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고해(苦海)임이 분명하고, 사람은 그 고통 혹은 욕망의 바다 위에 표류하는 작은 조각배 신세에 불과하다. 인간은 막막한 존재의 심연에서 스스로 희망을 길어 올리기에는 너무도 힘이 부친다. 미륵보살은 그런 고통과 번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에게 자비로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지난날 석가모니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미륵은 스승으로부터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다. 그는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지 56억 7000만년이 지난 후 사바세계에 나와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3회의 설법(龍華三會)을 통해 석가모니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교화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르면 ‘스스로 수행하고 공덕을 쌓은 이는 도솔천에 왕생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上生信仰)’는 것이나 모든 이들이 수행을 통해 그리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미륵의 하생(下生)을 통해 스스로 번뇌를 끊지 못한 이들이 모두 구제받는다(下生信仰)는 것이다.
미래에, 어쩌면 자신이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미륵이 출현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고통받는 개인과 집단, 계층에게는 가슴이 요동치는 전율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 초기에 전래된 미륵신앙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메시아 사상처럼 변화를 갈망했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은‘희망’의 대명사였다. 이를 이용하여 신라의 화랑, 후삼국 시대의 궁예와 견훤, 조선의 요승 여환 등이 미륵을 자칭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획득하려 하였고 동학농민군 또한 고창 선운산의 미륵속에 숨겨진 비결(秘訣)을 얻었다 하여 민심의 흐름에서 심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전북 김제의 금산사(金山寺)는 미륵신앙의 본산이다.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창건되어 1,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은 미륵보살이 주존불이며 각 곳의 유적은 미륵신앙의 도량임을 확인케 한다.
금산사의 대웅전이라 할 국보 제62호 미륵전은 우리나라 유일의 3층법당으로 내부에 들어가 보면 3층이 모두 하나로 트여 있고, 동양에서 가장 큰 높이인 11.82미터의 장대한 미륵입상과 좌우로는 협시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이곳의 3개 층에는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는데 모두 미륵도량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3층은 미륵전,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용화수 아래의 설법),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미륵은 ‘자씨보살’로도 불리기 때문)으로 되어 있다.
미륵전을 마주 바라보는 왼쪽 위편으로 모악산의 줄기가 흘려 내려 멈춘 곳에는 ‘송대’라 불리는 넓은 터가 있는데, 2층의 넓은 석단과 그 위에 봉안된 사리탑 등 석조물 전체를 ‘금산사 석종’이라 부른다.
이곳은 성스러운 장소로 예로부터 ‘방등계단’이라 하여 이곳에서 수계를 행하였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미륵의 뜻을 받들어 스님은 물론 일반 사부대중의 수계의식까지 치러지고 있다.
방등계단 각 층계마다의 부조들과 다수의 석인상들은 고대 인도 불교의 석조물을 만난 것 같은 독특한 미감을 전하는데, 이는 천사백 년 동안 각기 다른 시대적 양식이 혼입된 두터운 세월의 퇴적에서 비롯한다.
금산사는 모든 이들을 넉넉히 품에 안을 듯 너른 마당을 두고 있다. 그 가장자리를 따라 배치된 법당들은 평지에서 급하게 치켜 올라간 모악산의 기세를 상쇄하려는 듯 장중하고 차분한데, 지붕의 선들에선 중생들의 업보와 번뇌를 어깨에 걸머진 것 같은 무거움이 느껴진다.
때마침 점심때가 되어서 경내에 있는 식당을 기웃거리다 관광객 주제에 점심공양 준비로 바쁜 행자승에게 염치불구하고 밥 좀 얻어먹을 수 있는지 물었더니 “맛있게만 드십시오”
그 짤막한 한 마디에 오금이 저려 온다.
요즘 어디에서 공짜로 밥 한 그릇 얻어먹기가 쉬운 세상인가. 여러 나물에 고추장을 쓱쓱 비벼서 먹는 그 맛은 정말 산해진미에 비할 바 아닌데, 천마디 경전의 말씀 보다 내 뱃속에 밥을 넣어주니 미륵의 가르침이 단박에 깨우쳐 지는 듯 하다. 공덕이란 게 별스런 것이 아닌, 서로 나누고 주린 배를 채워 주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김제, 만경평야에서 갑자기 우뚝 솟아 오른 산세 때문인지 모악산은 예부터 이 지역 사람들에게 외경의 대상이었고 더불어 금산사 미륵신앙의 영향으로 수많은 종교단체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은 “내가 금산사의 미륵이니 죽은 뒤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로 오라” 하였는데 인근에는 그가 도통한 9년 동안 천지공사를 한‘동곡약방’이 있다.
가까이에는 한때 금산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컸던 귀신사(歸信寺)가 있고 모두가 평등한 혁명적 대동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의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며 기거하였던 집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