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현충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전 현충일이라는 단어가 정말 싫어요. 군대라는 말은 더욱더 싫고."
군사상자 유가족 연대(kmid.org) 사이트 운영자 故 이상훈 이병의 아버지 이정호(54)씨는 아들을 데려간 하나님이 싫다고 합니다. 2년 7개월 전 국군 철정 병원에서 아들 상훈이를 잃어버린 후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유가족을 돕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닙니다.
"전 하나님이 싫어요. 어떤 이들은 우리 아들이 착해서 하나님이 먼저 데리고 갔다고 그러는데. 그런 말 다 필요 없으니까 우리 상훈이 보내 줘요. 하나님이 있다면 왜 우리 아들을 살려 내지 못 했나요? 저한테는 우리 상훈이가 '하나님' 이에요. 100명의 하나님보다도 전 우리 상훈이 하나 있는 게 더 좋아요."
평소에 간이 안 좋았던 이상훈 이병이 훈련을 잘 소화해 내지 못하자 군에서는 그가 꾀병을 부린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철정 국군 병원에 입원했던 이 이병은 어느 군의관의 잔학한 폭행에 의해 순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해자는 무혐의 처리되어 여전히 의사를 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군에서 재판을 받을 때 군의관의 폭행을 실제로 본 목격자의 증언이 임의로 채택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정호씨는 포기하지 않고 대법원에 사건을 계류하여 일년이 넘도록 공정한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 날 때마다 수시로 현충원을 방문한다는 이상훈 이병의 어머니 임OO(50)씨는 "그래도 현충일인데 오늘 같은 날 내가 가지 않으면 우리 상훈이가 유치원 소풍에 엄마 없이 혼자 간 애처럼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라며 어렵게 말씀을 시작합니다.
"전 군대가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우리 상훈이 안 보냈어요. 잘 몰랐을 땐 얼마나 남자가 못났으면 군대도 못 가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다리 병신을 만들어 내가 평생 먹여 살릴 걸 그랬어요.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엄연히 군대도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인데 설마 했어요. 어릴 때 상훈이 손잡고 흑석동에 있는 현충원에 종종 나들이를 갔었는데 제가 지금 이렇게 우리 아들을 보러 현충원에 가게 될 줄은…. 전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요."
대전 현충원에 이상훈 이병이 안치됐을 때만 해도 불과 묘지는 3분의 1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2년 7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묘비가 빼곡이 들어서 지금은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몇 일 전에도 장교와 사병이 소리 소문 없이 짧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대략 300명 남짓의 젊은 인재들이 1년 동안 군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예전에 비해 사고사의 비율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자살율이 45%로 치달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기록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제야 막 한참 필 나이 20, 21 세의 청년들이 그냥 막 사라지고 있어요. 이는 삼풍백화점이 일 년에 한 번씩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한 달에 한번 씩 무너지는 것과 똑 같아요. 유대인 학살로 유명한 아우슈비츠보다도 자살율이 더 높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이 무슨 전시체계도 아니고. 국가는 매년 300명의 유가족들에게 테러하고 있는 거예요."
순직으로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가족들은 비록 가슴이 아파도 그냥 안주하고 사는 게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정호씨는 생업을 제껴두고라도 그보다 더 힘든 상황에 처한 유가족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 할 예정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보고 "순직으로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무사히 안장됐으면서 왜 저리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나?" 라며 종종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순직으로 인정받았다고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무조건 순직이면 다 되는 줄 아는데 난 천지를 다 잃었어요. 날씨가 좋으면 왜 우리 아들이 없는데 날씨가 좋은지 화가 나고 비가 오면 우리 아들도 없는데 비까지 온다고 짜증이 나요.
우리 아들이 저에게 정말 어려운 숙제를 남기고 갔어요. 제 나이에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남들은 절 이해하지 못해도 제가 정말 왜 이러고 다니는지 억울하게 죽은 우리 어린 영혼들만큼은 알 거예요.
저 혼자 잘해서 쉽게 바뀔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소득이 너무 없어 가끔 속상해요. 정말 저보다 더 힘든 상황에 처한 분들에게 힘을 주고 싶은데 세상이 쉽게 바뀌질 않아요."
이상훈 이병의 묘지 안에는 온 가족의 머리카락과 편지가 함께 묻혀 있습니다. 어머니 임OO 씨는 "우리 상훈이가 혼자서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항상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고 읊조립니다.
이 이병이 죽었을 때 군에서는 생활기록표를 확인하여 신변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혹시 집안에 '빽'이 있는지, 가정환경과 교우관계는 어떤지, 애인은 있는지의 여부 등을 미리 조사한 것입니다.
"전 그래도 우리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군대가 그런 곳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군대가 우리에게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를 판에 오히려 반대로 우리 유가족들이 제발 사망원인을 밝혀 달라고 사정하며 매달려요."
아들이 끼었던 묵주 반지를 대신 끼고 있는 이정호씨는 유달리 아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가끔 아들이 살았던 수원 집에 내려가 혼자서 술을 마시다 잠들거나 먼 지방에서 올라온 유가족들과 함께 어울리곤 합니다. 아들이 좋아했던 'SES 3' 집을 크게 틀어 놓고 듣거나 아들이 탄 자전거를 타며 야구 모자를 따라 써보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들이 사묻히게 보고 싶을 때면 새벽이라도 정처없이 지치도록 무작정 길거리를 따라 걷습니다.
어머니 임OO씨는 이 이병이 군대 가기 전 불안한지 밥을 안 먹고 한동안 피자만 먹었던 게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린다고 합니다. 피자, 스파게티, 치즈 등을 좋아했던 이 이병은 치즈에 라면과 밥을 싸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실내디자인을 전공한 이 이병은 미술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어린 시절부터 기상 천외한 그림과 손재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합니다.
"우리 상훈이는 나하고 전혀 다른 애에요. 키가 무려 182나 되요. 그동안 상훈이 키웠던 과정을 생각하면 정말 약올라 죽겠어요.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멀리서 우리 상훈이가 오는 것만 봐도 그저 좋아서 가슴이 막 두근두근 거렸어요.
내가 어떻게 저런 놈을 낳았나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내가 너무 유별나게 좋아해서 그런 가 봐요. 54년을 살아 온 동안 내 직계 가족이 죽은 건 상훈이가 처음이에요. 우리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었는데. 내가 너무 오두방정을 떨었나 봐요."
이상훈 이병의 순직 후 아버지 이정호씨는 피 눈물을 흘리며 컴퓨터를 배웠다고 합니다. 컴퓨터를 어떻게 켜고 끄는지조차 몰랐던 그가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온라인 활동을 오프라인으로 확대,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에 처한 유가족들을 돕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군대에 인권은 없어요. 아마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 이런 군대는 유례가 없어요. 모두가 다 알아요. 단, 군대라는 벽에 부딪혀 의례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 단정지어 모두 포기해 버리고 말죠. 사건이 터졌던 과거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군 의문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게 더 중요해요.
힘들고 어려울 거라는 거 알아요. 그래도 미미하지만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앞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데 보탬이 되는 바른 행동일거라 생각해요. 앞으로 죽을 때까지 다시는 우리 상훈이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계속 유가족들을 위해 함께 일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