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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와의 인터뷰를 작정하면서 고심을 했다. 이면우 시인에 대한 인터뷰는 이미 많이 나와 있기 때문이었다. 이문재 시인이 <문학동네>에 쓴 <내핍의 시학, 그 따뜻하고 서늘한>이라는 글을 읽었다. 문제는 이문재 시인의 글이 아니라 인터뷰 전문 웹 사이트 <퍼슨웹>에 실린 지영균씨의 <나의 아날로그식 삶- 보일러공 시인 이면우>이라는 글이었다. 장장 20 쪽이 넘는 그 기사는 그야말로 이면우 시인의 모든 것을 풀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리 예정된 질문지를 가져가는 대신 친구처럼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 가는 쪽으로 인터뷰 방향을 잡았다. 시인과 수인사를 나눈 다음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최종 학력이 중졸로 돼 있던데, 대전중학교 나오셨나요?
"아니에요. 충남중학교 나왔어요. 연보에 대전중학으로 나온 게 없어요. 다시 확인해보세요. 아, 그 양반이 대전중학교를 나왔어요. 그 양반이 고등학교 때 전 중학교를 다녔어요. 나이차이가 저하고 몇 살 납니다. 2년 차이 나요. 이렇게 돼요. 내가 고등학교를 안다닌 게 아니라 입학은 했어요. 입학은 하고 안다녔어요. 입학식은 하고 그냥 나오게 됐어요. 그때 아마 그분이 3학년이었을 거예요. 중학교를 나오고 보문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 당시에 나는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했던 거예요. 중학교 때 상을 많이 받았으니까 그 양반도 문예 장학생이었을 거예요."
그 양반이란 그가 인터넷 상에서 유일하게 방문하는 <장작불의 불땀처럼>이라는 사이트에서 '바냔나무'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는 옛 글쓰기의 도반을 이르는 말이다.
- 그런데 문예 장학생으로 합격했으면 학비 걱정은 없었을 텐데 왜 학교를 그만두었지요? 학교 다니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 같은 건 없었나요?
"부러움 같은 건 없었고요 다만 이런 걸 생각했어요. 말하자면 어릴 땐데… 구체적으로 사는 거 있잖아요. 돈 가지고 구체적인 일을 하고… 나는 그때부터 일을 잘했어요. 국민학교 다닐 때도 밥이며 빨래 같은 걸 하고 그랬어요. 우리 형제들이 죽 남자예요. 남자가 없으니까 누군가 여자노릇을 해야했어요. 내 나이가 그만하고 학교를 1년간 쉬는 중이니까 빨래나 밥 같은 걸 도우는 거죠. 어머니도 장사에 나서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 장사라는 게 이문이 많은 것이 아니고 그때 하던 빵장사라는 게 공장에서 빵을 받아다가 소매하는 점포에 넘겨주는 중간 도매상인데 이문이 아주 박해요. 그래서 온가족이 다 매달려야 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도 아버지도 다 매달리시는 거죠.
여자가 없으니까 내가 나이가 어렸지만, 겨우 12살 그 무렵이지만 밥도 하고 하는 숙성한 면이 있었어요. 그러고 생활을 하게 되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가령 시장에 두부 콩나물 사러가서 깎고… 또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하는 거 한마디로 영악한 데가 있는 소년이었어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어른들이 한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너는 나중에 먹고사는데 정말 걱정 없겄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똑 부러진 소년이었으니까. 아주 말이며 행동거지가 장사꾼이었어. 한 마디로! 뭐라 하냐… 그러니까 문학적인 그런 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고. 그냥 시골 변두리 소년이었어. 좀 쑥스럽지만… 이런 이야기했을 거예요. 머리는 좀 똑똑하다고 이야기했을 거예요. 남들이."
-혹시 중학교 때 쓴 시(詩) 중에서 생각나는 거 있어요?
"뭐 이런 거 있죠. '파도는 사흘을 울고 나흘을 자는 광인/ 항시 벌거숭이로 태양을 품는다'이런 식이죠. 그러니까 바다를 보지도 못했는데 상상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스운 거죠."
-중학교 때 좋아하던 시인이 있었나요?
"교과서에 있는 시를 읽은 거고 책은 중학교에 미군야전용 콘셋 막사에 책이 있었는데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그걸 거의 다 읽었어요. 과학전문서적 빼놓고, 교양서적이니까 다 읽겠다 하는 계획을 세우고 1학년 2학년 때 마구 읽었어요. 하루에 300페이지에서 두 권 정도 까지 읽어내요. 밤 9시까지… 그런 정도의 속독으로. 지적 호기심이 강렬했어요. 그 때는 시를 쓰는데 관념적인 시가 주를 이루었던 때였지만 내 자신은 이런 걸 생각했어요.
어떤 원로시인중에 볼트 너트 같은 걸 모으고 시를 쓰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누군지는 모르고… 성찬경인가… 그 분이 볼트 너트에 집착하는 것처럼 나도 구체적인 거, 사물과 삶이 확실하게 유지되어 맞물려 가는 것에 눈을 떴는가 봐요. 사물에 마음을 열었던 거죠. 담임선생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구체적인 분이에요. 늘 우리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분이 나한테 중요한 이야기를 한거예요. '시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다. 기술에 비하면 장난 같은 거다'라고요."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하셨네요?
"아니에요. 그분이 진짜 나한테 중요한 이야기를 하신거예요. 기술과 시를 놓고 본다면 기술이 우선이죠. 안 그렇게 생각하세요? 기술이 우선이죠. 그리고 이런 거 있죠? 기능을 생각해 봅시다. 가령 우리가 명창이라든가 고수를 볼 때에 그들은 선생님으로 기능적인 면을 전수받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을 통해서 기술을 전수 받는 거죠?
그런데 시는 말하자면 시는 어떤 관념에서 관념으로 건너가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새로 시작할 수는 있으되 그처럼 뚜렷하게 뭔가 거침없이 지평을 열어 가는 건 아니라는 거죠. 판소리나 명창 같은 것은 스승에게 전수 받으면 끝점에 가서 제자가 서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시는 그게 아니에요. 외롭게 혼자 쓰는 거 아닙니까? 외롭게… 그런 점이 저한테는 공포로 다가왔던 거예요."
이른 봄 버드나무, 참새떼 들이마셨다가 뱉어낸다
회초리 가지 산들바람에 낭창낭창대다
해바라기씨 기총소사하듯 다다다다 뱉어낸다
아니다, 버드나무는 참세떼 한번 빨아들일 때마다 꼭
한 마리씩 삼키는 거다 옛 이야기 속 냇둑 산발한 여자
술취한 남자 홀랑 벗겨 냇물에 떠내려보낸다는
무서운 버드나무, 참새떼 들이마셨다가
휘이익 뱉어낸다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간다.
이면우 詩 <무서운 버드나무>
-말하자면 <무서운 버드나무>에 나오는 그런 공포말이지요?
"아니 그건 어릴 때 공포였던 거 같아요. 길을 걸어가며 보따리 같은 거 들고 걸어가면 무섭죠. 그 당시는 대전 변두리였는데 지금은 삼성동이죠. 그때는 우리집 앞이 논이었어요. 맑은 도랑이 흘렀고. 아버지가 고향에서 일찍 나오셨어요. 아버지 고향은 신탄진 대청댐이고… 삼정리."
-할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였나요? 가령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거나… 정서적인 바탕이 되어 주었나요?
"정서적인 바탕은 아버지였어요. 아버님이 재주가 많으신 분인데 예전에는 못 배웠잖아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감정기복도 심했고 머리도 뛰어난 분이었어요.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는 일은 하셨어요 왜냐하면 자식이 여럿이니까. 정서적인 것을 풀지 못하고…그때 어른들을 보면 자기 내부에 있는 어떤 고통을 풀어낸다는 것이 대화였어요. 친구들과 이웃들과의 대화 그리고 가족들간의 대화. 이런 거지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대화 속에서, 그 속에 젖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부분들을 환기시켜 나가는 거지요. 그런 것들이 내 시 속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한 거예요.
어렸을 적 나 살던 마을은 제법 큰 마을이었어요. 학교에서 우리집까지가 도보로 10분 정도의 거리인데 논도 있고 밭도 있고 그래요. 우리 동네엔 큰 밭이 있었고 한쪽 끝은 도랑이 있어요. 우리집은 밭과 내에 낀 '코너' 집이었어요. 안쪽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 집은 다섯 집 정도 그렇게 될 거예요. 경치가 좋았는데 지금은 살벌하지요.
고향마을인 산정리에서 내 정서적인 부분이 나왔어요. 방학이라거나 하면 가서 살으니까. 나는 거기서 태어났고 방학을 하거나 하면 가는 거지요. 일년의 3분의 일 정도는 거기서 살아요. 예전에는 식량이 귀한 때 아니에요? 그러니까 방학 때는 무조건 시골로 보내는 거예요. 입을 덜어야 하니까. 그리고 일도 못할 때니까요. 땅이 아버지 몫으로 조금 있었던 거 같아요. 몇 마지기 정도? 그때는 소출도 작을 때였으니까."
-학교를 왜 그만 두신 거지요? 어떤 계기가 작용했나요?
"이유는 시를 생각한건데… 시 때문인데, 내가 시 때문에 고등학교에 들어갔잖아요? 그럼 시를 써야 될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안 쓸라고, 시 안쓸라고."
-그때 벌써 詩에 대한 환멸을 느꼈습니까?
"아뇨. 환멸을 느낀 게 아니고 구체적인 삶을 살아야 만이 되겠다 싶었어요. 이런 거예요. 시를 쓰려면 남이 안본 거 신기한 거 이런 걸 탐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늘 꾸미는 자세가 된다고요. 내 삶은 어디로 가는건가? 내 삶은? 그러니까 내 삶은 내가 구체적인 일을 통해서 뭔가 하나씩 하나씩 만들고 확인해갈 때 그때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어린 시절에 가장 인상깊었던 책은 뭐죠?
"내가 어떤 책을 보면서 펑펑 울었던 책이 있어요. 이은상씨가 번역한 <난중일기> <징비록> 등이지요. 나 자신도 내가 왜 이럴까 싶을 정도로 울었어요. <징비록>에서는 대중들의 척박한 삶, 이런 걸 볼 때 눈물이 나오는 거지요. 난중일기에서도 여전히 난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몇 십명 죽었다 할 때 그때 우는 거여. 그렇다고 내가 정의를 내세우는 시를 쓰는 건 아니지만 그 몇 십 명으로 처리되는 사람들, 그 속에 내가 속했다는 운명같은, 그들의 운명이 내 운명같은, 어떤 동질성을 보는 거죠."
-말하자면 역사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연민을 느끼는 건가요? 전 어릴 때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고 많이 울었지요.
"난 그런 건 읽고는 덤덤한데… 난중일기는 지금도 잡으면 눈물나요. 난중일기를 처음 잡은 건, 문고판이었는데 호주머니에 딱 들어갈 만큼 얇고 크기가 작아 내가 방위 받았을 때 그때도 많이 읽었어요. 난 <부활> 같은 건 눈물이 안나요. 난중일기 같은 걸 봐야 눈물이 나지."
-정약용의 <애절양> 같은 시도 읽으시면 눈물나시나요?
"정약용, 그분 건 두 권 정도 봤는디, 이런 거지요. <목민심서> 같은 것도 선비가 백성을 내려다 보는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내 정서하곤 안 맞는 거지요. 내가 난중일기를 읽을 때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보는 거고요. 말하자면 끌고 가야 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고독 절망 그런 것들이 점철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아이가 '아빠 뭔 책을 읽으면 좋겠어?' 하고 물으면 난 '네가 난중일기를 몇 살 때 읽으려나'하는 생각을 하지요.
난 집단주의 속에 들어있는 것에는 별로 감동을 못 느끼는 편이지요. 그런데 <징비록> 같은 걸 보면 성밖에서 인육을 파는 것도 나오고 명나라 술 취한 군사들이 토하면 백성들이 따라다니며 주워먹는 것도 나오고 그러거든요. 그런 걸 보면 눈물이 솟구쳐 나오는거지. 이야기 하니까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 하하."
내가 보기에 그의 감수성은 열 서너 살 짜리 소년의 것이라고 하기엔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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