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소설은 일단 무척이나 재미있다. 그는 ‘소설은 재
미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진하게 녹여내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대중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소설로 데뷔한 작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의미를 함축하고 이미지를 녹여내야만 하는 시를 통해 문단에 등장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글은 마치 조선의 민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힐 만큼 해학적이다. 소설 안에 내재되어 있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물 흐르듯이 우리의 뇌 속을 헤집어 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말초적인 ‘재미’만을 위한 ‘재미’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생활 속에서, 그 현상들을 거꾸로 되짚어내는 독특한 ‘재미’가 있다.
이러한 성석제만의 소설쓰기는 관념적인 현대소설의 문답이나 답답하리만치 의뭉스러운 소설들과는 분명 그 궤를 달리 하고 있다. 성석제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쉽게 읽힌다. 그러나, 그 웃음의 강도는 때로는 실소를 자아내게 하거나 과연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으로 미약하게나마 드러나곤 한다.
성석제가 내놓은 소설들은 모두 인간의 주색잡기에 관한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신화적인 소재를 마구 헝클어 놓으며 종국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비탄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런 상황은 꽤 독자들을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포커챔피언의 연설을 놓고 도박의 기술에 대해 아주 디테일하게 짚어가고 있는 것(소설집 <홀림>)이나 비천한 태생을 안고 태어난 사내가 그야말로 황홀하게 탈바꿈하는 것(<천하제일 남가이>) 등은 모두 이런 작가의 범상치 않는 눈썰미 덕택에 생겨난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그가 2년여 동안 발표한 일곱 편의 중편과 단편들을 묶은 책이다. 표제작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반푼인 황만근의 죽음을 놓고 그 사실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을 담고 있다. 궐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운기를 몰고 나간 황만근이 며칠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의 행적을 놓고 동리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을 한다.
황만근이란 인물은 반푼이지만, 동리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마을의 두엄을 책임지는 인물임과 동시에 부지런하여 어머니를 효심을 다해 모신다. 이런 캐릭터는 종래의 전래 동화에서 차용된 것으로 보이는 ‘착한’캐릭터의 전범이다. 때문에 독자들은 착한 황만근이 복을 받을 것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독자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한 반전을 염두에 두고 쓴 것처럼 보인다. 허술하게 보이는 인물들의 성격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그가 취사선택한 것은 그가 늘 애용해왔던 신화적인 소재의 선택이었다.
황만근이 집으로 귀가하기 위해 산을 내려오던 중, 커다란 토끼를 만나게 되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 황만근은 너무나 바보스럽지만, 그러나 우직하기에 오히려 그를 죽이려는 토끼와 대면하여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는데, 성석제 소설의 전형적인 수법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황만근은 이장의 꾀임에 속아 궐기대회를 가기 위해 자신의 경운기를 몰고 읍내로 가게 되는데 끝내는 사고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작가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장치를 마련해 놓고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고로 죽게 된 황만근의 묘비에 써 있는 글귀는 그의 소설적 ‘재미’를 부가시켜 주는 새로운 화법으로 작용한다.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감탄하지 않는 삶이었지만 선생은 깊고 그윽한 경지를 이루었다.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한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세운 사람이 아니랴. 단기 사천삼백삼십년 오월 스무날'
이 ‘재미’는 비단 황만근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집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천하제일 남가이>에서 나오는 남가이의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일생이나 <천애윤락>, <꽃의 피, 피의 꽃>,<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등의 단편들은 모두 이러한 성석제 소설과 다른 소설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소재의 독창성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언저리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비천함과 가난함의 생동일 것이다. 비천함과 가난함에 대하여 실로 웃음으로 대하기가 번잡한 지금, 성석제의 소설은 분명 읽는 이로 하여금 생기를 불어넣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