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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 유진시장 안에는 '기차표 파는 곳'이 있다. "어, 참 이상하네? 이 시장 안에서 무슨 기차표를 판다는 말인가?" 돈암동 아리랑 고개 '집단점성가촌' 앞에 땡땡 거리가 있었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그럴 리가 없다. 금시초문이다.

3년전 신혼 살림집을 꾸렸을 때 아내와 같이 들렀던 동네 시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분명 경의선은 서울역-모래내-수색-화전으로 이어져 신의주까지 가는데 이곳에서 기차표를 팔 턱이 없다. 가까이 가 보았다.

‘그럼 그렇지!’ 신발 가게였다. 그 까만 고무신을 팔던 곳. 어릴 적 나와 함께 그 먼 흙 길을 함께 했던 까만 고무신 말이다.

고무신은 흙과 함께 살아간다. 제 발에 꼭 맞는 신을 신어도 모래가루 몇 조각 들어오는 걸로 끝내지 않는다. 어느새 신발 주인의 발바닥에 살며시 스며들어 한 몸으로 살아간다. 검은 흙과 까만 고무신이 만나 새까맣게 발바닥을 물들였다. 그러니 발을 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뿐인가? 고무신은 물을 달고 산다. 나일론 양말을 신으면 미끌미끌하니 벗어 던지는 게 상책이었다. 맨발로 돌부리 널려있는 신작로를 걷고, 논둑 길을 걷고 밭으로 간다. 꼴 베러 갈 때나 학교 갈 때도 까만 고무신이었다. 그러니 신발에 물기가 가득했다. 발바닥 땀도 거들므로 헛디뎠다가는“찌익” 미끄러져 벗겨지고 만다. 수로가 옆에 있으면 신을 다시 신고 선 채 발을 담가 “철~철~철” 흔들어 주면 “뽀드득” 소리가 나 오히려 걷기에 편했다.

몇 날 며칠이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므로 발가락 사이는 발새가 가실 일이 없었다. 여름철에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호박고지 널었던 동구 밖 마당바위에 가면 곶감 꽃과 비슷한 푸르스름한 회색 마른 돌이끼가 있다.

꼴 베러 갈 때 그곳을 지나치면 이끼를 한 움큼 “득득” 긁어서 신발에 넣고 물을 한 모금씩 뿌려서 서너 시간쯤 신고 다닌다. 온통 발바닥이 봉숭아물을 들인 것처럼 불그스름해서 보기에도 참 좋았다. 여름철에는 연례행사처럼 빠뜨리지 않았다.

양말 기워 신고, 헤진 옷도 깁고 또 꿰매 입던 시절이라 신발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어 달 다니다보면 고무가 삭기 시작한다. 뾰족한 나무 등걸에 공격 한 번 당하면 “툭-” 찢어지고 만다. 칡넝쿨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칭칭 동여 메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꿰매주셨다.

이런 상태로 한동안 신고 다니던 동네 악동들은 비 오는 날 서너 명이 어른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작업에 들어간다. 신발 찢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살며시 파열구를 내고 조금씩 야금야금 찢어 나간다. 하루에 그 일을 다 했다가는 어른께 야단맞기 십상이다. 시간 날 때마다 모여 그 짓을 해댔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아버지께서는 장에 가셔서 조막 만하고 윤기 철철 넘치는 까만 고무신을 사다 주셨다.(나는 지금도 240mm 신발을 산다.) 약간은 안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그 신발은 ‘기차표’이거나 ‘타이어표’였다. 보자기 짐을 풀자 얼른 발에 맞춰보고는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며 고샅을 빠져나가 동네 앞에서 아이들에게 자랑한다.

“야, 규환이 너 새 신 신었구나!”
“응, 울 아부지가 사주셨어.”
“이리 좀 와봐 이쁜가 보게.”
“됐어야. 이건 밟으면 안 돼.”
“아따 이리 와봐~”
“참말로 안 된다 했다!”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발가락까지 밟히고 말았다. 신발을 사면 우린 어김없이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빈한한 집에서 살아 선지 나는 흰 고무신으로 업그레이드되지 못하고 운동화로 직결하였다. 서울 공장에 다니던 큰형이 사서 보내준 운동화로 진보한 것이다.

비만 오면 고샅 물길에 모여 신발을 뒤집어 배를 만들어 추억을 실어 떠내려보냈다. 큰 도랑으로 흘러가 애를 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발 잃어버린 꿈을 꾸면 집안에 소가 죽던가 누구 중 한 명이 크게 아프기도 했던 그 까만 고무신. 앞쪽에 뾰족한 코가 붙은 여자 신발은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는 지금도 시골에 가면 고무신이 편하다. 그대여, 검정고무신 질질 끌고 다녀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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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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