 한 여론조사 결과,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70%대를 기록했다. 3김과는 달리 지역기반이 약한 노 대통령으로서는 그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래도 역대 대통령들이 집권 초기에 90%대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점을 떠올리면 불안해 보이는 지지율임에 사실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두 달 동안 '새로운 대통령'의 특권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에 대한 지지층을 최대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이른바 반(反)개혁세력에게 손을 내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자신을 찍지 않았던 국민들에게는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들은 쳐다보지를 않았다. 자신들을 보는 대통령의 시선이 어떤 것임을 감지한 이들을,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려 하였고, 장차 비토세력으로 자리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지난해 대선에서 노 대통령의 주된 지지기반이었던 젊은층은 더 이상 고정적인 지지층이 아니다. 그들의 선택의 출발점이 노 대통령의 정치이념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무엇에 대한 갈구였기 때문에, 그 새로운 지향점이 또 어떻게 변화해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야 워낙 반(反) DJ 정서의 뿌리가 깊어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노 대통령은 그에 비하면 훨씬 용이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지지층을 확장시키는 데 실패하였던 셈이다. 이것은 개혁을 포기하며 반대자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주문이 아니다. 개혁을 추진하되 훨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참여정신을 가질 수 있는 내용과 방식의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개혁과 통합을 위한 지속적 노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개혁이 없는 통합은 과거의 것을 지키는데 머무를 것이고, 통합이 없는 개혁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개혁과 통합은 나라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정권의 성공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대통령이 우울하다. 그러면 국민들은 더욱 우울해진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노 대통령이 자신을 향한 지적들에 대해 귀를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론과 소모적인 씨름을 벌이고 있으며 대통령이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르자 노 대통령은 언론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였다. 국정에 대통령만 있지 총리의 역할은 실종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노 대통령은 향후 총리 역할을 강화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인사와 관련하여 호남소외론이 제기되자 그 실태를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다.
바깥으로부터의 비판 혹은 참모진들의 의견이 타당하면 자신의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수용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대중 정부가 시간이 갈수록 비판에 귀를 막고 자신만이 정의라는 식의 독선을 보였던 점에 비교하면 크게 열려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초기의 시행착오들을 정돈하고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선의'에는 선의로 답하는 것이 우리네 인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