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느릿느릿 박철

아빠는 내가 유치원생인줄 아나봐? 나는 초등학생이야

사십이 넘어 낳은 늦둥이가 벌써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자기 딴에도 유치원생이 아니라, 초등학생- ‘학생’이라는 단어에 엑센트를 주면서 으스댑니다. 우리 어머니는 사 남매를 두셨지요. 내 위로 누나가 하나 있고 밑으로 남동생이 둘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남매가 모두 아들만 둘씩 두어서, 아들만 여덟이고 딸은 유일하게 은빈이 하나입니다.

아내가 은빈이를 임신하게 되었을 때,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또 아들이면 어쩌나? 징그럽기도 하지. 사내만 여덟인 집에 또 사내놈을 낳으면 어떡합니까? 드디어 아이를 낳기 위해 아내를 남양에 있는 종합병원 산부인과에 입원시키고 집에 돌아와 두 아들 녀석하고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데, 초등학교 2학년짜리 큰 놈이 내게 묻더군요.

“아빠, 이번에도 엄마가 아들 나면 어떡해요?”
“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먹기나 해!”


ⓒ 느릿느릿 박철

그렇게 무덤덤하게 라면을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내가 집에 돌아 온지 30분도 채 안되어 병원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했습니다.
“김주숙 씨 보호자 되시지요?”
“네.”
“사모님이 딸 낳으셨어요.”


딸이라는 말에 우리 세 부자는 라면을 먹다가 벌떡 일어나 숟갈을 든 채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큰 아들 아딧줄이 그걸 지금도 기억하고 있더군요. 곧바로 아이들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사십이 된 아내가 수술을 하지 않고 순산했다는 것만도 감사했습니다.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나와 보여 주는데, 얼마나 작던지! 사타구니 사이를 보니 다행히 고추가 없더군요, 병원에서는 아내가 딸을 낳았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 느릿느릿 박철

남양에 종합병원 산부인과가 개원한지 며칠 안돼, 첫 출산이 ‘딸’이라고 하니 달가워하지 않을 수밖에요. 내가 산부인과 과장을 만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고 인사를 드리며, 우리 집엔 반드시 딸을 낳아야 하는 집안이라고 우리 집안의 배경에 대해 설명을 드렸더니 그제 서야 웃으면서 ‘축하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병원 생긴 이래 첫 출산이고, 아들만 여덟인 집안에 딸을 낳게 되었다며 내가 감격해 하자 그 소식이 전해져 병원 원장이 직접 축하 꽃바구니를 병실에 갖다 주고, 경사라고 하며 함께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만해도 자녀가 둘 이상인 집안은 의료보험혜택이 없었는데, 병원 측에서는 병원비를 대폭 감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은빈이가 우리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두 아들 아딧줄과 넝쿨이는 완전 찬밥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고, 은빈이는 우리 집안의 공주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건강하게 자라 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해서 엄마가 몇 번 책을 읽어주면 내용을 외우기도 하고, 다시 각색을 해서 밤에 이부자리에서 ‘속닥속닥’ 들려주곤 했습니다.

ⓒ 느릿느릿 박철

ⓒ 느릿느릿 박철

아내가 노산(老産)을 했는데 발육상태도 정상이고, 먹는 것도 아무거나 잘 먹어 유치원 졸업할 때, 반 아이 중 은빈이 키가 제일 컸습니다. 하느님이 은빈이를 우리 집 천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은빈이에 대한 특별대우는, 우리 집 식구 어느 누구도 유감이 없습니다. 그렇게 시비를 걸 수 없는 조건입니다.

학교 갈 적마다 은빈이는 자기 초등학교가 학생이라는 걸 힘주어 말합니다.
“엄마 아빠, 이러다 나 학교 늦겠어.”
“아직 시간 충분해.”
“아빠는 내가 유치원생인줄 아나봐? 나는 초등학생이야, 초등학생. 지각하면 선생님한테 혼나.”


은빈이의 심술보

아이들 마음속에는 심술보가 하나 더 들어있나 봅니다. 어젯밤 우리 집 공주 은빈이가 스프링노트에 뭘 열심히 적길래
“은빈아, 너 뭘 그렇게 열심히 쓰냐?”
“응, 예진이 한테 편지 쓰는 거야!”


ⓒ 느릿느릿 박철

은빈이는 편지를 다 쓰고 봉투를 찾더니 내일 학교에 가면 예진이 한테 편지를 전해 줄 거랍니다. 제가 해석을 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오늘 밤에 너랑 손잡고 놀았잖아. 그러고 난 후 잠자기도 좋았고, 학교에 가는 것도 좋았어. 너랑 학교에서 같이 살고 싶었는데, 너는 유치원에서도 학교에 다니면서도 가장 친한 친구였어. 안녕. 예진아. 학교에서 만나. 은빈 씀.”

내가 편지를 읽고나서 칭찬해 주었습니다.
“우리 은빈이가 참 착하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고. 친구에게 편지도 쓰고, 우리 은빈이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착한 거냐?”
“아빠 닮아서 그래. 나는 아빠가 제일 좋아!”


ⓒ 느릿느릿 박철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데 싫다 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야. 아빠는 너무 좋다. 나도 우리 은빈이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 행복한 부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은빈아. 그 편지 내일 예진이 갖다 줄 거지. 스프링노트를 찢은 거여서 아빠가 가위로 예쁘게 잘라 줄 테니 편지봉투에 넣어 내일 예진이 갖다 줘라.”하면서 가위로 스프링자국이 있는 쪽을 똑바로 잘랐습니다.
“됐지?”

그랬더니 우리 은빈이의 심술보가 터졌습니다.
“으아앙.... 아빠, 미워 미워. 나는 아빠가 미워. 누가 자르랬어. 아까 그대로 똑 같이 해 놔.”
“은빈아, 아까보다 더 보기 좋잖아.”

ⓒ 느릿느릿 박철

“싫어. 아까처럼 똑 같이 해 놔. 빨리 해 놔. 이제 아빠랑 안 잘 거야!”
“그럼 테이프로 붙여 줄까?”
“싫어.”


심술보에 울음보까지 터져서 떼를 쓰는 데 달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가위로 위아래를 싹둑 자르더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지 더 크게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풀에 지쳤는지 코를 골며 씩씩 잠이 들었습니다.

어린이 마음에 들어 있는 심술보는 일회용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심술보는 어떻습니까? 내가 알기론 일회용으로 그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싶습니다.

ⓒ 느릿느릿 박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