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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 이 더운 여름에, 젊은 대학생들이 맑스 원전을 직접 읽는다? '집중맑스과정(IMP)'이라는 이색적인 기획을 한 곳은 바로 성균관대학교 김귀정 생활도서관.

장맛비가 내리는 9일 오후 기자는 '김귀정 생활도서관'을 찾았다. 이곳은 세련된 현대식 건물인 600주년 기념관 길 건너 편에 기념관과는 대조적으로 낡고 오래된 듯한 학생회관 4층에 위치해 있다. 퀴퀴한 학생회관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악기 연습 소리와 노랫소리, 열띤 토론하는 소리 등이 뒤범벅이 된 소음 속에 계단을 올랐다.

찾기 어려울 것도 없었다. 4층에 오르니 바로 보이는 중앙 벽에 김귀정 열사의 커다란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단아하지만 강기 있어 보이는 열사의 모습. 김귀정 생활도서관이라는 문패는 오히려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장서 특유의 냄새가 기자를 반겼다. 10여평도 채 안 되는 협소한 공간에 삼천여권의 장서를 빽빽이 비치한 모습이 마치, 힘겹게 대학 내에서 명맥을 잇는 인문사회과학의 현실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듯하다.

▲ 고 김귀정 학생
김귀정 생활도서관은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해 목숨을 바친 김귀정 열사의 뜻을 기리고자 지난 1998년 개관했다. 김귀정 열사는 성균관대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1991년 5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다가 '백골단'의 과잉 시위진압으로 짧은 생을 마쳤다.

집중맑스과정(Intensive Marx Program)이라는 명칭은 학내 성균어학원의 '집중영어과정(Intensive English Program)'에서 따온 것. 정성필 생활도서관장은 "'IEP만 가지 말고 IMP에 오라'는 뜻으로, 취업을 위한 관문으로 전락한 대학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패러디한 것"이라고 밝혔다.

IMP 참가자들은 오는 14일부터 8월 말까지 <맑스-엥겔스 저작 선집 1권>과 관련 서적들을 읽고 토론하며 삼복 더위를 이겨낼 예정이다.

왜 하필 '맑스 원전'인가

"맑스 원전을 한번도 제대로 읽지 않고서 맑스주의의 위기와 문제점을 이야기하거나 폐기해 버리는 것, 그리고 '자의적으로 해석된 맑스주의'가 난무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IMP를 기획하게 됐다."

정성필씨의 말이다. "물론 쉽게 공부하려면 개론서나 해설서를 보는 것이 편하겠지만" 맑스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전을 개개인이 직접 읽고 느껴야 한다는 뜻. 정씨는 이에 "세미나만큼은 정도(正道)를 걷는 게 옳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였다.

인문사회과학의 무수한 갈래 중에서 유독 맑시즘을 택한 이유 역시, "정도를 걷겠다"는 이들의 옹골찬 생각과 닿아 있다. "'맑스주의'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거부감을 느낀다. 일종의 조직화된 운동 논리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해 주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즉 맑스주의가 근대와 함께 등장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전면적 비판과 극복을 지향하며 탄생했다는 점에서, 이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는 말이다.

교재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박종철출판사, 1992)은 맑스주의를 공부하자면 반드시 봐야 할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저작들이 실려 있는 책이다. 이번 IMP에서는 <맑스-엥겔스 저작 선집 1권>을 12회 내지 14회에 걸쳐 모두 읽을 예정. 정성필 관장은 "하루 몇 십 장씩 족히 두 시간은 공부해야 하는 강행군"이라고 말했다.

총 6권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은 대학가의 사회과학 서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이 중 선집 1권은 현재 12쇄 까지 약 1만권 가량 팔린 사회과학계의 스테디셀러. 박종철출판사는 지난 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해 숨짐으로써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열사의 뜻을 이어가고자 90년 설립됐다.

정성필 관장은 "IMP를 통해 참가자들이 맑스가 어떻게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는지, 그 문제의식은 무엇인지 등을 배움으로써, 인간이 시대와 역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김귀정 생활도서관의 기본 운영 방향인 "실천적 학술운동을 실현하고 상호 이해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뜻밖의 좋은 반응

김귀정 생활도서관 측이 당초 예상했던 참가인원은 십여명 선. 지난 1학기 사업에서 나타난 학생들의 호응도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신청 인원은 두 배 가량 많은 스무명 정도. 때문에 생활도서관 측은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는 것.

▲ 성균관대학교 생활도서관 내부
ⓒ 성대 생활도서관
사실 이 정도 인원이면 인문사회과학과 학내 자치활동 등에 무관심한 요즘 대학가에서 적지 않은 숫자다. 아직 참가 여부를 망설이고 있지만 문의 전화를 걸어오는 일반인들, 타 대학생들도 여럿 있다고 한다. 기자가 취재를 하는 도중에도 연세대 등 타 대학의 문의 메일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 세미나에 참가 신청한 인문과학 계열 03학번 손정민씨는 "맑스주의를 단순히 현대 자본주의와 배치되는 정도로만 이해해 왔는데 이젠 직접 원전을 읽으며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고 참가 동기를 밝혔다. 손씨는 "진정한 고등교육을 받는 대학생이라면 지성인으로서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지녀야 하는데 현재의 대학생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덧붙였다.

"말 그대로 맑스는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시대에 그의 이론을 무조건 적용할 수 없지만, 그의 사상체계가 현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볼 때 한번 제대로 읽어보고 싶단 생각을 해왔다."

또 다른 참가자 경제학과 97학번 이홍석씨의 말이다.

현재 생활도서관 운영위원들은 '예상 외의 많은 인원'을 데리고 어떻게 세미나를 꾸릴 것인가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비록 학교와 총학생회 측에서 세미나 공간을 제공해 주지도, 세미나 사업비를 지원해 주지도 않지만, 이들은 "자비를 털어서라도"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마치겠다는 각오다.

IMP가 인문사회과학을 살리는 씨앗이 되길

정성필 관장은 "IMP를 통해 대학 내 학회활동이 활성화되고, 죽어가는 인문사회과학이 되살아 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학생운동이 대학 사회의 공감대를 널리 형성했고 그에 따라 인문사회과학 세미나와 학회 활동 역시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최근 '학생운동의 위기'로 참여 인원이 줄고, 또한 고학년이 될수록 학점관리와 취업 준비에 전념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요즘엔 1,2학년 위주로 세미나가 이뤄지고 있다.

"본교만 하더라도 전일제 수업 등으로 인해 저녁 시간에도 세미나 할 시간 내기가 어렵다"고 정씨는 말했다. 그는 이러한 대학가의 무관심한 세태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가속화되는 대학 사회의 변질"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때문에 김귀정 생활도서관 측은 이번 1기 IMP 세미나를 시작으로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어 이후 참가자들의 소모임이 활성화되고, IMP가 아닌 다른 세미나에도 파급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11번째 테제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자의 눈엔 김귀정 생활도서관의 IMP 세미나가 그 '혁명적 실천'의 첫 걸음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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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호의 기자만들기> 18기 김윤정입니다. 강의를 듣고 시민기자로 활동하지 않는다면 제 자신에게 부끄러울 것 같아 등록합니다. 기사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르포나 인터뷰를 하고 싶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곳, 주변 사람들의 소소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등을 찾아 기사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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