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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에겐 현재 도합 여섯 명의 당질며느리들이 있습니다. 큰댁 사촌형님들의 며느리들이지요. 이 여섯 명의 당질며느리들 중에는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사람도 한 명 있답니다. 이 홀로 된 한 명 며느리가 최근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됨으로써 당숙네 가족들과 같은 신앙 안에서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답니다.

나는 젊은 나이에 홀로 된 당질며느리, 볼수록 가엾고 애처롭기 그지없는 당질며느리가 당숙네 가족과 세속의 인연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관계까지 맺고 함께 신앙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얼마나 고맙고도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그저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지요.

지난해 8월 24일 대전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3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당질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생각합니다. 당질이 마지막 순간에 대세(代洗)를 받은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비록 큰 슬픔을 많은 사람들에게 안겨 주고 허무하게 갔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가슴 가득 고마움을 안겨 주고 있는 거지요.

그 날 중환자실 낮 면회 시간에 당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당질이 소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지요. 그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사촌형님 가족 모두에게 선언을 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나로서는 당질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아직 의식이 있는 당질에게 물어 본인이 세례 받기를 원한다면 지금 당장 대세를 행하겠다는 얘기였지요.

나의 그런 말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찬동한 사람이 당질며느리였습니다. 나는 그 순간의 당질며느리의 간절한 눈빛, 절망적인 순간에도 뭔가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듯한 표정을 지금도 명료히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당질며느리와 가족 모두의 찬동을 확인한 다음 나는 서둘러 중환자실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원목실로 전화를 했지요.

곧 원목실의 수녀님 한 분이 성수병을 들고 중환자실로 들어왔습니다. 수녀님은 환자에게 의식이 있음을 확인하고, 자신이 환자에게 온 이유를 말한 다음, 의식이 있는 환자에게는 대세를 베풀기 전에 반드시 들려주어야 하는 네 가지 중요 교리를 간단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천주존재(天主存在), 삼위일체(三位一體), 강생구속(降生救贖), 상선벌악(賞善罰惡)' 등 네 가지 기본 교리를 수녀님이 설명하는 동안 나는 당질이 실낱같은 마지막 의식으로 그 말씀들을 잘 받아들이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지요.

마지막 '상선벌악'에 대한 설명은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녀님은 마지막으로 환자에게 세례 받기를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환자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어 대답을 할 수는 없으니, 세례 받기를 원하면 고개를 끄덕여 보라는 주문이었지요. 그 순간 내 가슴에 가득하고도 무거웠던 긴장감을 나는 명확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당질은 고개를 끄덕일 기력조차 없는 것 같았습니다. 무거운 적막이 잠시 흐른 순간 당질며느리가 남편의 손을 잡고 얼굴 가까이 대고 말하더군요.

"정흠 아빠, 고개를 끄덕이기가 어려우면 눈을 한 번 감아봐요. 세례를 받을래요?"

그러자 당질은 눈을 감으며 아주 작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습니다. 그 순간의 내 감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는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의 당질이 그렇게 고맙고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대세를 행하기 전에 수녀님은 세례명을 무엇으로 할지를 내게 물었습니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아내가 '스테파노'로 하자고 했습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분인데, 아내가 가톨릭교회의 수많은 성인들 중에서 그 순간 왜 스테파노를 떠올렸는지는 본인 자신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수녀님은 곧 당질의 이마에 물을 붓고 그 이마에 십자를 그으며 "스테파노,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로써 내 당질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고, 스테파노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족들에게 선사해 주었습니다.

수녀님과 먼저 헤어지고 잠시 후 중환자실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당질며느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수녀님이 당질에게 대세를 베풀기 전에 세례 받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원하면 고개를 끄덕여 보라고 했을 때, 잠시 무거운 적막이 흐르던 순간 당질며느리가 남편에게 했던 말을 나는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기가 어려우면 눈을 한번 감아보라고 한 그 음성 속에 당질며느리의 간절한 원의(願意)가 깃들여 있었음을 나는 명료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거지요. 어쩌면 당질이 아내의 그런 마음을 감지한 탓에 순응의 표시를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고마운 마음이 더욱 컸습니다.

그런데 당질며느리는 오히려 내게 고맙다고 하더군요. 당숙 덕분에 참으로 중요한 일을 한 것 같다는 말을 해서 나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한 번도 당숙의 신앙 생활 근처에도 와본 적이 없는 사람의 입에서, 더군다나 절망적인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당질의 시신을 태안의 장의예식장으로 옮겨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많은 신자들이 와서 자연스럽게 '연도'를 바쳤고, 신부님도 오셔서 '사도예절'을 거행할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 '하관예절'까지 모든 장례 절차를 천주교 식으로 거행하면서 나는 천주교 신자로서 참으로 뿌듯한 보람 같은 것을 느꼈지요.

그 후 당질며느리는 태안천주교회 '예비자 교리반'에 정식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홀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씩 배우는 교리 시간에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고, 주일 미사에도 꼭꼭 참례를 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오후의 '어린이 미사'에 초등학교 3학년인 큰아이를 꼭꼭 보내곤 했습니다.

지난해 성탄절 영세식 때 세례를 받고 싶은 눈치였으나 예비자 수업 기간 6개월이 채워지지 않은 관계로 제외가 되었을 때는 내년 부활절 따뜻한 계절에 영세를 받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며 한결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더군요.

그리고 올 부활절에 내 당질며느리는 드디어 영세를 받았습니다. 세례명은 스스로 '스테파니아'를 택했습니다. 스테파니아는 스테파노를 여성화한 이름이지요. 그러니까 내 당질며느리는 남편과 똑같이 스테파노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게 된 거지요.

올해 열한 살과 여섯 살이 된 두 아들도 엄마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큰아이는 '이시돌'이라는 세례명을, 크리스마스날에 태어난 작은아이는 '노엘'이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당질며느리는 일찌감치 대모(代母)를 정할 때 처음부터 내 아내를 지목했습니다. 당질며느리가 속한 삼성아파트구역에서 살고 있는 자매들은 한결같이 신앙심이 깊고 열성적인 사람들이어서 근처에서 쉽게 대모를 구할 수 있을 터인데도 굳이 당숙모를 대모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결정을 하면서 앞으로 당숙모 겸 대모를 어떻게 부를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숙모보다 대모가 더 거리감이 없고 정다운 호칭일 것 같다고 하더군요.

당질며느리가 준비를 착실히 해 가지고 무난히 영세를 받게 된 데는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서른 세 살 젊은 나이에 홀로 되어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야 하는 며느리를 노상 가엾어하고 안쓰러워하는 시부모의 따뜻한 이해가 있었고,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가서 가게 보는 일을 대신해 준 시고모의 도움이 있었고, 서로 번갈아 차량 봉사를 해 준 삼성아파트구역 자매들과 동료 예비자 자매의 도움이 있었지요.

'예수부활대축일'의 장엄미사 중간에 거행된 세례성사 장면을 제대 옆의 성가대 석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당질며느리에게 자주 눈을 주곤 했습니다. 잘생기고 건장한 호남아였던 내 당질과 정말 잘 어울리는, 따뜻한 덕성을 지녔음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기쁨과 영광 속에서도, 그것을 남편과 함께 하지 못하는 쓸쓸함과 애잔함이 어딘가에 어려 있는 것도 같아서 나는 한 순간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습니다.

젖먹이와 어린이 다섯 명을 포함하여 열세 명 새 영세자들의 바로 뒷자리에는 내 사촌형님 내외분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불교 신자로 살아오신 분들임에도 며느리와 어린 손자들이 세례 받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하여 친목회 여행도 불참을 하고 성당에 오신 사촌형님 내외분이 나는 고맙기 한량없었습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성당 안에서도 응석을 부리는 여섯 살짜리 작은 손자를 잠시 안아주는 형님의 모습에는 아들을 잃은 슬픔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애잔하게 어려 있는 것만 같았고….

기쁜 부활대축일 장엄미사지만 미사곡들을 국악으로 불러서인지, 국악미사곡들의 애절한 가락이 한 순간 심금을 울렸는지, 형님 내외분이 잠시 눈물을 닦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영세식을 모두 지켜보고 나서, 12시로 예정된 결혼식 주례 약속 때문에 영성체 직전에 성당을 빠져나간 나는 결혼식장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와 사진 찍는 일을 마치자마자 신랑 신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삐 성당으로 되돌아갔지요. 그래서 아직 성당에 머물고 있는 사촌형님 가족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지요.

먼저 성당을 떠나시는 사촌형님 내외분을 배웅해 드릴 때 형수님이 나와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 며늘애가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성당에 다니지 않았으면 마음 붙일 데가 없었을 거예요.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려고 단단히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모두가 당숙 덕분이에요."

나는 그 말에 "고마운 건 외려 제 쪽이지요"라고 답하며 정말 진심 감사하는 마음으로 활짝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오후에 당질며느리가 우리 집을 방문했습니다. 시어머님이 준비하신 것이라며 할머니에게 용돈을 드리고, 대모가 된 당숙모와 나에게도 선물을 주더군요. 와이셔츠와 넥타이와 양말 등을 받은 나는 셋째 사촌형수님으로부터 매번 받기만 하고 사는 것이 너무 미안하여 형수께 전화를 하면서도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어머니가 당질며느리에게 가슴 아픈 말을 했습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혼자 돼서, 볼수록 내 마음이 아퍼. 긴 세월을 앞으로 어떻게 혼자 살아간다니. 어린 아이들 델구 혼자 살라면 너무 고생스러울 텐디…."

그러자 당질며느리가 함빡 웃음을 머금고 또렷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런 걱정 마세요, 할머니. 저 끄떡없어요. 앞으로 더 열심히 잘 살 거예요."

"그런 말이 고맙긴 허지먼, 젊으나 젊은 과택이 고생허며 혼자 사는 걸 옆이서 그냥 두 눈 뜨구 워떻게 본다니. 그러는 것두 차마 뭇헐 일이여."

그러자 당질며느리는 또 한번 웃음을 머금고 좀더 명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저, 절대로 딴 맘 안 먹어요, 할머니. 아이들을 제 손으로 키워야지 누가 키워요. 그리구 제가 시집을 가면 누가 정흠아빠를 위해 기도해 주겠어요. 제가 정흠아빠를 위해 떳떳이 기도하며 살려면 끝까지 정흠아빠의 아내로 있어야 해요. 할머니, 제 말 아셨죠?"

"그려. 무슨 말인지 알어."
고맙고 기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머니의 음성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습니다.

숙연해진 기분이 무겁기도 했지만 나도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려. 우리 당질며느리가 이제는 완전히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니께 노상 기도허며 살어야 혀. 우리두 더 열심히 정흠아배와 모두를 위해서 기도헤야구…. 우리 서로를 위헤서, 서루서루 열심히 기도허며 살세."

"그래요, 당숙."
그러며 당질며느리는 내게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덕스럽게 생긴 조선 미인형의 얼굴이 한결 예쁘게 보였습니다. 일순 좀더 안쓰러워지는 마음 한 옆으로 새로운 미더움과 기쁨이 내 가슴을 따뜻이 적시며 힘차게 영피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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