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일이 생겼어요. 한 시간쯤 늦게 만나요."약속시간 세 시간 전에 온 문자 한 통. 바쁜 사람 괜히 성가시게 하나 싶어 힘들면 다음에 보자고 했더니 한사코 괜찮단다.
"배고파도 조금만 참고,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봐요."세종문화회관 뒤? '뒤'는 뭐야. 사회생활을 하면서 약속이라고까지 하기에는 뭐하지만 나름대로 지켜지는 규칙이란 게 있다. 약속 장소는 누구나 아는, 이를테면 명동이라면 밀리오레 앞, 압구정이라면 디자이너클럽 근처, 강남역이라면 6번 출구와 같은 곳으로 정한다. 하다못해 우리 동네도 태평백화점이라는 암묵적 공간이 있으니까. 덧붙여 이곳 모두 '정문 혹은 앞'에서 만나야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아저씨 구석진 델 좋아하나'는 둥 개운치 않은 생각을 하며 굳이 세종문화회관 정문을 거쳐 뒷문으로 갔다. 어라? 광화문은 자주 지나다녔고, 세종문화회관도 새롭지 않은 곳이지만 근처에 공원이 있는 줄은 몰랐다. 화려하게 꾸며놓진 않았지만 조용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기에는 딱 좋았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해 벤치에 앉아 잡지를 꺼내들었다.
약속시간이 한참 지났다. 이십 분, 삼십 분…. 또다시 '사회생활을 하면서 약속이라고까지 하기에는 뭐하지만 나름대로 지켜지는 규칙'이 떠오른다. 그걸 깨트리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닌데 깨지면 인간관계는 서먹해지게 마련이다. 더욱이 처음 만나거나, 아직은 어색한 사이라면.
그 아저씨와 나의 관계는 후자에 속한다. 고로 나는 5분이나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고, 바쁠 것을 배려해 재촉하지도 않은 채 한 시간을 기다렸다. 내가 매너 좋은 사람이냐고? 그렇지도 않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만나는 경우 조금 일찍 나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사정을 고려하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 시간이 지났다. 결국 '일반적'이라 생각한 것은 그동안의 무난한 인간관계에서 온 착각이었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뭘 그렇게 열심히 읽어요?"읽긴 뭘 읽나. 내 손에 들려 있는 잡지에는 '진보 세력, 경제성장론 없으면 집권도 없다'는 다소 심각한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한 시간 내내 읽던 내용을 또 읽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만 글자에 고정시킨 채, 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을 납득하기 위해 애쓰던 중이었다.
"배고프죠? 선물이에요. 이거 사느라 늦었네. 허허."이런, 역시 여자는 선물에 약하다. 아저씨가 내민 두 권의 책에 막 폭발하려던 인내심이 "바쁘셨나 봐요" 정도의 마음에도 없는 소리와 옅은 미소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순간에도 이 건물 바로 건너편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K문고가 있다는 것과 두 권의 책을 고르는 데는 길어봐야 10분밖에 안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여튼 이게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와 성석제라는 소설가가 내 인생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경위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 책의 황만근이라는 인물과 성석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아저씨도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팍팍한 내 인생에 찾아온 소설가 성석제와 황만근
뜻밖의 선물에 좋아한 것은 그때 뿐이다. 나는 소설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그보다 소설에 대한 호불호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게 확실한 표현일 듯 싶다. 다만 의식적으로 멀리해왔다. 물론, '청소년 필독서' 목록에 나와 있는 소설책은 읽으려 노력했고, 가끔 머리 아픈 사회과학 서적이 거북하게 느껴질 때도 '가볍게' 읽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에 내가 알아야 할 지식이 얼마나 많은데 작가가 만든 허구적 세상에까지 관심을 둘 필요가 있나 해서다. 사춘기에 부쩍 발달한 감수성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굳이 남의 감성까지 빌려올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기자의 꿈을 꾸면서부터는 '팩트(fact)'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 아래, 잘 읽히지도 않는 경제·사회 분야 책 속의 딱딱한 지식만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황만근은…>과 또 한 권의 책은 점점 구석으로 밀려났다. 급기야 두꺼운 전공서적과 영어 단어장 등에 덮여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 사이에도 서점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며 몇 권의 사회과학 서적을 사들였다. 빳빳한 종이에서 풍기는 따끈따끈한 새 책 냄새로 가득한 서점에 가면 아무래도 지문 하나 없이 책장에 꽂혀 몇 년을 묵은 책은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다행히도 나는 기자 지망생이기 전에 휴학생이자 백수이고, 꽃다운 스물셋이다. 더 이상의 책을 사들이기가 벅찼던지 책장에 꽂힌 책들부터 모조리 읽기로 결심하고는 멀리했던 소설책까지 집어든 것. 첫 타자가 바로 성석제의 <황만근은…>이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독특한 서사구조와 더불어 작가의 문체상 특징이다. 간결하면서도 그리 가볍지는 않다. 속도감 있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씹히는 맛이 있다.
어머니의 손, 피에 흠뻑 적셔진 손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은 의외로 거칠었으며 주름이 져 있었다. 나중에야 나는 나이가 맨 먼저 손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손은 아름답기커녕 끔찍했다. (욕탕의 여인들 p.190) 자칫 무겁고 궁상맞아 보일 수 있는 인물의 삶을 성석제는 특유의 해학성으로 풀어낸다. 그게 바로 독자들의 연민 뿐 아니라 공감과 감동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던 힘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알고 있어. 내 아버지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을 거야. 똥구덩이라고 해도 좋아. 내 어머니가 그랬어. 내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똥을 받아먹었다구. 그래서 내가 태어난 거야. … 똥을 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천하제일 남가이 p.171)일곱 편의 짤막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그 소재도 기발하거니와 등장인물도 제각각 별나다. 그럼에도 각각의 단편들은 어딘가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한 작가에게서 나온 이야기인 탓이겠지만, 서로 다른 소재가 책 한 권 속에 뭉그러져 마치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은 것은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그 원인은 하나같이 덜떨어진 등장인물에 있다고 본다. 덜떨어진 게 아니라면 인간성 혹은 사회성이 2%, 아니 20%는 부족하다.
온 동네에서 바보로 소문난 황만근이나 제 맘대로 전화 한 통 못 거는 동환이나, 똥냄새 풍기며 똥수레 끌고 다니는 남가이가 그렇다. 어떤 내기에도 첫판은 무조건 따고 보는 노름꾼이나 책 삼백 권이면 인간성을, 오백 권이면 영혼을 빼앗길 것 같은 당숙도, 쾌할냇가의 명랑한 곗날에 모인 계원들은 말할 것도 없다. 모두 세상 가운데로 나오지 못하고 가장자리를 맴돌거나 떠돌아다니는 주변인이다.
이들은 때로는 나쁜 짓도 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지만 결코 밉지는 않다. 그게 바로 성석제가 인물을 그려내는 힘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인물들에 애정을 품었기에 비록 덜떨어져도 한없이 인간적이고 소박하다. 그중의 으뜸은 단연 황만근이다.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감탄하지 않는 삶이었지만 선생은 깊고 그윽한 경지를 이루었다.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p.40)남과 다르지만 묵묵하게, 그러나 누구보다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만근을 작가는 '하늘이 낸 사람'으로 만들어 냈다.
돈 많은 과부를 탐하며 결혼으로 인생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나'도 때늦은 사랑에는 더럽고 차가운 눈물 흘렸다. 첫판은 무조건 따는 비범한 능력을 가졌으나, 끝없는 욕심에 항상 제자리걸음인 이도 있다. 특별해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네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은가 보다.
모자라지만, 때로는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있기도 한 인물들은 각각 개성이 넘친다. 다양한 개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인생을 산다. 누구보다 인간미 넘치도록. 아무리 밑바닥 인생이라도 고귀하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은 있게 마련이다.
'일반적'이지 못한 것을 납득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 하는 나에게 비록 허구이지만 이 평균 미달자들의 삶은 강렬하게 기억될 듯하다. 사회가 아무리 다원화됐다지만 이념의 획일화를 강요받고 모든 이가 하나같이 부와 육신의 안락을 꿈꾸는 요즈음, 고단하지만 소소한 삶의 모습이 유난히도 애틋하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껄껄'하며 호탕한 웃음으로 채울 수 있는 여유와 넉넉함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절실하다.
어쩌면 약속시간에 한 시간이나 늦으면서도 넉살좋게 웃음으로 때우려던 그 아저씨의 여유가 부럽기도 하다.
필요에 따라 책을 읽고, 지식과 정보를 얻기에 급급했던 나는 잔잔하고 소박한 무언가에 대한 갈망을 애써 외면해 왔나 보다. 무더위가 오기 전에 만난 소설가 성석제와 황만근은 차가웠던 가슴을 미리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이 작품의 해설자 정호웅은 '성석제 소설의 그런 힘에 제압당해 재미있는 이야기 한판 즐겼다는 기분에 흐뭇해하며 책장을 덮은 독자'를 이렇게 평가한다. 실상 그의 소설 안쪽으로는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였다고. 내심 뜨끔했으나, 팍팍한 세상살이에 그의 해학과 재치를 한껏 즐겨보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을까.
이 책과 더불어 따뜻한 가슴까지 선물해준 그 아저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나저나 "읽고 감상문 제출하면 책 한 권 또 사줄지 아냐"던 말 기억하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