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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성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자신을 '날라리 독서가'라고 소개한다. 이틀에 평균 세 권의 책을 손에 들고 있지만 정작 그가 '읽는' 것은 세 권 중 절반 정도. 나머지 책은 그저 '본다'.

그는 책 내용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1/3 정도 골라읽고 나머지 부분은 대략적인 내용만 파악하는 것을 책을 '본다'고 하고,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소화하는 것을 '읽는다'고 한다.

"모든 책을 다 읽으려는 것은 욕심"이라고 말하는 날라리 독서가 표정훈씨의 책 이야기를 들어보자.

표정훈, 출판평론가 되다

그는 책을 읽고나면 꼭 기록을 해두는 습관이 있다. 노트에 간단한 줄거리나 느낌을 적기도 하고 제목과 출판연도 등의 간략한 서지사항만 옮겨두기도 한다.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모은 노트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십여권이 넘게 쌓였다. 이 노트가 그의 보물 1호였다(그는 집을 옮기면서 보물 1호를 분실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그가 책을 좋아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이 책 사는데 쓰는 돈을 안 아끼시잖아요. 제 어머니께서도 세계위인전집같은 걸 사주시곤 했죠. 그래도 부족하면 아버지 서재로 몰래 들어가 책을 훔쳐보기도 했구요."

그의 책에 관한 또 하나의 버릇은 마음에 드는 책이면 모조리 사들인다는 것이다.

"책 중에 한 장(chapter)이라도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나는 그 책을 사요. 그 장은 그 책 속에만 있으니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들어요."

그런 마음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책들이 한 달에 50여만원치나 되었다. 지금은 출판사에서 홍보 차원으로 책을 주기도 해서 그나마 책 값이 조금 굳었다며 표씨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책에 대한 이런 애정은 자연스럽게 그를 출판평론가의 길로 이끌었다.

"개인 홈페이지에 서평을 올리곤 했는데 그걸 본 한 일간지에서 서평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해왔어요."

그렇게 시작한 것이 이제는 '책'하면 표정훈을 떠올릴 만큼 유명해졌다. 지금도 KBS < TV, 책을 말하다 >의 자문위원, 궁리닷컴(www.kungree.com)의 운영자 등 여러 개의 직함을 가지고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문자과잉의 그들

표정훈씨는 88학번이다. 그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지식인이라면 꼭 읽어야할 책의 목록들이 불문율처럼 있었다. 그는 이것을 '지식화폐'라고 표현했다.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들은 화폐처럼 당대 통용되는 지식 통화였어요."

그러나 2000년대의 캠퍼스에는 더 이상 지식화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자유와 능동성의 증가, 범위의 확대로 해석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탈문자화'되었다는 비판을 많이 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문자과잉의 상태라고 말하죠. 문자메시지, 채팅, 인터넷 검색…. 젊은 층이 접하는 문자의 채널과 방식이 달라진 것일 뿐 탈문자화 된 것은 아니에요."

그는 그 양상의 변화도 지적한다. 예전에는 책을 통한 일방적 수신이 전부였다면 오늘날에는 인터넷, 핸드폰을 통한 능동적 발신의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한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무언가를 알려면 당연히 책을 펴들었어요. 요즘은 인터넷부터 들어가죠. 물론 인터넷은 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담고 있어요. 그러나 그 지식들의 가치와 적합성을 따지기 위해서는 결국 책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책을 통해 최종적인 조회를 하는 거죠."

그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난무하는 상호복제된 지식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요즘 젊은이들은 책을 통한 확인 과정없이 불확실한 정보를 지식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우려했다.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우리는 책을 읽지 않기로 유명한 나라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저조한 독서율은 일본과 나란히 세계 끄트머리를 다툴 정도이다. 항상 '책을 읽읍시다'라는 캠페인 문구는 난무했지만 그것이 실효를 거둔 적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야말로 '책바람'이 불어도 단단히 불기 시작했다.

표정훈씨는 최근의 추세를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단순한 유행일 수 있다는 것. 어느 한 방송사에서 독서 장려 프로그램이 의외의 성과를 거두면서 다른 매체에서도 너나없이 따라하게 되었고 이를 보는 시청자들은 얼떨결에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는 해석이다. IT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뉴미디어(new media)와 구미디어(old media)와의 균형을 잡으려는 흐름에 의해 구미디어인 책이 주목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원인에 의해 책바람이 불었든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책,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출판평론가 표정훈이 말하는 내 인생의 책

표정훈씨는 이십년 넘게 쌓아온 목록 중에서 두 권의 책을 골라냈다. 버트런드 러셀의 <러셀 자서전>과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까지>이 바로 그 주인공. 그는 특히 에드먼드 윌슨의 필치가 너무 좋다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다. 책을 쓴 윌슨이나 책을 읽은 자신이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음에도, 책에 담겨진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력과 인물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사를 다룬 접근방식은 그를 단숨에 매료시켰다. 더불어 윌슨의 <악셀의 성> 역시 낭만주의 문예사조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책이라고 덧붙인다.
/ 송민성


날라리 독서가가 전하는 책, 이렇게 읽어라

ⓒ 송민성
표정훈씨는 '모든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부터 버리라고 말한다.

"책읽기가 정 귀찮으면 온라인 서점에서 웹서핑 하듯 책 소개나 서평을 읽어봐도 좋아요. 그러다 흥미가 생기면 한두 권쯤 살 수도 있는 거구요. 실제로 외국의 CEO들은 하루에 한두 시간씩 인터넷 서점의 서평 읽기에 투자한답니다. 자신의 분야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거든요."

그는 책읽기의 또 다른 강박으로 'XX 선정 필독도서' 따위의 목록들을 꼽는다. 특히 권장도서 목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전에 대해 그는 불만이 많다.

"고전을 읽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고전을 읽어야하는 것은 아니죠."

더군다나 제대로 번역된 고전도 드문 상황에서 고전을 반드시 읽으라는 것은 '책이란 어렵고 지겨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더욱 견고히 할 뿐이다.

그는 책은 쉽고 재미있게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읽기의 강박에서 벗어나 즐기기 위해 책을 집어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책을 읽겠다는 욕심으로 독서 계획을 세워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그리 권하고 싶지 않단다.

무심코 집어든 한 권의 책이 자신의 세계관과 사고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우연성'이야말로 책읽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표씨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계획에만 얽매이다 보면 책읽는 재미를 잃을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책 속에 있는 다른 책을 보고 싶다거나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그럼 그때 또 다른 책을 집어들면 되는 거예요."

지식은 그물과 같아서 어떤 분야의 지식을 알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게 된다. 그는 이 그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그물을 쳐가며 책을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떤 체계가 생긴다고. 그는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정해두기보다는 어떤 주제의 책을 읽을 것인가를 정해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한 학기 혹은 한해를 기준으로 테마를 정해서 쉬운 책부터 어려운 책까지 섭렵해가면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도 높아질 뿐 아니라 생각보다 다양한 책들을 접할 수 있다.

표정훈씨는 이때 자신의 흥미와 취향이 첫번째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이 제일 좋은 책이라는 그는 자기를 신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순수 문학의 퇴조와 장르 문학의 인기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도 그리 부정적이지 않다.

"언제나 기성 세대들은 젊은 세대를 걱정했죠. '요즘 아이들은 왜 그런 걸 좋아하지'하면서요."

판타지 소설과 같은 장르 문학이 주목받는 이유 중의 하나로 그는 순수 문학의 부진함을 든다. '문학의 퇴조', '문학의 죽음'이라고까지 표현되는 순수 문학의 퇴보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 순수 문학의 부진함 탓이라는 것이다.

그는 소설이, 시가 현실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골방에 머무르지 말고 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 이상 '골방의 생산력'으로는 현실의 빠른 변화들을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르 문학에 대해서도 그는 좀더 조심스럽다.

"외국의 경우 장르 문학은 탄탄한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죠. 하지만 우리의 경우 얼마나 탄탄한 수요자층이 다져져 있는지는 의문이에요."

그는 장르 문학이 '제대로 즐기기 어려운 문학'이라고 말한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그 분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어야 그 작품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장르 문학을 즐기는 학생들도 대강 시간때우기 식으로 읽기보다는 관련 분야에 대해 공부해가면서 읽는다면 재미를 배가시킬 수 있으리라고 권한다.

책 한 권의 여유를

표정훈씨가 출판평론가라는 직함을 단 지도 어느새 6년이 넘어간다. 그는 지금을 전환기로 삼고자 한다. "작가라고 하면 문학 작가를 떠올리는 우리 나라에서 교양 작가로서 좋은 책을 써내고 싶다"는 욕심을 살짝 내비치는 표정훈씨는 젊은이들에게 책 한 권의 여유를 가지기를 당부했다.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하면서 경쟁적으로 혹은 의무적으로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는 이러한 현실이 못내 안타깝다. 책읽기가 의무가 아닌 생활이 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취업의 어려움과 빡빡한 현실 때문에 전략보다는 전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같아요."

지금 당장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보여도 긴 호흡으로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역시 그러한 오류에 빠져 노심초사하던 한 젊은이었다. 자신이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탓인지 그는 젊은이들이 책 한 권의 여유를 가지기를 거듭 강조했다.

"외국에는 'Life time Reading Plan'이라고 해서 평생 독서 계획을 세워두기도 해요.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책을 가까이 대하고 살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에게 있어 책읽기란 "여러 세계를 동시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체험이자 만남"이다. '지금 여기에'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있도록 해주는 마술봉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책읽기가 좀더 즐거운 만남이 될 수 있길 바라며 '씨익' 웃는 표씨의 얼굴에서 넉넉하고 여유로운 책 향기가 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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