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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망종(芒種)이니 옛날 같으면 보릿고개를 지나, 보리를 베다가 찧어 오랜만에 배가 터지도록 보리밥을 먹었을 것입니다. 이틀 동안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교동 면민의 날 체육대회' 행사를 준비하는 공무원들과 임원들이 똥줄이 탑니다.
체육대회를 하루 앞두고 성화 봉송도 해야 하고, 운동장 라인도 그어야겠고 각 리마다 천막도 쳐야 하는데 비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벌써 열흘 째, 저녁이면 우리 교회 운동장에 모여서 연습을 했습니다.
어디를 가나 '코리안 타임'이라는 게 있어서 제 시간에 모이지 못하고 이장님이 방송을 하고, 내 아내가 전화를 하고 먼저 온 사람들이 사람 찾아다니고 해서 오후 4시에 모이기로 했는데 5시쯤 다 모여서 연습을 시작합니다.
기원이 아빠가 늦게 나타나서 기원엄마에게 한마디 쏘아붙입니다.
"당신 점심밥도 안 주고 어딜 쏘다니는 거야. 남편 밥도 안 줘. 아무리 기다려도 와야지. 배고파 돌아가실 것 같아 라면 삶아먹었다."
"뭐라고? 아니 이 양반이 내가 오후 1시 30분까지 기다려도 와야지. 어딜 가면 중간에 새지 말고 곧장 와요. 대룡리 갔다 오겠다는 사람이 생전 기다려도 와야지. 그러구 나보고 밥 달래. 아이구, 증말 내가 못살아."
기원이 아빠는 말 한번 꺼내놓고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새마을 지도자가 분위기를 이끌었다.
"자 그러지 말고, 연습하자구, 이러다 시간 다 가고 언제 연습해. 얼른 얼른 모이세요."
먼저, 여자 피구 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자들이 연습상대가 되어서, 여자 대 남자 피구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자들이 한 손으로 공을 감아쥐고 원반던지기 하는 식으로 냅다 던지니 여자들이 사정없이 나가떨어집니다. 여자들이 '살살 던지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어떻게 하다 이번에는 아람 엄마가 던진 공이 아람 아빠 다리에 맞았는데, 땅과 동시에 맞았기 때문에 판정이 애매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람 엄마가 뛰어들어 아람 아빠에게 "죽었으면 얼른 나오지 어디서 안 죽은 것처럼 어물거리는 거야!"하니까 아람 아빠가 절절맵니다.
우리 동네는 여성 파워가, 확실히 남자들을 압도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 표정을 잡으니 얼굴에 '페인트칠'을 하고 온 여자들은 예쁘게 보이려고 웃고, 아무 것도 안 칠하고 온 여자들은 손을 가로 저으면서 질색을 합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오마이뉴스> 기자인데 더 짓궂게 카메라를 갖다 댑니다. 완전 프로근성입니다. 자칭 피구감독인 한기배씨가 경기를 중단시키며 선수들을 독려합니다.
"잠깐! 여러분, 우리가 지금 장난으로 연습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자, 실전처럼 하세요. 최선을 다해서 정신 바짝 차리고. 볼에 집중하세요. 공에 맞았다고 선수가 아프다고 그러면 어떡합니까? 자, 감독 말 잘 들었지요?"
어째 감독이 대낮부터 약주 한 잔 걸친 것 같습니다. 감독이 배구 주심대에 올라가 제스처를 하면서 작전지시를 하는데 완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저리 가라입니다.
이번에는 발 묶고 달리기 연습입니다. 새끼를 굵고 길게 꼬아 거기다 노끈을 달아맸는데 다섯 명이 들어가 발에 노끈을 묶고 반환 점 돌아오기입니다. 발이 척척 맞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자빠지기 일쑤입니다. 뛸 때에는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맞추면서 뛰어야 합니다. 첫 번 연습을 하는데 발이 맞지 않아 어기적거리더니 모두 나가자빠졌습니다.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웃는데, 내가 잠깐 한눈팔다 넘어진 장면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걸 찍어야 하는데 아깝습니다. 선수 중에 다리가 조금 짧은 사람이 있어서 보폭을 맞춘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 둘 하나 둘'하면서 운동장을 도는데 기필코 지석리가 우승하겠다는 의지가 결연해 보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동네가 제일 잘하는 단체 줄넘기입니다. 단체 줄넘기 이야기는 전에도 소개한 바대로, 강화군 신기록을 갖고 있을 정도로 실력이 막강합니다. 옛날 주전 선수들은 몸이 많이 불은 관계로, 신진들로 선수를 다시 구성했는데 그런대로 기대할 만합니다.
줄은 남자가 돌리고, 여자 다섯 명이 줄을 넘습니다. 구령은 기춘네 엄마가 붙이는데, 구령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모릅니다. 우리 동네 여자들 중, 왕 고참입니다. 말 안 들으면 혼쭐납니다. 선수들이 줄을 넘을 때마다 선수들의 발과 호흡 상태를 봐가면서 '하나, 둘, 셋, 넷…'하고 세는데, 그 구령소리에 선수들에 대한 애정과 격려가 가득합니다.
맨 앞에 명국이 엄마가 줄을 넘는데, 중간부터는 동작이 흐트러질까봐 아예 숨을 쉬지 않고 합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비장합니다. 더럭 겁이 납니다. 줄이 하늘에서부터 춤을 추며 땅바닥을 튀길 때 사뿐 다리를 뒤로 접으며 줄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예술입니다.
여자들이 구령소리에 맞춰 줄을 넘는 광경은, 내가 그동안 20년 가까이 사진을 했지만 정말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선수들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이 혼연일치가 되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한 마음이 됩니다. 백 번을 넘어 줄에 걸려 잠시 연습이 중단되었는데, 기원 엄마가 힘들어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내가 달려가 다리라도 주물러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누구 말대로 기자 노릇하랴, 이것저것 심부름하랴 정신 없습니다.
연습이 거의 끝나갈 무렵, 서현진 이장님이 돼지고기를 사왔습니다. 이장님이 요즘 애를 많이 쓰십니다. 드럼통에 장작불을 피우고, 숯을 만들어 돼지고기를 굽습니다. 돼지고기 익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교회 소나무 숲에 슬그머니 술병도 등장하고, 주거니 받거니 흥에 겹습니다. 삼겹살에서 기름이 떨어져 돼지고기에 불이 붙어 애를 먹습니다. 세정 아빠가 한마디합니다.
"그냥 불만 슬쩍되면 돼. 그렇게 먹어도 탈없어. 목사님은 그만 좀 먹어요. 혼자 한 근도 더 잡수셨나봐?"
저녁 해거름, 온 동네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웃고 하는 짓이 애들 같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모내기도 다 마치고, 교동 면민의 날 기념 체육대회를 준비하면서, 이심전심(以心傳心) 네 남편 내 남편, 네 마누라 내 마누라 할 것 없이 한데 어우러져 한 마음 한 가족이 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어디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선수들과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지석 지석 파이팅"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2탄은 내일 이어집니다.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