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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화창하다 못해 여름날까지 상기시키는 하루였다.
푸른 신록에서는 온기가 뿜어지고, 그 온기가 외출 나온 이들의 기분을 상쾌하고 즐겁게 만드는 마술이라도 부리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그런 맘으로 지인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독서마당'이라고 설치된 쉼터를 서성이다 낡고 빛바랜 표지의 <전태일 평전>을 발견했다.
91년 1월에 발행된 개정판이라면 83년 '어느 청년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이후 처음으로 <전태일 평전>이라 제목을 바꾸고, '조정래'라는 저자까지 밝힌 첫 책인 셈이다. 그게 어쨌는데 하고 궁금해할 분들이 계실지 모르니 말씀을 드리자면, 1970년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이후 전태일이란 이름은 금기시 되었으며, 그렇기에 저자도 이름을 드러낼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러다 당당히 '전태일'이라고, '조영래'라고 이름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한국사회가 진일보한 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일보를 일궈낸 것은 다름 아닌 '전태일'과 '조영래'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이름의 '전태일'과 '조영래' 덕분이었을 것이다.
청년 전태일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어머니 이소선씨와 그 뒤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청년들이 담긴 표지의 그 책은 바로 그런 책이었다.
뭣 모르던 대학 새내기 시절 우연히 서점에서 처음 접한 이후로, 그 진한 감동을 혼자 누릴수만은 없어 두고두고 책을 추천하고, 선물도 하고 그랬다. 그러면서 군대에 다녀오고, 복학한지도 꽤 되는 요즘까지 한편으론 참 오래 잊고 지낸 책이기도 한 것 같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던 그의 죽음은 '인간선언'의 불꽃이었고, 이 땅에서 독재를 무너뜨리고, 노동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밑거름이었다. 그러나 그 '인간선언'은 실현되었나. 우리는 올해 또 한 명의 노동자를 전태일처럼 보내야 했고, 한국에는 아직 전태일이 아끼던 어린 시다들처럼 핍박받는 노동자들이 수없이 많다. 분명 진일보하긴 했지만, 여전히 '미완'이다.
낯선 곳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친 책은 무엇보다 나태해지고 방만해진 나의 요즘에 경종을 울렸다. 며칠 전 친구에게 값으로만 따져도 둘째가는 비싼 술을 마셨다는 자랑이나 해댔던 자신이 하릴없이 부끄러워졌다.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이 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길이 여러 가지로 있을 수야 있겠지만은, 본디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일진대..... 생활을 바짝 조일 필요를 느끼고, 내 삶에 대해 최소한 이건 아닌데, 하며 살아서는 안되겠다. 그 고마운 책을 꼭 갖고 싶었지만, 시민들의 독서를 위해 배치해놓은 것이기도 하거니와, 후에 이 자리에 앉아 나와 비슷한 다짐을 하게 될 누군가를 위해 조심스레 제자리에 꽂아 두어야 했다.
"당신이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사는 어떤 인종, 계층, 신조, 사상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태일은 반드시 당신에게로 가서 당신의 심장을 두들기며 '내죽음을 헛되이 하지말라!' 고 소리칠 것이다"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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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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