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 연출의 <대대손손>이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중이다. 이 작품은 일제시대에서 현재까지 조씨 가문의 가족사를 토대로 현대사의 그림자를 심각한 표정과 쓴 소리 대신 웃음으로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연극은 박근형이 창조한 재치 있는 대사와 살아 있는 캐릭터, 역설적인 상황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야기는 우화적이다. 현재의 우리를 상징하는 '일대'는 아버지와 단절한 채 연극을 하고 있고 '일대'의 아버지는 군인 출신으로 수시로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베트남에 두고 온 여인이 있으며, 할아버지는 일본 게이샤와 결혼해 아버지를 낳았고, 게이샤는 미군과 달아났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일본인에게 부인을 바쳐가며 일본인의 종처럼 살았다.
이 이야기는 조각처럼 흩어져 있어서 관객은 시공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이야기의 조각을 퍼즐 맞추기 하듯 하나씩 맞추어 나가게 된다. 그러면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얻게 된다.
4월 23일, <대대손손>이 공연되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박근형 연출과 만나 인터뷰 했다.
- <대대손손>을 구상하게 된 이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몇 대에 걸친 이야기, 소설로 많이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이 나던, 전염병이 돌던 뭐하던. 그런데 나중에 지나 보면 한 사람이 사는 게 역사와 전혀 관계없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역사 속에 살아온 게 되더라.
무슨 역사적인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내 아버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줄줄이 이어와 지금은 어떻게 됐나. 그런 생각에서 시작됐다.
어렸을 때 어머님이 그러시더라.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돈이 좀 있었는데 친구랑 인쇄소를 하게됐고 그 친구 때문에 망했다고. 그래서 그렇구나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해지는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 집도 뭐가 있었는데 외삼촌이 노름해서 망했다.' 어떤 아줌마도 '땅이 꽤 있었는데 무슨 계를 들었는데 계주가 곗돈을 가지고 도망가서 대신 물어줬다.' 이런다. 생각해보니까 다 피해자들이다. 그러면 남을 망하게 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다 있다. 역사라는 것도, 우리 사는 것도 내 가족과 자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지만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하고 남에게 상처 주기도 한다.
이 나라가 90년대 중반, 말까지 내가 생각하기에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점점 좋아지고 있다. 그것은 모두 피해 당하고 어떤 특정 악인 몇 사람이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게 그런 것이다. 우리 선대나 윗사람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우리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동조했다. 내 안에 피해자적인 측면도 있지만 내 안이라는 것은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말한다. 내 안에 남을 해코지하고 이 나라 역사를 망치게 한 원인도 있다."
- 조씨 가문의 가족사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조씨가 성에 쓰이는 조나라 조(趙,曺)씨가 아니라 조상 할 때 조(祖)씨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시대가 일대가 됐다. 내 후손이 있고 자식들이 커 나가가 시간이 흐르면 2대와 3대가 될 것이다. 과거 부끄러운 것도 있고, 잘 된 것도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옛날 살았던 것, 부끄러운 일을 알고 우리부터라도 촛불 들고 이 광야를 걸어가면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가야할 길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저는 그래서 그 아이가 연극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꼭 연극이 아니어도 된다. 일대라는 사람이 연극을 하는데 연극이 아니어도 다른 어떤 것이어도 괜찮다."
-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화해를 시도하는 장면 같아 보였다. 조상들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수긍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마지막 장면에 대해 설명해 달라.
"수긍하기 보다 저는 이 땅에 살고, 우리들은 이 땅에 살고 있다. 내 아버지가 일본사람이던 내 할아버지가 중국사람이던 여기 지금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고 있는 이상 이 땅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렇다고 국수주의나 배타적인 생각을 갖자 이것은 아니다.
화해라기보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부끄럽고 어떨 때는 창피하지만 과거를 알자 이거죠. 내 아버지 할아버지 이야기들을. 물론 우리들도 부끄러운 일들이 많지요. 그 일이 내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이 어떤 잣대로 부끄러운 부모를 볼지는 몰라도 무조건 단죄하거나 단절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알자 이거다. 어찌됐던 그들로부터 인해서 태어났으니까."
- 극 구성이 시간 순서가 아니라 퍼즐 맞추기 하듯 조각조각 떨어져 섞여있다.
"이 작품이 맨 처음 워크숍으로 공연될 때, 공연 몇 일 전까지 시간 순서대로 했는데 일단 밋밋하고 재미가 없었다. 관객한테 궁금증도 없었고. 재미있으면서도 궁금증을 유발해서 궁극적으로 끝 부분에 가서 조상들이 다 나왔을 때, 아~ 저 사람이 저 사람의 아들이고, 아들이고, 아들이구나 이렇게 되는구나. 알게 하고 싶었다. 이것은 연극을 보는 입장에서 까다로울 수 있는데 약간 뒤죽박죽이 되어야 연극적일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 찬란한 5,000년의 역사, 삼천리 금수강산 이러한 화려한 수사 뒤의 그림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다. 이 점은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면도 있다. 반성에 대한 의미도 있다.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은 몇 년 전에 어떤 나라를 간 적이 있었다. 떠돌아다니면서 다녔는데 우리 나라처럼 돈 없으면서 돈 잘 쓰고, 폼 잡는 사람이 없더라. 외국 사람들이 옷 잘 입고 부자로 살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몇몇 사람 말고는 기본적으로 검소하더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처럼 그렇게 꼼꼼하지도 못하고, 중국 사람이나 베트남 사람들처럼 근면하지도 않다. 이건 전체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많은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물론 저도 한국사람이지만 대게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다. 이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거기서 아프리카 외교관 어떤 사람을 만났다. 제가 물어봤다.
'당신 북한 사람 만나봤느냐?'
'만나 봤다'
'어떠냐?'
'그 사람들 대게 순수하고 정직하다'
'남한 사람은 어떠냐?'
'남한 사람은 좀 문제가 많다.'
물론 그 아프리카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또 그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공감한다. 나부터도 그렇고 우린 좀 문제가 많다."
- 여인 수난사 같다. 부인을 일본인한테 바치기도 하고, 부인을 미국인에게 뺏기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가 한, 미, 일 삼국의 역학관계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의 우리 나라 주변을 둘러싼 강대국의 역학, 이런 것은 아니다. 일본사람에게 부인을 바친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부인을 남한테 바치겠는가. 아주 정신 이상한 사람이다. 상징적으로 일제 시대 때 삶이 대체적으로 그랬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징일 뿐이다."
- 작품을 직접 쓰고 연출까지 했다. 이 작품의 장점 중 하나가 살아 있는 캐릭터이다. 인물을 구성할 때, 성격 설정은 어떻게 하는가?
"이 작품도 그렇고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반 정도는 내가하고 나머지 반은 배우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점에서 얻는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어떤 배우들, 이 역할을 하는 배우의 실제 성격이나 장점 같은 것을 많이 인정한다. 그러니까 반쯤은 제가 만든 것이고 나머지 반은 이 작품을 초연할 때 참여했던 배우들의 성격이 많이 묻어나 있다. 그러면서 이번 공연 같은 경우는 지금 참여하는 배우들 본인들의 많은 역할 창조가 있었다."
- 대사가 사실적이다. 대사는 주변의 경험에서 참조하는가?
"그런 것도 있고. 헨델 얘기는 헨델의 일화에서 참고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제가 그런 말했으면 좋겠다해서 수시로 말을 넣기도 하고 또 배우분들이 '여기서 이 대사가 어때요.' 그래서 그런 대사가 들어가기도 한다. 제가 워낙 문학적 깊이나 소양이 없기 때문에 생생한 말을 많이 쓴다. 이 점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 문제가 될 때도 있다."
- 박근형표 연극하면 뚱뚱한 여인이 아이콘처럼 등장한다. 이 연극에서도 고수희씨가 노란색 의자를 들고 연기를 펼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어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제가 어느 날 고수희씨를 알았는데 연기를 잘하더라. 그래서 고수희씨랑 작업을 같이 하게됐다. 그러니까 작품에 뚱뚱한 여자가 나오는 거다. 거기에 고수희씨가 아닐 때는 공교롭게도 체격이 있는, 뚱뚱한 다른 배우랑 하게 되어 그런 거다.
고수희씨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다. 정말 연기를 잘한다. 잘하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꾸 부탁을 한다. 다음에 뭐 하는데 같이 하자. 그러다보니 뚱뚱한 여자가 나오게 된 거다."
-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다가 중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가장 중점을 썼던 부분이 무대일텐데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가?
"우선 소극장이나 지금 공연장이나 문을 활용을 하자 생각을 했다. 문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시대를 넘나드는 문이기도 하고. 창호지 문이 가지고 있는 향수도 있다. 또 무대 상에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다양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쓰인다.
문이라는 기본 컨셉은 똑같다. 소극장에서는 작은 공간이어서 무대가 작고 협소했지만 수시로 전환이 빨라 질 수 있었는데 중극장에서 하다보니까 외형상 웅장하고 멋지긴 한데 실용적인 면에 있어서 문 자체가 무거워 무대 전환이라던가 이런 것은 애초에 생각했던 것 보다 느려지는 부분도 있고 속도감이 오히려 소극장 못지 않게 빨라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다. 그건 아마 역량 같다. 중극장에서도 좀 더 효율적이고 빠른 전환을 통해서 시간의 변화, 장소의 변화가 싹싹 바뀌어야 되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 5월 4일 공연이 끝난다. 이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그 이후에는 중국집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을 준비중이다. 중국집 주방장, 사장, 배달부, 카운터 이런 사람들이 중국집 안에서 생활하면서 도박하고, 그 사이에 인간적인 관계가 있는 작품이다. 원작은 영국사람이 쓰고 성수정이라는 분이 번역을 하고, 제가 번안 한 <딜러스 초이스>라는 연극이다. 원래 배경은 중국집이 아니다. 바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바에서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번안해서 중국집에서 일어나는 얘기로 바꾸려고 한다."
-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딜러스 초이스> 공연 때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