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1636년 병자호란에 강화도로 피난한 왕자와 비빈들을 구하기 위해 강화도로 갔다가 섬이 함락되어 모두가 붙들려간 뒤라 어쩔 수 없이 돌아오던 중 인조(仁祖)가 삼전도(三前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개만도 못한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에 울분을 참지 못한 그는 세상을 아예 등지기 위해 뱃머리를 돌려 탐라(제주도)로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나 보길도의 황원포에 닻을 내렸다가 그곳의 황홀한 절경에 반하여 정착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로부터 여든 다섯 살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열 일곱 차례나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그곳에다 정원을 꾸며 놓고 환락을 즐기면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보길도는 고산의 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 그의 손길과 발자취가 남아 있고 짙은 체취를 느끼게 된다. 섬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고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하여 그를 마치 이 땅에 내려왔다가 사라진 신선쯤으로 여기며 자랐고 흩어진 유적들은 관광의 대상이 되어 중요한 수입원이 되고 있다.
보길도의 청별 선착장에 내려 차로 15분 정도 안으로 들어가면 보길도 부용동 유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세연지(洗然池)에 도착하게 된다.
서울 창덕궁의 비원, 전남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정원으로 손꼽힐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이곳은 바로 국문학사상 최고의 시조로 평가되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산실이기도 하다.
세연지는 계곡을 판석(板石)으로 막은 인공연못으로 전체의 넓이가 3000여 평에 이른다. 그 속에 일곱 개의 큰 바위를 배치해 놓고 그 사이에 배를 띄워 노를 저으며 유흥을 즐겼는데 동서 양쪽에 쌓은 축대와 넓적한 바위 위에서는 무희들이 춤을 추고 악사들이 앉아 풍악을 울렸다.
또 남동쪽 산봉우리에 위치한 옥소대(玉簫臺)에서도 악기를 연주하고 무희들이 춤을 추었는데 그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어 선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관광차 이곳을 찾은 이들은 신선이 따로 없었던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감탄을 연발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나 고산의 유희가 흔히들 생각하는 질탕한 환락의 세계는 아니었다.
그는 격자봉이 굽이쳐 내려온 언덕 아래 낙서제(樂書齊)를 짓고 당시의 선비들이 이상향으로 삼았던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재현하려 했고 모든 구조물에다 철학적 근거와 격조를 부여하였으며 의학, 복서, 지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학문은 다른 사람이 이를 수 없는 심오한 경지를 이루었다.
고산의 6대손인 '윤위'가 쓴 보길도지(甫吉島識)에 의하면 "일기가 청화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학관(고산의 여섯째)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하고 기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서 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옥소암에서 춤을 추게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은 연못 속에 비친 그림자로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7개의 바위)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 서도 양도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야 무민당에 들어왔다."
낙서제에서 건너다 보이는 산 중턱에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있다. 동천은 신선이 기거하는 곳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 저녁 무렵 차를 끓이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모양은 석실모연(石室暮烟)이라 하여 '부용동 팔경' 중의 하나로 읊어지고 있는데 이곳에서 산 아래까지 밧줄을 매고 도르래를 이용하여 음식을 날라 올렸다고 한다.
낙서제 뒤편의 소은병(小隱屛)은 높이 2.5미터 정도의 바위인데 그 위에는 인공으로 파낸 20센티미터의 홈이 있고 술을 담아 바가지를 띄워놓고 마시며 주변의 경치를 감상했다고 한다.
'소은병'이란 명칭은 주자의 무이구곡 중 제5곡에 있는 대은봉(大隱峯) 맞은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학문과 문학을 하는 본거지로 삼았던 낙서재를 비롯한 주위의 무민당(無悶堂) 등은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어느 민간인의 묘 한 쌍이 들어앉아 세월의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고산은 평생 동안 정치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상대적 열세였던 남인의 가문에서 태어난 한계로 인하여 20년의 관직생활 외에는 19년의 유배와 긴 은둔생활로 일생을 보낸 불운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름난 부자였던 가문의 재력을 바탕으로 보길도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었고 걸출한 문학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앞바다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띠워라 배 띠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고지 먼 빛이 더욱 좋다.
– 어부사시사중 봄노래 –
보길도로 가는 뱃길은 해남 땅끝(갈두)에서 50분, 완도 화흥포 항에서 타면 1시간 거리이다. 섬을 뒤덮은 상록수와 활엽수림이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검은 자갈로 유명한 예송리 해변의 상록수림,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운 모래사장으로 알려진 중리해수욕장, 제주로 귀양가던 송시열이 잠시 들렀다가 쓴 탄시가가 새겨진 '송시열 글쓴바위'등을 찾아볼 만하다. 거기에 전복회에다 소주 한 잔 하고 아침에 전복죽으로 속 풀면 그게 바로 신선의 삶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