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씨는 71년 극작가로 데뷔한 후 30년이 넘도록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매년 신작이 나오고 그 작품이 모두 무대에서 공연된 우리 나라의 대표 극작가이다. 또 생존 극작가 중 유일하게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지난 4월 25일부터 30일까지 대학로 문예회관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이강백씨가 쓴 <진땀흘리기>가 중견 연출가 채윤일씨의 연출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작년 11월에 채윤일씨 연출로 초연되었고 그 해 연극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연극에 선정되었다. 올해는 '채윤일 연극시리즈'의 한편으로 재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당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강요받았던 경종을 통해 이 사회가 선명성을 이유로 자신의 주장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공연이 한창이었던 4월 26일 문예회관 예술극장 로비에서 이강백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어 희곡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 희곡을 쓰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그 전부터 시, 소설, 희곡 장르를 가리지 않고 습작을 쭉 해왔다.
그 당시 펜클럽에서 문학강좌를 했었다. 시, 소설, 희곡을 들었던 수강생들이 모여서 4월 4일날 44명이 모여 '4ㆍ4회'라는 문학서클을 만들었다. 그때 '4ㆍ4회' 맴버 중에 연극을 좋아하는 또 작은 그룹이 생겼다. 나중엔 열너댓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때 참 연극을 많이 보러 다녔다.
그 당시 우리 연극이 사실주의에 고착되어 있었다. 현실을 무대에 그대로 올리는 것이 물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그대로를 무대에서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다. 또 내 개인적으로는 '연극이란 전혀 현실과는 다른 장르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처음에는 시를 쓰려고 공부를 했는데 어떻게 신춘문예에 낸 희곡이 당선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연극을 많이 보러 다녔다. 어렸을 적에 구경을 참 좋아했다. 내가 초등학교 어느 달인가 계산을 해보니까 한 달 중에 25일을 연극이나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때는 의무교육이라고 할지라도 월사금이라고 매달 학교에 돈을 냈다. 영화나 연극을 보러 다니느라고 그것을 집에서 타 쓰고 학교에 내지 않는 바람에 야단을 맞았다. 그때 대체 얼마를 다녔는지에 대해 자술서까지 썼다. 그 당시 연극은 '임춘앵과 그의 악단'이라든지 하는 여성극이 주였다.
시에 대한 공부가 희곡 쓰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요즘 희곡 쓰려는 후배들이나 학생들에게 시집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소설이 나오기 이전에 시극, 그러니까 <오딧세이>라든지 <일리어드>라든지 그러한 것이 시의 형태로 되어 있다. 사실 희랍극이라는 극의 전통으로 보았을 때 시와 연극은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관계이다.
'나는 지금부터 희곡을 쓰겠다' 이렇게 결심한 것은 없고,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이 모아져서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희곡으로 데뷔한 것은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참 다행으로 생각한다."
- 희곡작가가 되기까지 혹은 되고 나서 작품을 쓰는데 영향받은 부분이 있다면.
"물론 인생의 영향이란 것이 전폭적으로 한 사람, 한 권의 책, 하나의 사상 이런 데서 순도 백프로의 영향력을 받을 수는 없다. 모자이크처럼 수백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퍼즐게임처럼 어떤 부분은 자신의 영향을 받는 부분도 있다.
일단 책을 꼽는다고 한다면 <아라비안나이트>, <복카치오>, <캔터베리 이야기>, 또 우리 설화 그런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했다. <이솝우화>도 좋아하는 책이다.
우화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솝우화>에 있는 양치기 소년은 유명한 우화이다. 들판에서 양을 치는 소년이 너무 심심해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니까 농사꾼들이 일하다 말고 들판으로 늑대를 물리치기 위해서 온다. 재미를 느낀 소년이 다음에 심심할 때 늑대다 하니까 농부들이 또 왔다. 세 번째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년이 그러자 그때는 진짜로 늑대가 나타났는데 아무도 안 왔다.
이러한 이야기에 삶의 근본적인 공식이 있다. 그 공식은 늑대, 소년, 농사꾼 이것이 다른 무엇으로 역할만 바뀔 뿐 근본적인 공식은 똑같다. 그런 것이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내 희곡은 우화적이다. 우화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또 동양과 서양을 떠나 어디든지 통용된다.
이제 한가해 지면 우화극이라고 하는 작은 단막극들을 한 50편 정도 쓰고 싶다. 그것이 극작가로서 처음 데뷔할때의 꿈이었다."
- 예술종합학교의 이영미 교수는 선생님의 작품을 놓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립'이라는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연극학자인 이영미 선생이 내가 쓴 희곡에 대해 한 연구를 흥미 있게 보았다. 한 권의 대단한 분량의 책이다. 책에서 말씀하신 것은 나에게 어떤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물으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주제는 내가 정치 사회적으로 가장 민감한 문제가 부각되었을 때 그런 작품을 쓰다가 그런 사회적인 이슈가 어느 정도 정치화되거나 사회운동화 됐을 때는 다시 내면적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품을 쓴다는 것이다.
그랬다가 이를테면 광주의 민주화운동이라든지 하는 한 이슈가 나왔을 때는 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계열의 작품'과는 또 다른 사회적인 관심을 갖은 작품을 쓴다. 그것이 주기적으로 지그재그처럼 반복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시기적으로 구분해냈다.
이영미 선생의 내 희곡에 대한 연구를 보고 '나도 내가 이렇게 쓰는 구나'하고 느꼈다. 뚜렷한 패턴으로 나타나더라. 이영미 선생의 예언대로라면 지금쯤에는 사회적인, 정치적인 주제의 작품이 나올 때다. 패턴의 모양새로 보았을 때 지금쯤 나올 때라고 예언한다. 그런면에서 <진땀흘리기>가 그런 것 같다. 흥미로운 지적이었다."
- 대부분의 극작가가 그러하듯 텍스트의 순결성을 고집하는 극작가로 알고 있다.
"텍스트의 조밀성 때문에 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게 쓸려고 노력한다. 연출가로서는 답답할 것이다.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도 싶을 것이다.
지금 연극이란 '문학적인 연극'과 '공연적인 연극'이 대립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는 '공연적인 연극'이 승리하고 있는 단계이다. 시대적 추세랄까. 연극 사조의 흐름으로 보면 지금은 언어중심의 정신적인 로고스적인 연극은 쇠퇴하고 있다. 요즘 연극엔 다른 비언어적인 요소들이 참 많다. 이젠 연극의 언어가 퍼포먼스로 바뀌고 있다. 이러니까 나의 언어 중심적 희곡은 답답할 것이다. 연출가들은 이것을 손 데려고 어떻게 좀 부셔서 재조립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 갈등이 있다.
내 태도는 작가는 자기 희곡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일부에서는 그물망을 느슨하게 짜서 연출가들과 배우들이 재생산 확대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역할이고 나로서는 아주 완벽한 희곡을 써야한다. 그러다보니 답답할 것이다."
- 30여 작품을 썼는데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놀랍게도 아직 애착이 없다고 해야 정직한 대답일 것이다. 극작가는 목수와 같아서 목수가 집을 지어놓고 이 집에 살겠다고 하면 다음 집을 안 만든다. 목수는 잘 지은 집일수록 이 집에서 살고싶다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그 집을 뛰쳐나가야 다음 집을 지을 수 있다.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작품에 사로잡힐까봐 빨리 달아난다. 끝나자마자.
그래서 몇 년 전 당신이 쓴 작품 이런 작품이 있는데 이런 작품에 대해서 쓰실 때 느낌은 어떠했고 그 작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물으면 정말 까마득히 모른다. 빨리 달아나려고 작품을 해마다 썼다. 쓰자마자 달아났다. 그것도 가장 멀리.
사실 자기가 지어놓은 집 속에 드러눕고 싶고 거기에 거주하고도 싶다. 그것이 너무 강한 유혹이기 때문에 그것을 떨치려고 노력한다."
- <진땀흘리기>를 최초 구상하게 된 이유는.
"내가 재직했던 연극원이 석관동에 있는데 석관동 교사가 의릉, 그러니까 경종의 능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 나서는 일상적으로 그 능에 산책 갔다. 그 능 앞에 써있는 설명문에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것도 있고 숙종의 아들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경종실록을 도서관에서 대출 받아서 읽어보았다. 그냥 처음엔 이것을 가지고 작품 쓰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경종실록에는 경종이 대단히 무기력하고 결단력이 없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작가인 내 눈에는 재해석이 되더라.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라는 당쟁이 격화되던 시기에 임금이 결정을 안 내리려고 했던 적극적인 태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은 경종에 대한 해석은 지금 이 시대에 관한 해석과 연결되면서 마치 지금 모든 개개인이 경종이 된 것은 아닐까. 마치 흑백논리처럼 어떤 양분된 것에 어느 것이 옳으냐를 강요받는. 꼭 그 신념을 표현하는 방법이 사생결단식인 선명한 태도도 있지만 정말 회피하고 우유부단하고 침묵 속에서도 그 신념을 나타낸 것은 아닌지.
어떻게 보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다.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남을 존중해야하는 그런 속에서는 행동만이 미덕은 아니다. 그리고 신념이란 특히 어떤 명분이란 그것이 선명할수록 멋있게 보이는 대신 그만큼 비타협적인 것이기도 하다. 결국 경종은 그 문제를 가지고 고심했던 사람이다.
결국은 양쪽을 아우르다 목숨을 잃는 그런 인물로 보였다. 물론 그러한 해석은 역사학자들이 경종과 경종의 시대를 해석하는 것과는 다르다. 극작가의 상상력이니까. 결국은 역사라는 기록을 지금의 컨텍스트에 어떻게 견주어서 이 시대를 해석하는 그리고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사람들이 공감하게 하는 것이 이 희곡을 쓰게된 근본 동기이자 목표이다."
- 이 작품을 사극으로 재연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반사극'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사실 '반사극'이란 말은 채윤일 선생이 붙힌 말이다. 나도 이거 그럴 수도 있겠다. 아주 재미있는 채윤일 선생의 기지 있는 명칭이다.
나 자신도 이것이 역사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역사에서 등장인물을 가지고 왔어도 역사학자들이 봤을 때는 경종을 그렇게 해석하는데 반대할 것이다. 그래서 꼭 이것을 역사극이라 주장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이 작품을 역사라고 오해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역사극이 아니다 알려줄 필요가 있다.
사실 <용의눈물>이 텔레비전에 방영됐을 때 역사학자들은 그게 상당히 왜곡됐다고 하면서 틀린 점을 하나씩 하나씩 지적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셰익스피어가 쓴 역사극들도 가만히 보면 역사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심지어 역사가들도 사실이란 것은 무엇일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역사가들도 어떤 하나의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역사가적 관점으로 봐 달라는 이런 요구를 하지 않음으로서 쓸데없는 논쟁을 잠재운다. 극작가로서 미리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다."
- 이 작품을 채윤일 선생에게 연출을 맡긴 이유는.
"채윤일 선생과는 <불지른 남자>에서부터 해서 지금까지 네 번째다. 굉장히 코드가 맞는다. 채윤일 선생은 일단 텍스트를 존중하는 연출의 전통적인 라인에 서있다. 이해랑 선생이나 이진순 선생 때 연출을 배웠던 분들은 될 수 있는 한 텍스트를 깊이 파서 그 안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채윤일 세대 다음 세대 연출가들은 그것을 해체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70년대 데뷔한 내 세대 극작가하고는 채윤일 선생과 코드가 잘 맞는다."
- 이 작품의 성과를 꼽는다면
"일단 지난해 공연했을 때 좋은 연극 베스트7에 뽑혔다. 그것이 가시적 성과라고 한다면 관객들 가슴속에 이 작품이 남는다면 그것이 진정한 성과일 것이다."
- 이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10월에 공연이 있다. <연극배우>라는 제목에 김갑수 선생이 대표로 있는 연극세상에서 공연이 준비중이다. 메타연극이다. 연극배우란 무엇인가. 연극배우가 연기할 때 자기 자신을 잃고 몰두하는 방법이 있고 그렇게 몰두하면 안 되고 연기를 하는 나 자신을 지켜보는 내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방법이 있고 그런가하면 내가 다른 등장인물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퍼포먼스, 내가 주인공이며 내가 직접하는 것. 이런 세 가지 연극사에 나타나는 배우의 욕망을 작품 안에 담고 있다. 아마 연극하는 특히 배우들에게는 아주 관심이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