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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내 아내와는 20여 년 전, 신학교 선후배로 만나 2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막상 결혼을 했지만 나는 거의 실업자 수준이었다. 아내는 직장을 다녔다. 우리는 잠실 새마을 시장 근처 이층집의 부엌달린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나는 고 3때 교회 종탑공사를 하는데 일을 도우러 올라갔다 떨어진 이후로 높은 데 올라가면 고소공포증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살던 2층집은 철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발자국 소리도 요란하고 철계단이 심하게 흔들려 처음에는 올라갈 적마다 식은땀이 났다.

거의 1년 동안 하릴없이 구들장 신세를 졌다. 아내는 회사에 나가고 나는 멀건이 집에 남아 시간만 축내고 지냈다. 목회를 나가야 하겠는데 오라는 교회가 없었다. 하루 종일 책만 보았다. 주로 소설책하고 시집을 많이 읽었다. 그때 읽은 책 가운데 황석영의 <장길산>이라는 대하소설이 있었다. 그 시절, 박경리의 <토지>와 황석영의 <장길산>의 재밌게 읽었다.

<장길산>을 읽는 중에 가끔 황포 돛단배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아딧줄’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자주 소개되고 있었다. ‘아딧줄’은 황포 돛단배의 방향을 잡아주는 밧줄이었다. ‘아딧줄’을 당겨주거나 늦추어서 배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어 있다. 나는 ‘아딧줄’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 시절 시대상황은, 군부독재 정권이 최악의 발악을 하던 시기였다. 매우 암울했다.

ⓒ 느릿느릿 박철
미래의 전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난기류 같은 시대 분위기였다. 회사에서 퇴근을 하고 온 아내에게 ‘아딧줄’ 얘기를 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아딧줄’로 하자고 제안을 했다. 아내도 <장길산>을 다 읽고 나서 선뜻 그렇게 하기로 하고, 우리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그러니 아들만 낳으면 무조건 이름이 ‘아딧줄’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내가 몸이 약해 두 번 유산을 했다. 아내는 두 번 큰일을 겪고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결혼한 지 1년 후 우리 내외는 강원도 정선에서 목회의 첫발을 내디뎠다. 아내는 하느님의 은혜로 아이를 갖게 되었고, 새벽마다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마침내 건강한 사내아이를 자연분만 했다. 그때 아내 나이가 33살이었다. 너무나 기뻤다. 당연히 아이 이름은 ‘아딧줄’이었다.

그런데 집안 양가 어른들이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박아딧줄이 뭐냐? 그냥 박아지줄 이라고 해라” 그러면서 단단히 화가 나셨다. 우리 집안 장손이 아니겠는가? 그만큼 기대가 크셨다. 장인어른도 노발대발하신다. 장인어른은 경북 영주가 고향이신데, 집안이 훈장집안이요, 한학을 하신 분이어서 한글 이름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법적 출생신고가 이틀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고민이었다. 계속 ‘아딧줄’로 밀고 나가느냐? 아니면 집안의 화목을 위해 이름을 다시 지어야 하는가? 하는 수 없이 집안의 화목을 선택하기로 했다.

(詩)내 아들 이름은 박아딧줄


내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이름은 오늘부터 박 아딧줄이란다
얼마나 근사한 이름이니 아버지가 지어 준 거야
나는 네가 장길산처럼 사내대장부가 되라고 그렇게 지었어
하느님이 만든 이 세상은 아름답다고
노래하기에는 너무 어둡구나
네 엄마하고 결혼했을 때부터 그러니까
네가 세상에 나오기 4년 전부터 네 이름을 지었지
아딧줄이라는 뜻은 황포 돛단배의 돛줄이야
아딧줄이 튼튼해야 배가 안정감을 가지고
이놈을 당기거나 늦추어서
가고 싶은 방향으로 달려갈 수 있는 거지
아딧줄은 생명줄이야 탄탄한 바람을 받기 위해서는
아딧줄이 끊어짐이 없이 튼튼해야 한단다
험한 세상을 이기고 힘차게 달려가라고 그렇게 지었어
네 이름에 불만이 없기를 바란다
네 할머니가 걱정하시는 것처럼
‘박아지줄’이라고 놀리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나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은
정말 자랑스러운 이름이란다 귀여운 내 아딧줄아.
(1988.10.20) / 아빠 박철.
책방에 가서 작명(作名) 책을 사다가 아내와 이틀 동안 방에 틀어박혀 씨름하며 이름을 지었다. 수백 개의 이름을 노트에 썼다 지웠다.

성(姓)이 ‘박’이어서 이름 짓기가 쉽지 않았다. 고심 끝에 호빈(澔彬)으로 지었다. 획을 따져보아도 운수대통할 이름이고 넓을 호(澔)에 빛날 빈(彬) 자이니, ‘넓게 빛을 발하라’ 얼마나 근사한가? 뜻도 좋고 부르기도 좋아 집안 어른들에게 여쭤보았다.

장인어른에게 부탁하면 잘 알아서 지어 주시겠지마는, 나는 내 자식 이름을 부모가 지어주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른들이 다 좋다고 하셨다. 장인어른이 “정말 자네가 지었냐?”고 하시며 이름 한번 잘 지었다고 칭찬해주셨다.

출생신고 마감일이 토요일이었다. 호적등본에 ‘호빈’이라고 이름을 올렸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내와 집에서는 그냥 ‘아딧줄’로 부르기로 했다. 호적에만 하는 수 없이 ‘호빈’이라고 올린 것이었다.

그 다음날이 주일이었다. 교회학교 어린이 설교를 마치고 광고시간인데, 어떤 아이가 손을 들더니 “전도사님요, 애기 이름 지었어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칠판에 백묵으로 크게 ‘박호빈’하고 쓴 다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한 녀석이 까르르하고 웃는다. 그러더니 다 따라 웃는다. 내가 “왜 웃냐고, 이름이 웃기냐?”고 물었더니 애들이 “전도사님요, 이름을 거꾸로 하니 빈호박이래요”하는 것이다.

아뿔사 ‘빈호박’이라고? 이틀 동안 고심 끝에 ‘박호빈’이라고 지었는데, 거꾸로 읽으면 ‘빈호박’이 된다는 사실을 아내도 나도 집안어른들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미 출생신고를 해서 호적등본에 ‘박호빈’으로 올렸으니 이제 어쩌란 말인가? 하는 수 없지.

그때부터 우리집 ‘아딧줄’은 ‘빈호박’이 되었다. 우리집 ‘아딧줄’이름의 내력을 아는 학교선생님은 출석부에도 이름을 ‘박아딧줄’로 적어 그렇게 불러주었다. 친구 녀석들은 ‘빈호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냥 ‘호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름 때문에 많이 놀림을 받았다.

그런데 신통방통하게 우리집 큰아들 ‘아딧줄’은, 자기 이름에 대하여 조금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고 한다. 애들이 이름을 갖고 놀려도 하나도 개의치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를 3번 옮기는 동안 학급 반장을 6번을 했다.

나는 여전히 ‘아딧줄’에 대해 신뢰가 깊다. 80년대 중반 미래의 전망이 안 보이던 시절, 이층 좁은 방에서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 <장길산>을 읽으며 앞으로 내가 살고자 했던 나의 삶의 정체성이 바로 ‘아딧줄’이었기 때문이었다.

ⓒ 느릿느릿 박철
나는 우리집 아딧줄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른다.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꿈대로 될지, 아니면 다르게 바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우리집 ‘아딧줄’이 자기 이름 그대로, 자기가 서 있는 삶의 모퉁이에서 이 사회의 방향을 인도해주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못난 아비의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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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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