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보(1503-1557)는 15세에 조광조의 제자가 되었으며 화순 능주로 유배되고 죽은 스승의 장례를 손수 치른 때가 나이 17세였다. 짧은 2년이 맺어준 인연과 깨달음은 그의 평생을 지배했다. 스승의 장례를 치른 후 현재의 소쇄원이 있는 고향인 담양의 창암촌에 돌아온 양산보는 다시는 세상의 명리(名利)를 좇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오직 소쇄원만을 경영하며 살았다.
소쇄원은 세상사람들이 '정원'이 주는 일반의 의미에 따라 오해하기 쉬운 단순한 은둔처이거나 음풍농월의 장소가 아니다. 또한 지금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민간정원'으로 그 의미를 가두어 한정할 수도 없다. 그곳은 개혁의 이상을 좇아 한 시대를 풍미한, 죽음에까지 이른 스승의 길에 함께 한 한 청년의 좌절과 고뇌를 묻은 곳이요, 이루지 못한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수신(修身)하며, 세상을 밝힐 인재를 구하고 기른 아카데미였다.
그는 글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의(義)를 구하지 않는 세상에 날개를 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강론하고 토론할 때는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당대 조선의 석학, 문인들로 '소쇄원 48영'을 지은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등과 교유하였으며 수많은 후학들을 길렀다.
건축적인 면에서도 소쇄원은 빼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일본의 '정원(庭園)'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가둔 인공적 미(美)를 추구한다면 '소쇄원'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곳에 튀지 않게 자리하며 자연미를 추구하는 우리 전통의 원림(園林)이라 할 수 있다.
소쇄원(瀟灑園)의 소(瀟)는 '빗소리 소, 혹은 물 맑고 깊을 소'이고 쇄(灑)는 '물 뿌릴 쇄나 깨끗할 쇄'의 뜻을 갖는다. 풀어 쓰면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한 원림'이라는 뜻이다.
소쇄원의 대표적인 구조물로는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霽月堂), 대봉대(待鳳臺), 오곡문(五曲門) 등이 있다. 양산보가 광풍각과 제월당의 이름을 붙인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주무숙이라는 사람의 인물됨을 이야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며, 오곡문은 조선 선비들의 이상향이자 주자(주희)가 학문을 닦았던 중국 복건성 무이산 계곡의 무이구곡 중 제5곡에서 따온 것이다.
대봉대는 스승 조광조와 같은 시대를 구원할 봉황이 나타나 주기를 희구하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 서린 명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손자 양천운이 남긴 글에서 그의 삶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아 이제 영원히 가셔 못 오시니 다시 여쭐 말이 없구나! . 비록 허술한 울타리 안에 사셔도 항상 즐거움이 샘물 흐르듯하셨고, 궁색한 밭도랑을 거니시다! 넘어져도 오히려 낙으로 아시었다.
금이 가서 방울방울 새는 항아리를 당겨 자작하셨고, 조용한 물가를 거닐 때면 물속의 고기들도 사람을 알아보고 반기었다 하니 외로움을 모르셨다. 그런가 하면 틈만 나면 자식들을 무릎 밑에 앉혀 놓고, 의리의 중함과 오묘함을 가르치며 세상일에는 털끝만한 미련도 두지 않던 어른.
어느 하나 시의 대상이 아니던 것이 없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자연을 손수 가꾸어 이 동산에 영원히 살아 계시니,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참된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는 듯하다."
정말로 멋진 건축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사람들에게 소쇄원은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곳에서는 '건축'이 아닌 '정신'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자연을 너그럽게 바라볼 줄 알고 그곳에 번잡스럽지 않고, 그윽하게 함께 자리한 여유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곳보다 깊은 운치를 느낄 만한 곳이 아닐까 싶다.
승용차로 동 광주인터체인지에서 담양 고서를 거쳐 광주 댐 방면으로 30분 달리면 넉넉한 거리에 있다.
소쇄원 인근에 가볼 만한 곳은 가사문화권 유적이라 지칭되는 면앙정, 식영정, 환벽당, 송강정, 독수정 등이 모두 30-40분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