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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밥을 먹으면서 가족들에게 비로소 고양이 가족 얘기를 했다. 새끼들이 며칠 동안 계단 중간 내 책이 들어 있는 종이 상자 안에 있었음을 실토하고, 나 혼자만 살금살금 보면서 세심하게 보살폈는데도 어미들이 사람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고 내게는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고 살짝 감쪽같이 새끼들을 옮겨서 몹시 섭섭하다는 말을 했다.
"사람이 자꾸 들여다보고 새끼들을 만지고 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 때문보다도, 점점 자라는 새끼들에게 적당한 운동량이 필요해서 옮겼는지도 몰라요."
이런 아내의 말을 그럴 듯하게 여기면서도 섭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을 나가고 들어오며 계단 중간의 종이 상자를 볼 적마다 허전한 마음이었다. 혹시 다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종이 상자를 열어본 적도 있었다. 종이 상자 안은 새끼들이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도 거짓말같이 깨끗했다. 새끼들의 배설물을 어미들이 모두 먹어치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실제로 할머니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의 배설물을 먹는 것을 보았다.
이틀쯤 후 아내가 새끼 고양이들이 옥상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금이네 쪽 물탱크 옥탑 있죠. 그 옥탑 벽에 매트리스가 하나 기대어져 있는데, 벽과 매트리스 사이로 할미 고양이가 들어가는 걸 봤어요."
내가 미처 살펴보지 못한 곳이었다. 즉시 올라가서 보니 과연 옥상 한편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옥탑의 한쪽 벽에 매트리스가 기대어져 있는데, 벽과 매트리스 사이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고, 그 좁고 긴 통로 같은 공간에 새끼 고양이들이 있었다. 새끼들은 한 덩이로 뭉쳐 있을 수도 있고 운동도 할 수 있지만 어미가 젖을 주기에는 불편할 것 같았다.
나는 매트리스를 조금 끌어당겨서 매트리스 끝과 옥상의 처마 벽 사이를 조금 떼어놓고, 매트리스의 아랫도리를 옥탑 벽에서 조금 벌어지도록 해놓았다. 그리고 옥탑 벽과 처마 벽이 만나는 후미진 부분에다가 빈 화분을 몇 개 둘러놓으니 썩 좋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공간의 바닥에는 납작하고 판판한 나무토막도 하나 놓아주었다.
쟁반같이 생긴 빈 화분으로 지붕까지 만들어준 그 공간은 고양이 가족에겐 더없이 좋은 조건일 터였다.
나는 수시로 옥상에 올라가서 고양이 가족의 안온하고도 평화로운 모습을 즐기곤 했다. 너무 자주 집을 들락거리는 내게 어머니는 핀잔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나는 고양이 가족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늘 궁금했다. 어미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장면, 할머니 고양이까지 온 가족이 몸을 한 덩어리로 만들고 잠에 빠져 있는 광경, 그 아늑함과 안온함과 평화로움이 한없이 고즈넉한 풍경은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절로 흐뭇해지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내가 틈틈이 옥상을 오르는 것은 내 궁금증 때문만이 아니었다. 고양이 가족의 그 평화로운 모습을 즐기려는 뜻만이 아니었다. 나는 새끼 고양이들에게 자주 내 얼굴을 보여 주고 싶었다. 새끼들을 쉽게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때는 잡아 올려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새끼들이 일찍부터 사람의 얼굴을 익히고 사람의 손과 친숙해지도록 만들고 싶었다. 처음부터 사람과 좀더 친숙해져야 그들에게도 유리한 점이 많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다소 막연한 생각이긴 하지만….
새끼 고양이 네 마리는 각기 다른 털빛처럼 얼굴 모양도 다 달랐다. 성질도 다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트리스 밖으로 나와 햇볕을 즐기다가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피하는 동작도, 사람의 손에 잡혔을 때 지르는 소리와 몸놀림도 각기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털빛이 어미와 비슷하게 생긴 놈은 아무래도 암놈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제 어미의 어렸을 때처럼 사람을 보면 가장 예민하게 피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반면, 온 몸의 흰 털빛부터 할머니를 많이 닮은 놈은 가장 작고 약하게 보이는 모습인데도 호기심이 많아 제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 스스로 나에게로 다가오곤 한다.
나는 요즘엔 어미 고양이의 젖 생산에 도움이 될지 몰라 우유도 가끔 주곤 하는데, 우유를 줄 때는 한결 재미를 느끼곤 한다. 손가락 끝으로 우유를 묻혀서 그 흰색 새끼고양이의 입에 대주어 보았더니 젖 빨 듯이 맛있게 핥아먹는 것이었다. 다른 놈들은 얼굴을 돌리고 입을 벌리지도 않는데, 그 흰색 새끼는 내 손가락을 깨물기까지 했다. 벌써부터 녀석에게 가장 정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일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그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에서도 새끼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어미들이 다시 새끼들을 옮긴 것이었다. 그것을 처음 본 순간에는 섭섭함을 지나 노여운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그토록 신경을 써주고 심지어는 밥그릇 갖다 주었는데도 어미들이 나를 불신한다고 생각하니 괘씸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는 고양이들이 그렇게 또 한번 거처를 옮긴 것은 사람에 대한 불안감 때문보다도 주기적으로 새끼들을 옮겨 키우는 습성이나 다른 어떤 이유들이 결부된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거처를 멀리로 옮기지는 못했다. 옥탑 너머 장독대 사이에 그들은 있었다. 다음날에는 또 다른 장독대 사이에서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밤에 비가 온 것을 알고 아침에 옥상을 올라가 보니 그들이 비를 피해 다시 매트리스 공간 안으로 복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많은 비가 내려 매트리스 공간의 바닥으로도 빗물이 흐를 정도가 되니 어미들은 새끼들을 아래층 현관으로 물고 내려왔다. 처음엔 우리 집 베란다 밑으로 기어 들어갔는데 그곳은 흙이 축축하고 환경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베란다 밑의 그들을 발견하고 내가 급히 동네 슈퍼로 달려가 적당한 크기의 종이 상자를 하나 구해 가지고 와서 우리 집 현관 구석에다 옆으로 뉘어 놓아주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두꺼운 종이를 여러 장 깔아주었다.
베란다 밑에서 기어 나온 흰털 새끼를 붙잡아 그 종이상자 안에 넣어주고 집에 들어갔다가 한참 후에 나와보니 그 상자 안에 고양이 가족이 다 있었다. 옆으로 뉘어진 종이 상자는 원 바닥에 직사각형의, 그리고 손바닥만한 크기의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으로 고양이들은 밖을 볼 수 있어 좋은 것 같았다. 사람도 그 구멍을 통해 새끼들의 귀여운 모습, 고양이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을 훔쳐볼 수 있으니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고양이 가족이 우리 집 현관 구석에 거처하게 되니 이 집 저 집의 모든 사람들이 새끼 고양이들을 보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인 내 아들 녀석도 새끼 고양이들을 처음 보는 순간 너무 귀엽다며 탄성을 질렀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아내는 다음날 이웃들의 여론을 내게 전달해 주었다.
고양이 가족의 거처를 많은 사람이 알고 보게 됨으로써 갖게 될 고양이들의 불안이 문제인 것이 아니었다. 개체수가 배 이상으로 불어나 버린 고양이들을 돌보는 내 처신에 대한 이웃들의 반감이 문제인 상황이었다.
아내는 이웃들의 불평 불만을 내게 전하면서 대안 제시를 했다. 동네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라면서 고양이에게 열흘 정도만 밥을 주지 않으면 스스로 떠날 거라는 얘기를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들녀석도 "어떻게 그럴 수가?"하며 기가 막혀 했다.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고양이들이 이 동네를 떠난다는 보장이 있을까? 배고픈 고양이들의 그 모습을 내가 어떻게 보며 견딜 수 있지? 새끼들을 키우고 있는 고양이에게 어떻게 밥을 안 줄 수 있지?"
내가 한 말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지만, 사실 이런 말밖에는 더 할 말도 없었다.
지금 현재 상황으로는 이웃들의 불만을 내가 계속 무시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밤에 어미 고양이가 이상한 소리로 현관이나 계단에서 울기라도 하면 나는 바짝 긴장을 하곤 한다. 그 소리는 솔직히 나도 듣기 좋지 않다. 그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며 이웃들의 마음도 걱정해야 하니 나는 이중으로 고심을 하는 셈이다.
고양이들이 베란다 밑에다 배변을 하는 것은 걱정이지만, 화단에다 배변을 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양이들의 밥그릇이 놓여 있는 현관의 청결 문제에도 내가 신경을 많이 쓰니 그쪽으로는 별 걱정이 없지만,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고양이들을 내 주변에서 내쫓기 위해 지금까지 일년이 넘게 주어온 밥을 갑자기 주지 않을 정도로 내 마음은 모질지 못하다. 나는 이런 소소한 일에서도 인연을 생각하고 사람과 함께 동물들을 지으신 조물주의 뜻을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한다.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미의 모습, 어미의 젖을 물고 어미 품속에서 잠들어 있는 새끼들의 모습, 그것처럼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그림은, 그때처럼 행복한 시간은 또 없다고 생각한다. 그 평화와 행복을 나는 도저히 훼방하거나 망가뜨릴 수 없다. 고양이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고 느끼는 나의 평화와 소박한 행복도 소중하다고 여긴다.
할미 고양이의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할미 고양이는 자신에게는 젖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빈 젖일망정 새끼들에게 물리는 할미 고양이의 모습, 어미 고양이보다 더 자주 새끼들에게로 가고 열심히 핥아주고 놀아주기도 하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우리네 할머니들의 모습이다.
이미 어른이 되어 새끼까지 낳은 딸 고양이를 여전히 틈만 나면 핥아주는 할미 고양이의 변함 없는 모성애와 어른이 되고 새끼를 낳은 처지에서도 제 어미에게 몸을 비비고 응석을 부리는 딸 고양이의 모습은 고양이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일 것도 같다.
나는 고양이들의 그런 특이한 모습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볼 수 없다. 고양이들의 그런 모습 속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양이들을 보면서 무언가를 배우고 참고하도록 하신 조물주의 안배가 어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미고양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자주 새끼들을 훔쳐보고 만져보고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사람에 대한 친숙감을 갖게 하려는 것이지만, 그것에는 더 큰 뜻이 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사람에 대한 그 친숙감은 아무래도 나에게나 고양이들에게나 어떤 유리함을 가져다 줄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은 막연하다.
오늘 아침에 나가보니 현관 구석의 종이 상자 안이 비어 있었다. 고작 3일을 머물고, 어미들이 또 새끼들의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사람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니 아무래도 불안하고 불편했을 터이지만, 고양이를 유별나게 보살피는 내게 반감을 갖는 사람들의 눈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 찾아보니 옆집 베란다 아래 자동차 타이어 옆으로 놓여져 있는 마른 연목 더미 위에 그들이 있었다. 여전히 안온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아침에 아내를 출근시켜 주면서 아내에게 새끼고양이들 있는 곳을 보여 주었다.
"아유, 귀여워!"
아내는 탄성을 질렀다.
이웃들로부터 심리적 압박을 받는 가운데서도 그런 탄성을 발하는 아내가 나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 심정으로 한마디했다.
"그래. 그게 바로 진심이고, 올바른 시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