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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정부 당국자들은 2002 대선에서 표출된 민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개혁정치를 통한 사회정의 확립이 그것이다.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와 지금의 노 대통령이 달라졌다는 목소리가 많다. 그 자신 "나는 변해 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고 했다. 일반 정치인과 국정 책임자는 그 행위규범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후보와 대통령은 그 책임면에서도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일찍이 김구 선생이 갈파했듯이 변해도 괜찮은 부분과 변해서는 안되는 핵심을 구분해야 한다.

개혁정치를 하겠다는 초심이 바뀐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은 것은 개혁정치의 이념과 철학이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 정치란 현실인데 개혁이념을 튼튼히 세우지 못하면 현실타협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당연한 순서다.

개혁이념은 하루 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념 자체만 독립변수로 놓고 보아도 현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발전해 간다. 개별 정치인이 갖는 정치노선과 철학도 주관적 관념과 객체를 상대로 한 다양한 경험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되고 변화한다. 그래서 정치인의 경험과 연륜이 중요하다.

현대 유럽의 중간좌파적 개혁정치

올해로 프랑스 낭트대 학생운동에서 불붙은 유럽의 1968년 5월혁명이 35주년을 맞았다. 5월 달력을 뜯어낸 지 며칠이 지났지만 우리 언론들이 별로 그에 대한 특집물을 내놓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68혁명을 주도한 학생운동 지도자들과 독일 출신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내놓은 사회철학이 현대 정신사에 끼친 영향은 다방면에 걸쳐 심대하다.

68학생운동의 의미는 그 진원지였던 프랑스 경우에서 큰 맥을 이해할 수 있다. 제5공화정의 드골이 10년째 집권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정부의 관료주의 병폐, 기성세대의 권위주의, 전통과 관행이 강요되는 사회풍토, 시대착오적 교육제도 등에 대한 반감을 더 이상 삭이기 어려웠다.

더구나 드골 같은 거물의 장기집권으로 만연된 정치적 권태가 그런 갖가지 혐오감을 증폭시켰다. 낭트대에서 시작된 격렬한 학생시위는 곧바로 파리 소르본느대학에 번졌으며 경찰과 심각한 충돌사태를 빚었다.

드골 정부는 학생시위에 합세한 노동자들의 폭력이 심각해지자 의회 해산과 총선실시를 발표함으로써 사태를 종식시키는 데 성공한다.

총선 결과 드골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혁명은 실패로 기록됐다. 당시 프랑스 국민은 폭력적 시위와 다른 한편 드골의 군대동원 위협으로 불안에 떨었으며 그 결과 수구적 안정을 선택했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대중은 역사적 진보를 가로막는다는 교훈이었다.

그때의 혁명시도는 배반당했다. 그러나 그 이념과 철학이 당시 학생지도자들의 30여년 역정 끝에 꽃핀 것이 오늘의 유럽 중간좌파 노선인 셈이다. 현재 유럽연합 회원국 중 스페인과 아일랜드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주요국 정부가 중간좌파에 해당한다.

파리의 5월혁명을 주도한 다니엘 콘 밴디트는 유럽의회 의원이며 장 클로드 가이소는 조스팽 내각의 교통주택장관을 지냈다. 또 독일의 슈뢰더 총리, 피셔 외무, 라 퐁텐 재무, 트리티 환경장관 등이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들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당시 학생은 아니었지만 브라운 재무, 잭 스트로 내무, 쿡 외무, 만델슨 무역장관 등 68학생운동 출신 전현직 각료들이 정치적 동지였다.

한국 개혁이념의 뿌리 1970~80년대

유럽의 68정신은 한국의 개혁정치를 견인할 시대사조가 어떻게 형성될 것인지에 관한 중요한 시사점이다. 한국에서는 1970~80년대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이 유럽의 68혁명과 역사적으로 동질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정치사회적 상황이었다. 그만큼 치열하고 극단적인 투쟁형태로 민족-민주-민중운동이 전개된 배경이다. 단순히 민주화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사회적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운동인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김영삼 정부로 이른바 문민화를 거쳤고 김대중 정부로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루어 민주화가 진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랜 군사독재와 권위주의가 남긴 수구적 사회지배세력은 아직도 실질적으로 청산되지 못하고 곳곳에 할거하고 있다.

민주운동 진영 출신인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지만 사회지배 집단의 개혁과 교체는 요원해 보인다. 개혁정치 그룹의 조직화가 요구되는 이유다. 그 이념과 정치노선은 1970~80년대 사회변혁 운동의 정신에서 정제해내야 할 것이다.

개혁이념, 변혁과 현실정합성의 변증법

오늘날 한국정치에서 개혁이념을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틀에서 찾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기존의 이념보다는 새로운 비전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1970년대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화운동의 이념이라면 반외세 민족주의와 반독재 민주주의였다. 이어 1980년대는 특히 광주시민항쟁의 영향으로 노학연대와 민중운동이 확산됐다. 그것(민족-민주-민중운동)은 지나가 버린 과거라기보다는 이제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개혁이념으로 소화해야 할 주요 자산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개혁정치 이념은 그 내용이 진보개혁적이라 해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과격한 행동으로 연결돼서는 곤란하다. 과거 학생운동, 재야 민주화운동, 민중운동이 대변해 온 개혁이념이 이제는 일상적 시민참여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족-민주-민중운동은 투쟁과 고행과 고립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 그것을 합리적 참여와 생활화와 공론화로 발전시켜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2002년 붉은 악마와 촛불시위를 통해 성숙한 시민참여에 의한 광장운동을 이미 경험했다.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인터넷 온라인상의 공론화가 발휘하는 힘도 보았다.

개혁의 실천 방법은 언제나 국민 다수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합리성이 필수적이며 그 이념이 현실 정합성을 가져야 한다. 유럽에서 68정신이 오늘날 개혁정치 노선으로 현실화 된 것도 국민의 지지를 받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1970~80년대 사회변혁운동 정신은 이제 일상적 시민참여를 전제하는 새 시대의 개혁이념으로 정제되고 실천돼야 한다. 새 개혁이념은 사회변혁과 현실정합성 간의 변증법으로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변증법적 창조를 제대로 해낼 때 노무현 정부는 진보세력으로부터 '개혁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지 않으면서도 중도보수세력을 설득하면서 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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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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