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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결국 비류, 온조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모조리 포박하여 끌고 왔다. 주몽은 예주와 함께 다시 유리를 설득하려 나섰다.

"이 일은 아직 실체가 명확하지 않으니 두 왕자를 풀어주어라."

예주마저도 설득을 하고 나서니 유리는 짜증을 내며 주몽에게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이번 일은 폐하께서 처리해 주십시오. 소자로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주몽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태자 암살에 대해 두 왕자들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는 칙령을 내렸다. 신하들의 반발도 유리에 못지 않았다.

"태자께서는 폐하의 권위를 이어받고 계십니다. 태자를 해하려 했다면 이는 폐하를 해치려 함과 같사옵니다. 엄히 다스리시어 추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옵니다."

부분노의 강경한 말에 여러 신하들이 동의를 하고 나섰다. 다만 재사만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대대로께서는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신 지요."

오이가 주몽과 신하들과의 언쟁이 길어지는 것을 보다 못해 재사에게 묻자 재사는 마지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뜻은 저기 앉은 을소와 같으니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말석에 자리잡아 좀처럼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을소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후비마마의 공이 큽니다. 폐하께서는 그 때문에 모든 큰 허물을 용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두 왕자를 벌하시겠다는 것은 앞서 용서한 일조차도 부질없는 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일뿐입니다. 고구려는 이제 뻗어나가는 나라, 이를 용서하시되 태자께서 왕위를 이어 받으시게 되면 큰 환란이 닥칠지도 모르니 자신들이 갈 길로 가게 하십시오."

"아니 될 말이오! 그들을 나라 밖으로 내몬다면 후에 필시 이 나라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오! 또한 그러한 선례를 남겨선 아니 되오!"

마리의 말에 신하들은 두 의견으로 나뉘어 크게 언쟁을 벌였다. 주몽은 손으로 탁자를 두드려 신하들의 말을 막은 뒤 결론을 내렸다.

"부여를 떠난 지 이십여년, 짐은 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 부여를 원망하여 스스로 그곳을 떠나 이 나라를 세웠소. 때문에 난 두 왕자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소."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해서, 두 왕자와 후비에게 이 나라를 떠날 수 있는 여지를 주려하오. 또한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백성들도 따를 수 있도록 길을 열겠소."

"아니 되옵니다 폐하!"

재사와 을소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하들이 격렬히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주몽은 그대로 시행하라는 말만을 남길 뿐이었다.

비류와 온조가 주축이 되어 오간, 마려, 월군녀까지 낀 수백의 무리가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발을 돌린 건 주몽이 고구려왕으로 즉위한지 19년 9월의 일이었다. 월군녀는 하염없이 흐느끼며 수레에 몸을 실었다. 그의 울음은 서러워서가 아닌 지나간 시간의 허망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유리는 멀리서 이 광경을 노려 보고 있었다. 구추와 도조가 다가와 유리에게 청했다.

"바라옵건대 저들을 이대로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기에는 태자마마에게 저지른 무례와 죽은 옥지의 한을 풀기에 부족합니다. 저희들에게 병사를 주시면 저들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유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채비를 갖추도록 명했다.

"여기서는 다른 이의 이목이 있으니 미리 앞질러 가 있다가 우리 경계를 벗어난 곳에서 습격하라."

구추와 옥지는 갑옷과 투구를 갖춘 채 백여기의 병사를 이끌고 서둘러 떠났다. 하지만 유리는 이들로서는 안심이 되지 않아 부분노를 불러 명했다.

"장군께서는 제 뜻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도부수들을 데리고 저들의 뒤를 몰래 따르다가 경계에 이르러 저들의 목을 베어오십시오."

부분노는 명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본래 주몽의 사람인지라 유리의 뜻이 주몽의 뜻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분노는 고민 끝에 재사를 찾아가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주몽으로서도 이는 유리의 보복이 마음에 걸려 편한 결정은 아니었다. 반나절을 고민하던 주몽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말을 달려 비류와 온조 무리의 뒤를 쫓았다. 주몽이 이들을 따라잡았을 때쯤 비류와 온조의 무리는 구추와 도조가 이끄는 병사들과 마주쳐 일촉즉발의 위기에 다다라 있었다. 주몽은 이를 급히 말리고 비류와 온조에게로 가 말했다.

"비록 너희들이 태자를 피해 내 곁을 떠난다고 해도 미움을 가지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주어라."

비류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보이며 대꾸했다.

"폐하께서 저희를 내치셨습니다.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저희로서는 어떤 바람도 원한도 없습니다."

주몽은 씁쓸하게 웃으며 활을 들어 화살을 잰 후 시위를 당겼다. 좌중이 주몽의 느닷없는 행동에 크게 긴장하기 시작했지만 주몽은 활시위를 크게 당기더니 허공으로 화살을 날렸다.

"저쪽으로 가면 어디냐."

주몽이 화살이 날아간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군가 대답하여 미르뫼 쪽이라고 대답했다.

"난 이제 태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미르뫼로 가서 저 화살이 떨어지듯이 남은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그곳에서 너희들을 위해 하늘에 매일 제사를 지낼 것이다. 멀리 남쪽의 땅도 비옥하다 들었으니 너희들은 부디 같은 무리끼리 다투는 것을 피하도록 하라."

비류는 자신들의 뒤편에 있는 수레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 월군녀가 있었지만 수레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주몽에 대한 원망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주몽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자가 보낸 병사들을 꾸짖어 보내고 뒤따르려는 장수들마저 뿌리친 채 홀로 말을 달려나갔다. 주몽은 말을 세워 멀리서 비류와 온조의 무리들을 바라보며 이십여년전 따르던 무리들을 이끌고 부여를 떠나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회한에 잠겼다. 한참이 지난 후 재사와 부분노가 주몽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병사들에게 들었나이다. 이대로 떠나시기라도 할 참입니까?"

"그렇네, 나라안에는 내가 죽었다고 이르고 장례를 치르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이 있네."

"폐하......"

재사와 부분노는 흐느꼈지만 주몽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며칠 후, 고구려에서는 국상이 선포되었다. 백성들은 큰 슬픔에 젖어 통곡을 했고 주몽의 관이 궐 밖으로 나왔다. 동시에 유리는 천자가 되어 주몽에 이어 고구려를 이어 나갔다. 이런 일들을 뒤로하며 그 즈음 주몽은 미르뫼에서 밭을 일구며 땀을 훔치고 있었다.

"아, 당신이구려."

멀리서 예주가 주몽을 보고 기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몽은 예주를 얼싸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고구려를 일으켜 세웠지만 당신 하나를 얻은 것만 못하오. 이젠 부디 내 곁을 떠나지 마시오."

둘은 그렇게 오랫동안 얼싸안으며 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후기

몇 년 뒤, 유리가 즉위한 후 바로 병을 핑계삼아 대대로의 자리를 내어놓고 낙향한 재사는 미르뫼로 부단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곧 초가집 옆에 있는 작은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술을 따라 바쳤다.

"이보시오. 재사공, 오늘도 여기 오시었소?"

재사가 돌아보니 바로 예주였다. 주몽이 병들어 죽은 후 1년, 몸이 허락할 때마다 부단히 주몽의 묘를 찾아가 인사를 하는 재사였다.

"다시 당부 드립니다. 지금이라도 폐하께 사실을 얘기하고 묘를 이장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더구나 마마께서도 이런 고생을 하시니 제 마음이 편하질 않사옵니다. 어서 궁으로 돌아가시옵소서"

예주는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난 그런 복을 누릴 팔자가 못되오. 더구나 이 무정한 사람은 다시 날 만나고 얼마 안 있어 불현듯 날 떠나버리는구려. 그렇다고 나마저 떠나서야 되겠소? 추모대왕께서 남기신 말씀을 잊어서는 아니 되오. 저쪽에 있는 화려한 묘는 흘러간 자신의 일생과 후세에 회자될 이야기들을 담아둔 것에 불과하고 여기 있는 초라한 봉분이야말로 바로 자신이라고 하지 않았소? 추모대왕의 일생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닌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유산일 뿐이고 그것에 자기 자신까지 묻히고 싶지 않다고 하셨소."

재사는 예주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달랠 수 없었다. 예주는 천자인 유리마저도 즐겨 부를 정도로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노래를 나지막하게 불러보았다.

펄펄 나는 꾀꼬리는
쌍쌍이 노니는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리

(주 : 여기서는 '황조가'를 고구려의 민요로 보며 유리왕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불렀을 따름이라는 설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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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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