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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북송금 첫공판이 열린 4일 오후 서울지방법원에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이 출석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1. DJ 정부에 장세동 같은 사람이 없다는 특검 관계자의 잘못된 인식

지난 5월 하순의 특검 사무실, 한 특검 관계자가 임동원씨에게 물었다.

"왜 DJ 정부에는 장세동 같은 사람이 없습니까?"

얼마 후 이 질문은 임씨에 의해 DJ(김대중)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5월 28일 밤 특검 사무실, 특검 수사관계자가 당시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변론활동 차 방문했던 필자에게 물었다.

"왜 DJ 정부에는 장세동 같은 사람이 없습니까?"

이런 특검의 문제의식을 <동아일보>가 공유한 것일까. 지난 7월 4일 <동아일보> 주말판인 'WEEKEND'판에는 "대북송금 책임론 거론 때 정치권서 두 사람 '충성심' 비교…'장씨가 낫다'는 평가에 박 전 실장 고민"이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솔직하게 의문을 제기하자. 박지원과 장세동을 단지 '충성심'만을 기준으로 단순 비교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떻게 해서 특검은 이 정도의 단순 논리(?)로, 긴 역사적 맥락과 헌법적 차원에서 진행했어야 하는 특검수사를 이끌어 갈 수 있었을까. <동아일보>와 그 신문에 인용된 동교동계의 이런 비교방식은 얼마나 단순무지한가.

물론 특검의 이런 질문이 선의일 수도 있다. 특검으로는 DJ에게 수사의 칼날이 향하는 것을 막고, 일정 수준에서 사건을 봉합하며, 여론을 어느 정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사실상 DJ 정부의 2인자로 지목 받은 박지원씨가 모든 걸 책임져 주기 바라는 선량한(?) 의도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그에 전제되는 장세동씨에 대한 기본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되었기에 도저히 성립하기 힘든 잘못된 질문이 되고 말았다.

2. 되돌아보는 장세동의 반역사적·반인권적 행태

2001년 12월 서울지검 발표에 따르면 지난 87년 발생한 '수지 김 피살사건'은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의 결정에 따라 단순살인 사건에서 납북미수 사건으로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장씨는 수지 김 남편 윤태식씨가 살인을 자백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안기부가 그전에 윤씨에게 납북미수 사건이란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시켰던 점을 감안, 진상발표를 보류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자칫 장씨로서는 네 번째로 교도소에 가야할 위기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장씨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 없이 지나갔다. 장씨는 지금까지 세 번의 전과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1989년, 대통령 경호실장 재직당시 일해재단 영빈관 건립과 관련해 건설부에 압력을 행사한 혐의 등 5공 비리에 연루, 구속돼 1심에서 징역10월을 선고받았다.

두 번째는 1993년, 안기부장 재직당시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일명 용팔이 사건)에 7억여원의 활동자금을 건네는 등 개입한 혐의로 9개월간 수감됐었다.

세 번째는 1996년, '12·12 군사쿠데타'에 가담한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역시 실형을 선고받았다.

언론과 특검은 이미 장씨의 이런 범죄 사실을 잊어버렸을까. 장씨의 군사반란 범죄사실과 무죄를 다투고 있는 박씨의 대출외압 관련 직권남용 혐의사실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장세동씨는 왜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 전두환씨를 대신해서 내가 모든 걸 다 했다고 책임지지 않았을까. 특검이 앞선 질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2·12군사반란조차도 장세동씨가 전두환씨를 대신해서 뒤집어썼을 때 성립될 수 있는 일 아닐까.

'역사의 망각'을 잠시 일깨워보자. 장씨는 12·12 당시 청와대 외곽을 담당하는 제30경비단 단장이었다,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쿠데타 세력이 거사를 위해 모였던 '경복궁 모임' 장소.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등에 관한 대법원 판결은 이를 확인하며 장씨는 "반란의 모임에 참여하거나 반란 실행을 위하여 동원된 병력을 지휘한 사실이 있다"고 판결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법원은 장씨가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체포과정에서 "제30경비단 소속전차에 포탄을 장전하는 등 대항체제를 구축한 사실"을 인정하며 "대항체제를 구축한 것은 반란을 진압하려고 한 수경사령관의 정당한 직무집행에 반항하는 행위로서 모두 반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피고인 장세동이 피고인 허화평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의 체포를 위해 공관에 갔던 제33헌병대가 공관의 경비를 맡고 있던 해병대 병력에게 포위당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수도경비사령부 제33경비단장 육군대령 김진영으로 하여금 제30경비단 소속 5분대기 중대 병력을 인솔하여 위 제33헌병단을 구출하기 위하여 총장공관으로 출동하도록 한 사실" 역시 반란행위에 해당한다고 했다.

장씨는 이런 범죄사실을 가진 사람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정에서의 시민학살, 삼청교육대, 언론통폐합, 공직자해직, 용공조작, 김근태씨 고문을 비롯한 인권탄압, 權양의 성고문사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등의 은폐·축소·조작사건 새세대육영회 등의 불법성금 모금사건 등 범죄행위의 수준과 빈도수가 헤아리기도 벅찰 정도이다.

장세동씨는 전두환씨를 대신해서 교도소에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지고 교도소에 갔다. 그것도 운이 좋아서, 그리고 여러 정치적 이유로 그 중 일부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교도소에 갔을 뿐이다. 그런데도 특검이나 일부 언론은 이런 사실은 철저히 배제한 채 그저 '천박한 충성심'만을 기준으로 두 사람을 비교 판단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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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씨와 장씨의 충성심 비교

박지원씨는 1987년 귀국하기까지 15년간을 미국 뉴욕에서 살면서 사업체를 크게 일군 사람이다. 80년대 초반 박씨의 미국 뉴욕소재 사업체였던 데일리 패션(가발 및 잡화를 수입 도매하는 회사)에서 일했던 한 동포는 지금도 이런 기억을 되 뇌이곤 한다.

"박 사장에게는 확고한 경영 철학과 모토가 있었습니다. 입사한 첫 날부터 이를 강조하곤 했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첫째 충성을 다하라, 둘째 세일즈는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는 것이다. 셋째 내일 큰일을 위해 기도하지만 오늘의 작은 일에 열심히 매달려라' 이것들이었습니다."(안동일, '태평양을 두번 건넌 사람들' <1> 박지원, 프레시안).

남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요구했던 박씨였기에 DJ에 대한 박씨의 충성심 또한 정평이 나있다. 물론 이 점에서는 장세동씨도 예외는 아니다.

66년 월남에서 당시 연대장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 12·12 군사반란 때 핵심적으로 가담했으며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특전사 작전참모로 재직했고(굳이 따지자면 장세동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발포책임자에 대해서 지금까지 전혀 이야기 한 바 없다. 이것도 주군을 위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5공화국 7년 6개월 동안, 81년 7월 13일부터 85년 2월18일까지 총 3년 7개월 동안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85년 2월 19일부터 87년 5월 26일까지 2년3개월 동안 안기부장으로 일했다.

두 사람 모두 충성심 면에서는 '일가'를 이루었기에 긴 세월동안 권력 핵심의 신임을 받고 지근 거리에서 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충성행위에 대한 가지 평가를 위해서는 충성의 대상이 누구였으면 그 충성행위의 구체적 내용 또한 따져보아야 한다. 그런데 충성의 대상이 되는 '주군'의 차이가 두 사람이 갖는 충성심의 질적인 측면을 곧바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대부에 대한 충성심과 12·12 군사반란과 5·18내란, 그리고 부패와 인권탄압에 찌든 군부독재의 대부에 대한 충성심이 같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이 행한 충성 행위의 구체적 면면은 두 사람이 각기 '주군'을 모셨던 기간동안의 주군의 행적만 비교하면 쉽게 이해 될 것이다. 결국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DJ와 전두환에 대한 평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물론 DJ도 두 아들과 동교동계 등 측근의 비리가 있었고, 지나친 소비와 건설경기 진작 등 일부 잘못된 경제정책이 있었으며, '거대야당'의 상황을 고려에 넣는다 하다라도 일부 투명치 못한 남북대화가 있었기에 무조건 적으로 찬양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전두환 대통령과 장세동씨의 조합이 DJ와 박지원씨의 조합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5공청문회 과정에서의 장세동씨의 발언을 살펴보는 것도 '장세동 신화(?)'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장세동씨(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임춘원 위원 본 위원은 증인이 군인출신이고 경호실장 출신이고 안기부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진실하고 성실한 답변에 임할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참으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증인은 한 사람의 사나이로서 비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곳에 나와서 국민 앞에 사죄하고 참으로 잘못 되었다고 증언함으로써 전두환씨에게 마지막 충성할 기회마저 놓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 지금 들고 있는 것 전혀 없습니까?

증인 장세동 잘못된 것은 제가 사죄할 수 있고 또 그릇된 점은 제가 고치겠다고 약속을 드릴 수 있지만 하지 않은 것을 또는 없는 것까지도 제가 했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제가 잘못된 것은 잘못했다고 지금까지 쭉 사과해 왔고 또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씀 올렸습니다. 만약에 제가 정답을 얘기하는 것이 모든 것은 제가 했습니다. 강압도 하고 그 다음에 그 막부 권부도 전부 다 그렇게 했고 재단사유화도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 장세동씨도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했다고는 이야기 한 바 없다. 청문회 답변을 보면 전두환씨에 대한 비난을 전부 뒤집어 쓰려고 한 적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도리어 그런 식의 요구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장씨의 답변은 말해준다.

그럼에도 <동아일보>는 "5공비리 등과 관련해 세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전 전 대통령의 문제는 끝내 함구했던 장 전 부장 같은 의연함을 보여달라는 주문이었다"라고 적었다. 도리어 특검에서의 박씨는 달랐다. 박씨는 자신의 주도를 시인했지만 헌법상 대통령의 평화통일 의무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 5공청문회의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강신옥 위원 장세동씨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안기부장 자리에 있었고 경호실장 자리에 있었는데 대한민국이 지금 잘못되는 것이 뭔지 압니까? 정치 지도자 전두환씨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게 우리 나라의 비극입니다. 그것 알고 있습니까? 어때요?

증인 장세동 그것은 역사가 평가하리라고 봅니다. 물론 공이 있고 과가 있고 비리가 있고 잘못이 있고 모든 것을 잘 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흔히들 생각하듯 장세동씨도 주군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연함은 없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세동씨도 '주군'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다했다. 일부 언론과 특검은 이런 맹목적인 충성을 찬양하는 것일까. 맹목적 충성이 단지 두 사람만의 문제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한 나라와 그리고 그 곳에 적을 둔 국민과 이들이 갖는 인간의 존엄성을 객체로 한 충성행위인 경우에는 달라진다.

충성의 대상은 공직자인 이상 당연히 국민이어야 한다. 국민과 주군이 일치할 경우에만 그 충성은 의미가 있다. '짐이 곧 국가'이던 시절에는 왕에 대한 충성이 곧 국가와 그 신민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다. 하지만 국민과 독재 권력이 철저히 분리된 상황에서의 그 독재 권력에 대한 충성을 왜 찬양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DJ도 국정 수행과정에서 일부 잘못은 있을 것이고 그 부분에 대한 충성행위는 박지원씨도 비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두환씨에 대한 장세동씨의 맹목적 충성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용팔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출소하자마자 장씨는 연희동 전두환 전대통령 집에 찾아가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며 큰절을 했다. 그런데도 조폭 수준의 충성심을 국가적 차원의 충성심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4. 대북 특사로서의 차이

물론 박지원씨도 한계는 있다. 사실상 권력의 2인자로 군림했고, 권력의 사유화를 부채질하였으며 핵심 참모로서 DJ의 일부 잘못된 의사 결정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장세동과 그저 맹목적인 충성심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잘못된 일이다.

장세동과 박지원씨가 공통점을 갖는 부분도 있다. 두 사람 모두 최고 권력자의 핵심을 이루다 보니 대북밀사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후락을 노태우는 박철언을 대북밀사로 활용했던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전두환은 장세동을, DJ는 박지원을 대북밀사로 보냈다.

북측의 허담 일행이 비밀리에 서울에 와서 전두환, 장세동 등과 회동한 지 40여일 만인 1985년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에는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 강재섭 안기부장 제2특보 등 5명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였다. 10월 17일 오전, 장세동은 김일성을 만났다.

"그 동안 일제하의 항일투쟁을 비롯하여 40년간 김주석께서 북녘 땅을 이끌어오시고 그 동안 평양의 우뚝 솟은 의지를 보고 이러한 발전을 위하여 심려해오신 점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다시 드립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비록 체제와 이념은 다르지만 주석님의 조국애와 민족애를 높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최보식, 장세동·김일성 비밀회담의 생생한 대화록, <월간조선> 1998년 9월호).

국가보안법을 걸려고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걸 수 있는 발언 수준이었다. 이런 찬사에도 불구하고 장세동씨가 특사로 나선 남북최고위급 비밀대화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말았다.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한 부분에 대한 일정부분의 책임을 특사라면 나눠 가져야 한다.

2000년 3월 17일, 3월 23일, 4월 8일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던 박지원과 북한의 조선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은 세 차례에 걸친 비공개 접촉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DJ는 2000년 6월 13부터 15일까지 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전두환과 그의 특사인 장세동씨의 비밀접촉은 남북통일에 특별한 기여도 남기지 못한 채 대화록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DJ와 그 특사인 박지원씨의 비밀접촉은 남북정상회담과 포괄적인 남북화해를 이끌어 냈다.

물론 비판론자들은 여전히 돈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지만 왜 10억 달러짜리가 갑자기 1억 달러짜리로 '바겐세일'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사과 한 마디 없다. 10억 달러건 1억 달러건 돈이 건너갔으면 그만이라는 것인가. 돈의 성격에 대해서는 특검조차도 이견이 있음을 분명하게 적시했다는 점만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한다.

5. 장세동의 '협박'과 박지원의 '진술거부'

1988년 <월간조선>과 <신동아> 11월호는 11월 7일 5공청문회를 앞두고 장세동씨의 인터뷰를 실은 적이 있다. 이 인터뷰에서 장세동씨는 "내가 만일 입을 열면 모두가 다친다"고 말했다.

지난 7월 7일 대북송금의혹 특검 사건 첫 재판이 있었다. 특검은 박지원씨에게 특히 "2000년 4월 8일 정상회담 예비접촉에서 1억 달러는 정부에서, 4억 달러는 현대에서 지원키로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박씨는 "외교관계 및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하는 등 1억 달러와 정상회담 대가성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일체 답변을 거부했다.

물론 입 속에 담아둔 말의 내용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다친다'는 협박으로 진술을 거부하는 이와 '외교관계 및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법정 진술을 거부하겠다는 발언의 차이가 박지원과 장세동 두 사람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 같다.

역사적·헌법적 차원의 행위를 일반 범죄행위와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일은 참으로 위험하다. 역사적·정치적 여러 문제들을 사법적 판단의 장으로만 내 던지며 검찰과 특검 등 사법기관의 권력 남용을 문제삼는 일부 태도 또한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는 지금 지나치게 법률만능주의에 빠져드는 것 같다.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인 한반도에서 남과 북 정상이 만나 평화통일을 논의하고자 하는 각종 준비행위에 헌법의 하위법인 남북교류협력법 등 실정법 위반의 점만을 문제삼아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지금 이 시대의 특검이나 현실의 법정에서 낱낱이 진술하는 것 또한 결코 옳은 일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실무책임자들이 DJ에게 모든 것을 미루는 태도도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의사결정에 관여한 실무책임자라면 당연히 책임질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이미 DJ가 자신의 책임임을 시인했는데도 박지원씨 등이 모두가 '내 탓이오'라고 나서는 것 또한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되겠는가.

그리고 책임의 범주를 좀더 확대시켜야 한다. 책임이라는 것이 그저 단순한 현실법정에서의 형사책임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진실 고백도 마찬가지이다. 꼭 수사기관이나 법정에 나가 진술하는 것만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이런 차원에서 이번 특검 관련 형사판결이 종결되면 이번 사건 관계자들은 조용하고도 진실되게 증언에 임해야 한다. 증언의 형태와 방식, 공개기관 등은 별도의 법으로 정하면 된다.

특검과 일부 언론은 장세동씨를 들먹이며 박지원씨가 그저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뒤집어 써 주길 기대했다. 박지원씨는 일부 측면에서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이야기했고, 국익과 관련된 일부 측면에서는 그런 기대에 '배반'하면서 진술을 거부했다.

박지원씨와 장세동씨는 다르다. 사람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고, 충성의 대상도 다르고, 충성 행위도 달랐다. 제대로 비교하려면 충성의 대상 및 결과와 충성행위의 구체적인 질적 측면까지도 살펴야 한다.

특검과 일부 언론은 장세동씨와 박지원씨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남북정상회담 관련 행위의 순수성에 먹칠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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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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