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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떤 모임에서 노년기의 성(性)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50세가 넘으신 한 분은 영화 〈죽어도 좋아〉를 보면서 마치 부모님의 잠자리를 훔쳐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옆에 있던 30대의 한 사회복지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섹스를 하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이야기했다. 내 생각은 자연스레 49년째 함께 살고 계신 올해 81세, 76세의 친정 부모님 생각으로 이어졌다.
아내를 잃은 지 20년 된 동두천 신사 박동만 할아버지는 오래 전 단골로 다니던 신림동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를 잊지 못해, 국밥집을 그만 둔 할머니네 건넌방에 억지로 세를 들어 눌러 앉는다. 능청스러운 할아버지와 새침한 할머니의 만남은 티격태격하며 시작되지만, 어느 새 봄에 싹이 돋아나듯 사랑의 얼굴을 뾰족이 내민다.
65세 할머니와 63세 할아버지의 사랑은 한 여름 더위 속 한 이불 안에서도 달콤하기만 하다. 이들은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는 어쩔 줄 몰라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떨어져 살 수 없다. 할아버지의 두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할머니의 세 딸은 자기들 사느라 바빠 들여다 볼 틈이 없다.
약한 몸으로 할아버지 입을 스웨터를 짜느라 바쁜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기도 하지만, 깎은 감 접시에 선물로 주려고 반지를 숨겨놓을 줄도 아는 낭만적인 분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 없는 빈 집 빈 마당에서 커플링을 하나 씩 나눠 끼고 결혼 선서를 하는 두 분의 모습은 너무도 쓸쓸하고 애달프다.
자동차를 직접 몰고 신혼 여행을 가려고 운전 면허 시험에 도전하는 할아버지는 씩씩하지만, 할머니의 약한 몸이 기다려 줄 것 같지 않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정전됐을 때 쓸 양초는 어디에 있는지, 전기요금과 수도요금 제 날짜에 밀리지 말고 내라는 잔소리는 이미 떠날 날을 아는 할머니의 마음 속에서 저절로 흘러 나와 할아버지 귀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어 놓는다.
다시 혼자 남은 겨울. 할아버지가 어렵게 딴 운전 면허증이 오히려 허망하고, 차가운 마루에 맥없이 누워 "임자가 보고 싶어서 정말로 못 살겠네…" 하는 할아버지의 혼잣소리에 객석에 앉은 우리 모두는 함께 울고 만다. 할머니가 다 못 짜고 두고 간 스웨터는 할머니의 막내딸 손으로 완성돼 도착하고 할아버지의 등은 그 스웨터와 '아버지'라 부르는 그 딸의 편지에 이제야 조금 따뜻해진다.
연극은 시작부터 내내 웃음을 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이 알콩달콩, 아기자기해서 저절로 웃음이 난다. 그런데 웃으면서 우리들은 하나 둘씩 울기 시작한다.
노년의 사랑이 아름답고 따뜻하면서도 슬픈 까닭은, 두 사람만 외따로 떨어져 섬에 살고 있는 것처럼 주위에 잘 섞여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랑'이라고 했던가. 세상에서 절대 숨기지 못하는 것은 사랑과 기침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사랑은 없다는 생각이 이미 자리잡고 있어 그들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랑은 그래서 슬프다.
노년의 사랑이 슬픈 또 하나의 까닭은, 사랑의 날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만나서 사랑하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시간들을 꿈꾸며 계획하는 사랑의 시간이 그 분들께는 너무 조금 남아있다. 시간의 길이보다는 그 사랑의 깊이를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훨씬 적게 남은 그들의 생에서 사랑은 달콤한 만큼 너무 절실하고 아쉬워 아프고 애절하다.
노년의 사랑이 슬픈 까닭 또 한 가지는, 결국 또 다시 혼자 남게 된다는 것이다. 한 날 한 시에 가고 싶은 꿈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꿈일 뿐, 우리는 결국 혼자 그 길을 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노년에 시작한 사랑은 이전의 헤어짐과 상실의 아픔을 겪어낸 만남이기에 폭이 넓고 깊지만, 그 아픔을 또 다시 겪어야만 하는 분명한 사실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참 슬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을 거쳐 이어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는 인생의 사계절을 들여다보게 하며, 부모님들의 사랑과 우리들 노년의 모습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즐거운 웃음 속에 눈물을 버무려 넣은 솜씨가 뛰어나, 늙은 몸을 서로 나누는 노년의 사랑을 엿본 것 같은 민망함과는 거리가 멀다.
돌아오는 밤길, 아직도 서로 애틋하게 여기며 살아가시는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했고, 12년 째를 기록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노년을 같이 보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서로를 받아들이고 나누는 사랑의 감정도 오래도록 깊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생겨났다. 이렇게 노년은 그들의 사랑을 통해서 또 다시 오늘의 내 자리를, 그리고 우리들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늙은 부부 이야기 / 위성신·오영민 작, 위성신 연출, 출연 손종학·김담희 / ∼ 6. 1 / 아리랑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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