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생기면 이건 꼭 사줘야지' 했던 아이템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예쁜 잠옷과 알록달록한 우산 그리고 장화. "왜요?" 누군가 물었을 때 "없이 자라서" 하고 웃은 기억이 난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갑자기 슬퍼지네"라면서 한 번 더 크게 웃었던.
진짜다. 그때 잠옷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아역배우만 입는 건 줄 알았다(그게 뭐라고). 우산도 그랬다. 비오는 날 내 손에 쥐게 되는 우산이 우산살만 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지금 일회용 우산은 싸고 예쁜데, 그땐 안 그랬다).
검은색, 회색, 체크 무늬, 빨강, 노란색 우산에 간혹 파란 투명 비닐 일회용 우산들.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리본 무늬, 하트 무늬, 도트 무늬. 예쁜 게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예쁜 우산이 우리 집엔 없었던 모양이다. 장화는 정말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는 듯.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했을 무렵, 진짜 예쁜 우산을 백화점에서 큰 맘 먹고 샀다. 아이가 좋아하는 동물이 잔뜩 그려진 우산이었다. 물론 그해 장맛비를 채 다 맞지 못하고 분실했지만. 사실 우산 잃어버리는 건 내 주특기인데. 엄마가 내 우산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나.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알록달록한 우산이 등장하는 그림책 <노란 우산>이다. 그런데 이 그림책에는 글씨가 없다. 시디가 한 장 들어있을 뿐이다. 책장을 펴면 이런 안내 문구가 나온다.
"이제 빗소리와 함께 제일 첫장을 여시고 침묵과 함께 책장을 넘기시며 감상하시기 바랍니다."침묵과 함께 감상하라니. 그림책 입문 몇 년 만에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 안내 문구는 굳이 없어도 될 듯하다. 침묵이 통하지 않는 그림책이니 말이다.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고 글씨가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으니, 침묵이 통하지 않을 밖에. 이 얼마나 신비한 경험인지.
글 없이도 충분히 좋은 그림책노란 우산에 장화를 신은 아이가 집을 나섭니다. 옆동에 사는 아이도 집을 나섭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어딘가로 가는 길, 우산은 셋에서 다섯으로 늘어납니다. 길에 보이는 놀이터를 그냥 지나치지 못 하는 아이들. 괜히 발자국을 남겨 봅니다. 분수대를 지나 계단을 걷고 철길을 건너니 아이들은 십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셀 수 없을 만큼 거리를 메운 우산 행렬. 저만치 학교가 보입니다.
'비오는 날 학교 가는 모습을 담은 거구나.' 마치 드론을 띄워 동영상을 촬영한 듯 빗속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우산 색깔. 그 안에 숨은 아이들의 이야기들이 궁금한데, 여기서 열살 큰아이와 숨은 그림 찾기 하나.
"이 그림책에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게 있던데.""응? 뭔데?""찾아봐.""장화인가? 뭐지? 뭐야? 뭔데?""알려주면 재미없는데... 비오는 날인데, 빗줄기가 그림에 없지 않니?""아... 그래도 비오는 날인 건 알 수 있지.""어떻게?""일단 우산을 썼으니까, 그리고 여기 물웅덩이도 있잖아. 장화도 신었고. 그리고 나무랑 풀도 비가 오니까 색이 짙어졌어. 자 봐봐, 여기."글씨 없는 그림책의 장점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 들었다. 겪어보니 정말 그러하다. 이 책을 혼자 읽을 때는 '아이가 보는 그림 속 이야기는 어떨까' 궁금해 하며 봤는데, 같이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니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재밌어 하는 건 물론이고. 나중에는 한 페이지씩 이야기를 지으며 읽어 봐야지.
그러나 고백하건대 이야기 짓기보다 피아노 소리가 더 좋았다. 그림책에 글이 있지 않아도, 이야기가 있지 않아도 이대로 충분하다 생각이 들 만큼. 며칠 전, 봄비다운 봄비가 내렸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도 알록달록 우산꽃이 피었다. 모았다 퍼지기를 반복하는 우산꽃들의 행렬은 횡단보도 건너편 학교 앞까지 이어졌다.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대로 충분히 좋네, 싶더라.
[<노란우산> 이 책은요]류재수 선생님이 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창 밖으로 비오는 것을 구경하다가 아이들이 우산쓰고 등교하는 모습이 재밌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구상하게 된 것이라고 해요. 13장의 그림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한 <노란 우산>. 이 그림책 시디는 모두 13개의 피아노곡과 마무리하는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직 피아노 소리로만 끌고가는 밝고 경쾌한 소리부터 묵직한 터치까지, 세상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비 오는 풍경 그 자체랄까요. 비오는 날엔 꼭 틀어놓고 싶은 피아노 소리입니다. 2001년 재미마주 출판사(내가 읽은 건 이때 나온 책이다)에서 처음 출간한 이후 2002년 '뉴욕타임스 올해의 우수 그림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대요. 이후 2007년 보림 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됐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