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비오는 날 노란 장화를 신고 학교에 온 짝꿍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시에는 장화 그 자체 보다 옆 귀퉁이에 그려졌을 법한‘태권브이’니‘아톰’이니 하는 만화 캐릭터가 내 눈길을 끌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지만 비가 멈춘 하교 길에 놀이터에 모여 물장난 할 즈음, 나의 장화에 대한 부러움은 어느덧‘저런 장화가 나한테도 꼭 있어야만 돼!’하는 욕망으로 발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우리의 물놀이란 (불쌍한 도시 촌놈으로 자란 탓에 도랑치고 가재 잡는 대신) 놀이터에서 찰 져진 모래로 성벽을 쌓고, 인공수로를 만들어 거기에 물을 채우는 짓거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짝꿍의 노란 장화는 고인 물을 담을라치면 여기저기서 줄줄 새고 마는 여느 운동화들과는 달리(그 당시 고무신이라도 있었으면 몰랐겠지만) 대단한 위력을 가졌습니다. 그 후 나에게도 장화가 생겼는지, 아니면 그냥 꿈꾸기만 했던 그 무수한 어린 시절 욕망들 중 하나로 그쳤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직도 짝꿍의 그 노란 색 장화만큼은 눈앞에 선합니다.
비가 내리면 아이들의 등·하교 길은 이내 놀이터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비’라는 것이 세상에 가득 들어차 다른 때와는 다른 풍경과 소리로 등·하교 길을 변모시키는 탓이지요.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의 세상에서도 비오는 날은 약간 소란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내면으로 침잠하게 되고 무언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합니다.
그런 추억을 더듬듯 비오는 날의 정경을 한 줄의 글도 없이 담은 그림책. 음악 CD와 함께 책장을 넘기다 보면 피아노 선율에 어느덧 비오는 날의 풍경이 떠오르고 잔잔한 서정이 밀려오는 책이 바로 <노란우산>입니다.
"저는 비만 오면 아이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우산을 쓰고 움직이는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도시의 모든 소음이 그 우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아주 한가하고 고즈넉하게 아이들이 쓰고 다니는 우산의 움직임만 남은 환상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는 그런 고적함과 그 속에 다니는 예쁜 우산들의 색과 리듬이 담긴 無의미 (혹은 보는 이에 따라 자유롭게 떠올릴 수 있는 多의미)의 책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책에 그림을 그린 류재수씨의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CD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노란 우산>을 따라가다 보면 어릴 적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이 책이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갖게 됩니다. 물론 어린이 용이니 어른용이니 하는 것도 다 문자가 만들어 낸 경계에 불과하다면 문자 없는 이 그림책은 이미 그런 경계에서도 자유로울 수밖에 없겠지요.
이 책은 모두 32쪽 밖에 안 되는 짧은 그림책으로 집을 나온 노란 우산이 여러 가지 색깔의 우산들을 만나 학교에 가는 듯 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아무런 해설이나 글이 없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냥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생각에 잠기게 되는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보면서 자유롭게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고, 아이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마음껏 그 나래를 펼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노란 우산>에 수록된 음악 CD는 모두 열 다섯 트랙으로 되어 있습니다. 1번은 그림책 감상 속도 맞게 곡의 길이를 편집해 음악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게 되고, 2번 트랙은 함께 배우고 부를 수 있는 <노란 우산>의 테마 동요이고, 나머지는 각 장의 그림을 테마로 한 피아노 곡들입니다.
오는 어린이날을 맞아 한 창 전쟁 놀이에 열이 올라 있을 아이들에게 너무나 평온해 거짓말에 가까운, 그렇지만 마음 한켠에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수채화 한 편을 선물해보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