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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9일) 우체국 집배원이 갖다 준 우편물 속에 '등기'도 하나 있었다. 발신인 란에 'KAIST 한국과학기술원/학생처 학생지원팀'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서류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한국과학기술원장의 직인이 찍혀 있는 공문 한 장이었다.
공문의 제목은 <'예비박사 외아들 잃은 조동길 교수의 슬픔' 민원에 대한 회신>으로 되어 있었다. 정중한 인사와 함께 "귀하께서 2003. 6. 30일자로 제기하신 민원 사항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회신합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로서는 전혀 뜻밖의 공문이었다. 공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고 났을 때는 솔직히 말해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내가 한국과학기술원 당국에 직접적으로 민원을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6월 21일 저녁의 대전MBC 보도를 접하고, 또 며칠 후 대전MBC 홈 게시판에 들어가 봇물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사건 관련 글들과 조동길 교수의 글을 읽은 다음 내 느낌과 생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인터넷 상에 올렸을 뿐이었다.
그 글을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중간 제목들을 넣고 편집 처리하여 메인 화면의 톱기사로 올린 덕에 수만 명이 읽었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이들이 그 글을 여기저기로 퍼 나른 것을 직간접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 글을 읽은 한국과학기술원 당국이 민원 회신 형식의 공문을 내게 보내온 것인데, 나는 그 공문 내용에서 자발적 '성의'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그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이고, 또 많은 이들이 후속 기사를 기대하는 상황이니, 여기에서 우선 한국과학기술원의 그 공문 내용을 공개할 필요를 느낀다. 어쩌면 카이스트 당국은 자신들의 방침과 노력이 널리 알려져서 사회의 관심이 어떤 이해의 선에 도달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 | 회신 내용 | | | | (1)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에 대한 입장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해 경찰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가스안전공사 등에 사건과 관련된 상세한 자문 절차를 구하였고, 수 차례의 보강 수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다소 수사 기간이 소요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경찰조사가 마무리되어 2003년 7월 7일부로 검찰에 정식으로 송치된 상태입니다. KAIST에서는 검찰의 수사 결과와 법적 판결 결과에 따라 책임이 있는 사건 당사자와 사건에 대한 조치가 있을 예정입니다.
(2) 이공계 발전을 위한 기념 추모사업
기념 추모사업은 유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노력할 것이며, 이번 사건을 교훈 삼아 안전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세세히 점검하여 또다시 이러한 불행한 일이 없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끝. | | | | | | 공문 회신 내용 1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던 일이다. 진상 규명에는 책임자 처벌 범위가 결부될 수밖에 없으니, 경찰 수사는 그만큼 철저하고 신중해야 함을 모르지 않는다. 자연 시일도 많이 걸리고 여러 가지 과정과 절차도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경찰의 수사 태도다. 사건의 진상 규명에 얼마나 충실히 도달하느냐가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확실한 진상 규명을 위해, 철저하고도 완벽한 수사를 위해 그렇게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면 아무도 군소리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혹여 축소 은폐 의지가 알게 모르게 한구석에서 작용을 하고, 책임자 처벌 범위 문제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차원에서 경찰이 수사를 벌인 흔적이라도 나타나거나 의심의 여지가 존재하게 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이것은 단순한 기우일 수도 있고, 특수 수사의 경우 매사가 명쾌하지 못한 우리네 풍토로부터 연유하는 불신과 염려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제 공은 검찰로 넘어간 상태다. 모든 의지와 판단은 검찰에 달려 있다. 경찰이 넘겨준 보따리를 면밀히 파악 분석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강 수사를 벌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릇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는 사회 기강과 정의의 맥이 닿아 있어야 한다. 검찰의 판단에는, 이번 일을 계기로 그 같은 불행한 일이 카이스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이공계 대학들의 실험실에서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 조정훈 연구원의 유족들은 진상 규명과 그 진상 규명 속에 깃들이게 될 재발 방지를 위한 획기적인 대책 쪽에 관심의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진상 규명과 함께 책임자 처벌 문제가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마무리된다면, 수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카이스트 고위 당국자들의 요구대로 책임자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써준 그 성품대로, 고 조정훈 연구원의 아버지 조동길 교수는 탄원서의 효과를 위해 몸으로 뛰기까지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카이스트 공문 회신 내용의 2항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공계 발전을 위한 기념 추모사업'이라는 2항의 제목부터 각별한 느낌을 준다. 유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추모 사업이 마련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고 조정훈 연구원의 가족들이 애초 '추모 사업'을 요구했던 것은, 단순히 꽃다운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추모 사업을 통해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들의 실험실에서 그 같은 어처구니없는 폭발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할 방책을 함께 마련해 가자는 의지가 주요 동인이었다. 그것만이 아들의 죽음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지난번 글 '예비박사 외아들 잃은 조동길 교수의 슬픔'을 올리고 나서 수많은 '독자의견'들을 살펴보며 필자는 놀랍고도 참담한 심경을 경험했다.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들의 실험실 풍경을 한눈에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이공계 대학들의 실험실 조건은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는 그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독자의견들 중에서 '저도 매일 두렵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글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군요.
저 역시 실험실에서 15명의 연구생들과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실험실에는 가스통(봄베)이 정확히 28개가 있습니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기기 옆에 가지런히 있지요. 그것들을 볼 때마다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중 하나만 사고가 일어나도 연구원생들과 특히 학생들이 수업 중이라면 대형 사고가 일어나겠지요. 이것이 많은 이공계 대학의 현실입니다.
가스통은 실험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폭발하더라도 아무 영향이 없는 철제 박스 안에 보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돈을 들여 안전하게 하려고 해도 아무렇게나 지어진 실험실과 건물들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어떻게 조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미련한 얘긴 줄은 알지만, 조 교수님의 아픈 마음을 십분 헤아려 다시는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구조 개선이 되었으면 합니다.
26살에 kaist에서 박사 공부를 했다면 이 나라 과학 분야의 얼마나 큰 동량이 될지…. 저도 대학가는 자식을 둔 아버지의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조동길 교수는 아들의 죽음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들의 현실을 감지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들을 잃은 그 참혹한 슬픔 속에서도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을 생각했던 것 같다. 실험실에서 불의의 폭발 사고로 아들이 목숨을 잃은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집합체인 카이스트를 비롯하여 모든 이공계 대학들의 실험실이 개선의 길로 나아가게 되기를 그는 강력히 희망했다.
조동길 교수와 유족들의 그 희망을 우리 사회가 힘껏 감싸주고 힘을 보태주어야 한다. 고 조정훈 연구원의 희생을 계기로 연구 실험실의 구조적 모순과 열악함으로 말미암은 폭발사고가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들의 연구 실험실에서 또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방책을 정부와 대학들과 사회에 강력히 요구하며 계속적으로 '주의 환기'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아까운 연구원의 목숨을 앗아가고 또 한 명의 연구원을 불구로 만든 카이스트 제트 실험실 폭발사고는 철저히 진상이 규명되고 그 진상 규명에 따라 책임자 처벌 문제가 매듭지어져야 하지만, 그것에는 어디까지나 사회 기강과 정의의 맥이 닿아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우리나라 이공계의 진정한 발전을 꾀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야 한다.
실험실에서 연구 실험 중에 목숨을 잃은 고 조정훈 연구원의 추모 사업에는 우리나라 이공계의 진정한 발전 방향이 걸려 있다. 그 추모 사업이 우리나라 이공계 발전의 촉매 역할을 하는 상황만이 고 조정훈 연구원의 넋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슬픔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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