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훨씬 넘긴 시간을 무대에서 보낸 배우는 연기가 아니라 인생을 보여준다. 힘과 패기는 젊은이에 못 미치지만 젊은이가 따라올 수 없는 연륜과 경험으로 인생의 지혜를 알려준다. 이것이 무대 위 노배우의 모습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한 이유이다.
올해 연기생활 35년째를 맞는 국립극단의 대표적인 개성파 연기자 오영수씨는 독특하지만 연륜이 묻어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선굵은 외모와 절도있는 화술로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해온 그는 희극적인 인물에서부터 비극적인 인물까지 두루 소화해낸다.
63년 극단 광장에서 연기를 시작한 그는 87년 국립극단으로 옮겨 현재까지 <말괄량이 길들이기> <태평천하> <홍동지는 살아있다> <피고지고 피고지고> 등 80편여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79년 동아연극상 남자주연상, 94년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2000년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며 올해도 <집>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등에 출연해 좋은 연기를 펼쳤다.
특히 주경증 감독의 <동승>,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스님역으로 스크린에 진출,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한 연기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5월 14일 <당나귀들> 연습이 한창인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오영수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지난 4월에 개봉한 주경증 감독의 <동승>, 현재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 가을, 겨울>에 스님으로 출연했다. 어떤 계기로 스님역에 연이어 출연하게 됐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기획팀이 날 부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동승>을 먼저 했다. 그래서 그 필름을 보고 나에게 출연 의뢰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두 작품이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고, 거기에 나오는 스님 역할도 비슷하다. <동승>에서는 할아버지 같은 스님이 동승을 교화시키고 가르치는 역할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스님은 스스로 구도하는 모습으로 그게 조금 다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6월에 상영한다니까 시기적으로도 몇 달 차이 안 난다."
- 스님 역만 들어와 아쉽지는 않는가?
"영화 일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닌데 어떻게 하다보니 거의 같은 역을 동시에 하게 됐다. 모르지는 일이다, 앞으로 전혀 다른 역할이 들어 올 수도 있으니까.
일본의 <철도원> 같은 영화는 60을 넘긴 배우가 주연했다.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국도 외국처럼, 잭 니콜슨 같은 노배우들이 활약하는 그런 풍토가 우리 한국영화계에도 심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젊은 친구들만 가지고 하는 영화만 나올게 아니라 나이 많은 사람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사건을 전제로 한 영화가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 연기를 시작한 지 35년이 됐다. 어떻게 연극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
"좀 늦게 시작했다. 군대를 갔다와서 직장을 갖으려니까 쉽지 않았다. 놀고 있는 상태였다. 극단 광장에 나와 가까웠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계기로 연극을 시작하게 됐다. 물론 군대가기 전 학교 다닐 때 연극을 많이 봤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직장도 못 얻고 있는 상태에서 연극 속에 들어가서 시간 좀 보내자 생각하고 들어간 게 연극과 만남이 됐다. 들어가서 너무 깊이 빠지니까 나올 수 도 없었다. 그래서 거의 35년동안 연기를 하게 됐다. 계기는 절실하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우연히 생겼다."
- 35년의 연기 생활을 통해 개성파 연기자로 알려져 있다. 35년의 연기생활 중 가장 인상깊은 연극이나 배역이 있다면.
"지금도 후회스럽고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안 왔다. 75년도에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작품을 했다. 그때 나이가 서른 조금 넘었을 때이다. 연출이 나보고 '메피스토' 역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난 '파우스트' 역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파우스트'를 주장했다. 연출은 내게 메피스토가 맞는데 왜 자꾸만 파우스트만 주장하느냐 그랬다. 본국인 독일에서도 그 연극은 '메피스토 연극'이지 '파우스트 연극'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전해보고 싶은 도전욕이 생겼다. 그래서 파우스트를 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메피스토 연극'이고, 젊은 나이에 파우스트 연기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욕심만 있을 뿐이지. 전혀 못했다. 명동밖에 극장이 없었던 때였다. 관객이 줄을 서서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많이 왔는데 연극은 엉망이었다.
다시 <파우스트>를 할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생겨 나보고 <파우스트>의 '파우스트' 역과 '메피스토'역을 고르라고 하면 '메피스토' 역을 고를 것이다. 지금도 안될 것 같은데. 그때 욕심을 너무 부렸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 연기를 하면서 나만의 원칙이 있다면.
"연극도 참이 나오려면 연륜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가면 갈수록. 특히 연극의 연기는 연륜이 따라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영화나 텔레비전 연기와는 좀 다르다. 그것은 감각으로 체감적으로 해나 갈 수 있는 게 있지만 연극은 안 그렇다. 그러나 연륜만가지고는 안 된다. 연륜과 같이 갈 수 있는 머리도 있어야 한다."
- 연습하고 계신 <당나귀들>과 맡은 역에 대해 설명해 달라.
"<당나귀들>은 부조리 연극이다. 이 작품을 처음 대하면서 베케트도 생각해봤고 이오네스코도 생각해 봤다. 부조리의 성향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현실 풍자, 현실 비판적인 의식도 들어가 있고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도 있다. 그 점이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와는 좀 다르다.
내가 맡은 신하1은 정치하는 사람의 한 모습이다. 신하1은 상당히 이상적인 쪽의 정치가이고 신하2는 현실적인 쪽의 정치가이다. 장군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좋게 얘기하면 중용, 나쁘게 이야기하면 우유부단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의 하나의 모형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듯 하다."
- 많은 작품에 출연했을 텐데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7∼80편의 작품을 하면서 주인공도 한 5∼60편 했다. 많이 했는데 못 해본 작품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꼭 해보고 싶고, 아서 밀러가 쓴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역. 그 두역을 아직 못했다. 지금이라도 누가 기회를 준다면 서슴치 않고 아무 조건 없이 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 올해 <집>,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당나귀들>까지 바쁘게 지나왔다. 이후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가?
"극단 스케줄에 우선 맞추어야한다. 여백이 있는 시간이면 외부에서 출연의뢰가 들어오면 할 것이다. 영화도 한 두군데 이야기가 있는데 아직 구체화 된 것은 없다."
- 바쁜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나귀들> 공연의 성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