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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프에서 흘러나오는 행진곡을 들으며 학교를 빠져나갔다. (*1)'깽번'을 조심조심 엄마 손을 잡고 건너는 1~2학년 아이들과 그래도 컸다고 징검다리를 혼자서 건너는 3~4학년 아이들, 물에 첨벙첨벙 물장구치며 제멋대로 건너는 5~6학년 학생들로 제각각이다.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을 인솔하느라 호루라기 불고 고함치느라 정신없다. 물을 건너고 나서는 아직 무논이 아니라 논둑 길을 따라 걸으므로 푹신푹신한 맛을 느낄 수 있어 발걸음이 빨라진다.
잠시 후 땅을 갈아 두둑을 친 밭에 고추를 직접 파종한 밭 근처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밭가에 오이며 동부, 옥수수를 심어놓았기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밭주인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 있다. 선생님 두 분이 밭가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손으로 막고 있다. 무사히 밭둑을 통과했다.
산으로 접어들어 송단목장 초지(草地)를 지나 한 마장 더 기어오르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부모님 포함 300여 명의 긴 행렬이 밭길을 올라 산비탈로 접어드는 풍경은 한가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먼발치서 지켜보는 농부의 눈에도 확연히 들어왔다.
백아산 아래 모인 북면동국민학교 7학급 어린이들
한숨 돌리고 나서 채 1시간 가지 않으니 앞 행렬이 멈춰 선다. 이곳이 백아산 마당바위가 어렴풋이 보이는 중턱쯤 되는 곳이다. 느티나무 귀목( 木)이 다섯 그루 있어 그늘이 적당해서 쉬기 좋고 조그만 샘물이 하나 있어 목 축이기에도 좋으며 평평해서 놀기에 썩 좋은 곳으로 300명은 족히 놀 수 있는 공간적, 시각적으로 괜찮은 곳에 터를 잡았다.
'북면동국민학교'는 3~40명이 한 반이자 한 학년이다. 1학년만 2반이었다. 그러니 총 7반에 담임선생 일곱 분과 교감·교장 선생님에 소사 아저씨 한 분이신데 소사아저씨는 학교에 남아 계셨다.
각 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이윽고 말씀이 있었다.
"어린이 여러분, 여기는 뱀이 많으니까 풀숲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알겠어요?"
"예~"
"그리고 혼자서는 절대 멀리 가서는 안됩니다. 숲이 꽉 들어차서 길을 잃기 쉽습니다. 알겠습니까?"
"예~"
"조금 있다가 점심을 먹고 보물찾기를 할겁니다. 그 다음에 장기자랑을 할 거예요…."
"선생님, 노래 불러도 되죠?"라고 병섭이가 말했다.
"그럼, 노래 잘 부르면 공책도 준단다. 그럼 모두 어머니께 가서 점심 맛있게들 먹고 오니라"
"예!"
아래서 올려다보고 있는 내 눈에 비친 키 큰 고용석 선생님의 목울대는 대단히 크고 퍽 잘도 움직여 마냥 신기했다.
제일 즐거운 점심 시간에 엄마가 만들어 오신 '반달떡'
70년대 중후반의 일이니 빨치산의 고장 백아산 골짜기 중 상(上) 꼴짝인 송단리, 강례리, 평지리, 방리 등 소위 '골안7동'은 다들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욋돈 마련을 위해 새벽에 한 번 산에 가서 고사리를 꺾어 삶아서 널어두고 오신 분, 보리밭에 깜부기를 제거하시다 오신 분, 못자리 (*2)'피사리'를 하고서 달음박질로 참여한 분들이 많았다.
엄마가 따라오지 않은 어린이들은 위에 언니 오빠와 형 동생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다. 그 아이들에게 엄마들은 사탕 한 봉지를 사서 공평하게 예닐곱 개씩을 주머니에 넣어주고, 삶은 달걀 세 개씩을 싸주신다. 집에서 먹어 보지 못한 걸 따로 챙겨주시니 다수 아이들은 점심 먹는 재미에 빠져 소풍이 즐겁기만 했다. 아침 출발할 때 100원 안 준다고 생떼를 썼던 것만 빼고 보면 말이다.
우리는 5학년이던 위에 형과 나 그리고 학교 소풍까지 따라온 여동생이 한데 모였다. 보자기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동부 콩과 팥을 넣어 지은 쌀밥이 보리가 섞였는데도 제법 윤기가 돌았다. 새로 담근 김치에 싱건지 우려 무친 시큼한 채에 취나물, 갈치 말린 걸 고추장을 발라 구운 것, 가중나무(실제로는 참중나무입니다. 가중나무는 노린내가 많이나서 먹기 힘겹습니다.) 잎을 말려 김 가루처럼 볶은 반찬까지니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바쁜 중에도 어머니께서 짬짬이 해두신 거였다.
소풍 때마다 만들어 주신 음식 중 으뜸은 단연 '반달떡'이다. 달떡도 아닌 반달떡! 반달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모양은 초승달과 반달의 중간인 (*3)'부꾸미'와 닮아 날렵하다.
반달떡을 만드시려고 어머니는 몇 줌 안 되는 쌀을 몇 날 며칠이고 절약해서 꼭꼭 숨겨두셨다. 소풍 하루 전날 쌀을 담가 불리고 팥을 삶아 고물을 만들었다. 들일하고 오시는 길에 뜯어온 쑥서너 줌을 확독에 넣고 푹푹 찧어 물을 짜서 쑥물들인 떡 절반, 그냥 흰쌀로 반죽한 떡 절반을 준비하시고는 보기 좋게 모양을 만들어 설탕 친 팥고물을 안에 넣고 시루에 찐다.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발라 먹음직스럽고 쫀득쫀득하게 준비해 오셨다.
반달떡은 한 입에 들어가는 길쭉한 것이지만 나는 절대 한 번에 오물오물 씹어 삼키지 않았다. 떡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좋아하는 반달떡! 어머니의 정성으로 빚은 반달떡을 두 번 나눠 베먹으면 달작지근한 팥고물에 쑥물 든 반달떡, 흰 반달떡이 어울려 조화로웠고 당신의 자식 사랑을 오래 음미할 수 있었다.(왜 어머니는 소풍 때 반달떡을 만들어주셨을까? 어머니는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몇 해만 더 사셨어도 그걸 배워뒀으면 해강이 솔강이 소풍 가는 날 만들어 주련만….)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싱그러운 그늘 아래서 먹는 밥은 어떤 걸 먹어도 맛있던 시절인데 대여섯 가지 반찬에 밥을 먹으니 여러 번 씹을 필요도 없이 잘도 넘어간다. 거기에 떡까지 먹었으니 든든하다.
보물찾기와 장기자랑
소풍 장소 한켠에는 선생님들과 학부형들이 준비해온 갖가지 진수성찬에 반주를 한 잔씩 곁들이고 계신다. 자리를 틀고 앉아 있을 틈도 없어 떡을 몇 개 들고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주섬주섬 밥을 먹은 아이들은 벌써 주위 숲으로 들어가 '보물찾기'를 하러 간다. 마음이 급해졌다.
꾀 있고 눈썰미 있는 아이들은 밥 먹는 건 뒷전이고 선생님 뒤를 살금살금 밟아 보물 숨겨둔 곳을 파악해두고 후딱 밥을 때질러 버리고 모른 체 한 줄도 모르고 그제서야 나서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종이 쪽지 하나 찾으려고 주위 산을 '이 잡듯이 뒤졌다.' 나무 위, 바위틈과 아래, 풀 숲 등 사람 손길이 미칠 수 있는 곳이면 헤집고 뒤지고 파 본다. 깨금발을 들어 나무 가랑이 사이를 넘겨다보지만 헛수고다.(여태껏 나는 보물을 찾아 본 적이 없다. 그 잔꾀 많은 아이들 틈에 내가 살아 남을 턱은 없었던 게 정상이지 않은가?)
학년 별로 대표 두 명씩 뽑혔다. 동요에 학교에서 배웠던 노래를 한 곡조씩 부른다. 선생님도 재미난 얘기와 노래를 부르셨다. 두 시간 여 장기자랑이 이어졌다. 어제 밤까지 그렇게 용기를 내어 이번 소풍 때는 반드시 노래를 불러 1등을 하겠다는 다짐은 어디 갔는지 부끄러움이 앞서 나서지 못했으므로 구경꾼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장기자랑이 끝나고 '보물찾기' 시상까지 했다. 나에겐 아무 상도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그날은 선생님들의 배려로 지우개 달린 연필 한 자루 타서왔다. 학년 별로 사진 촬영을 마치고 차차 서늘한 기운이 감돌 무렵 주위 청소를 하고 산을 내려왔다. 해가 기울기 전에 학교까지 도착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내려오는 길은 통제 불능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산아래 송단리에 사는 아이들은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고 이를 본 다른 마을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돌아갔다. 몇 몇 어머니들과 선생님들은 학교에 가서 장구 치고 춤추며 즐거운 한 때를 즐겼으리라.
<글쓴이 주>
(*1)'깽번'; 냇가의 전라도 사투리. '툼벙'은 연못입니다.
(*2)'피사리'; 못자리에서 벼가 아닌 피를 골라 뽑아내는 일. 평소 잘 보이지 않던 피도 아침 저녁 해를 등지고 바라보면 쉽게 찾아 뽑을 수 있었다.
(*3)'부꾸미'; 쌀을 거칠게 찧어 안에 흰 팥고물을 넣고 봉하여 기름에 튀긴 떡으로 제사 때나 백중 때 주로 먹던 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