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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수많은 해수욕장들을 거느리고 있는 태안반도의 한복판에 터잡고 사는 덕에 수시로 바다 풍경이며 갯내음을 접하곤 한다. 매일 고장의 명산 백화산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거의 일상적으로 바다를 접하며 사는 처지에서, 지난 21일에는 대천해수욕장에 가서 일박을 하고 왔다.

교회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의 친목 행사에 참가를 한 것인데, 우리 고장의 숱한 해수욕장들을 다 놓아두고 계곡도 아닌 먼 남의 동네 바닷가에 와서 친목 행사를 갖는 우리 꼴이 조금은 기이하다는 우스개 말들도 없지 않았다.

아무튼 또 한번 바다를 접하면서, 그리고 올 여름에는 처음으로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도 하고 긴 해변을 거닐기도 하면서 바다에 관한 여러 가지 상념들을 새롭게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밀물과 썰물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순환을 반복하는 바다는 그것 자체로서 영겁의 생명력을 표징한다. 조금 때와 사리 때가 정교하게 보조를 맞추는 그 자연법칙 속에는 늘 자연의 숭고한 의지가 숨쉬고 있다. 늘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 늘 흐르고 움직이는 생명력으로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를 배태하고 날마다 자기 갱신을 이루려고 하는 의지….

때로는 조금 시기를 맞아 바닷물의 움직임이 멎은 듯하고, 거기에다 물결도 없어 호수처럼 잔잔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햇볕만이 반짝거리는 거기에도 정중동의 흐름은 늘 잊기 마련이다. 그것 역시 바다가 스스로 추구하는 순환 법칙에 의한 한때의 변화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바다의 그런 모습에서 고요하고 잔잔한 수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엄청난 변화의 위력을 좀더 실감적으로 예감하기도 한다.

바다의 수면을 장식하는 파도는 사람들의 감성을 좀더 확실하게 자극한다. 파도를 보면서, 하얗게 부서지는 풍성한 포말을 보면서 상쾌한 기분을 맛보거나 어떤 감상적 질감을 얻지 않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일찍이 사람들은 파도를 보며 바다가 숨을 쉬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실 파도는 바다의 호흡 운동이다. 물결 작용이 있음으로써 바다는 산소를 지닐 수 있다. 그것은 작은 민물 저수지도 마찬가지다. 바람 없는 날 저수지의 물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잔잔한 것 같지만, 미세한 물결은 늘 있는 법이다. 그 물결을 보고 사람들은 '저수지 물이 공기를 먹는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파도가 공기를 먹는 그 끊임없는 호흡 운동으로 바닷물은 늘 산소를 지닐 수 있지만, 바닷물에는 더욱 신비로운 생명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염분이다. 그 염분으로 말미암아 바닷물은 그 거대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썩지 않고 싱싱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바닷물을 구성하는 수많은 성분들 중에 염분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3% 정도라고 한다. 3%의 비율밖에 되지 않는 염분이 전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고 있는 셈이다.

몇 년 전 태안천주교회를 방문하신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는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는 염분의 비율을 소개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우리나라는 크리스천들의 수가 전체 국민의 과반수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 1500만명에다가 천주교 신자 300만 명을 합하면 무려 1800만 명이 기독교 신자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혼탁한 가치관 속에서 부정부패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습니까. 왜 이렇게 세상이 썩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소금이기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그것은 크리스천들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 바닷물의 염분의 비율처럼 전체 국민들 가운데서 크리스천들의 숫자가 3% 정도를 차지한다면, 그 3% 정도의 비율로 전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는 염분과 같은 구실을 우리 크리스천들이 할 수 있을 텐데, 크리스천들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 스스로 썩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하여 한국의 기독교가 신앙의 질보다는 신자 수를 중요시하는 팽창주의를 추구해왔기 때문이며, 사회를 정화하지 못하는, 즉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우리는 하느님 앞에 깊이 참회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기 위해서는 전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는 3% 염분의 비율을 늘 생각하면서, 그 3%의 비율 안에 들 수 있는 소금과 같은 신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주교님의 그 말씀은 내 뇌리에 깊이 각인이 되었다. 나는 그 말씀을 잊지 않고 늘 상기하면서, 비록 3%의 비율 안에는 들지 못하더라도,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살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들려주기도 하는데, 엊그제 토요일 저녁 식사 때는 가족들에게 대천해수욕장에 다녀온 얘기를 하면서 바닷물의 염분 비율 얘기도 했다. 천안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딸아이가 여름방학의 끄트머리를 집에 와서 지내는 데다가 중학생인 아들 녀석도 제법 말상대가 되어 주는 덕에 우리 집의 식사 자리는 이야기가 좀더 풍성했다.

딸아이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신앙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탈이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공부에만 바쁜 줄 알았던 딸아이는 서울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사건과 영생교 사건은 물론이고,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6월과 8월의 대규모 반공집회와 북한 인공기 소각 전문가인 박찬성 목사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그런 일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헤아리고 따르려는 것이기보다는, 자기의 좁은 생각주머니와 고정 관념 속에 하나님을 마구 우그려 넣거나 허리춤에 함부로 꿰차고 날뛰는 비신앙적 소행이라는 재미있는 표현도 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짓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식사 자리에서는 좀더 재미있는 얘기가 있었다. 내 입에서 '개구리 이야기'가 나온 탓이었다. 한나라당의 높은 사람들이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요당직자회의'라는 공식 석상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개구리로 비유하면서 인신공격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것이었다.

아무리 싫은 상대방 사람이라지만 일국의 대통령을 놓고 원내 제1당의 주요당직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은 중1인 아들녀석부터 올해 팔순이신 내 노모에까지 온 가족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인터넷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은 딸아이와는 달리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아들녀석은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내 주관적인 부연 설명은 하지 않고 한나라당 사람들이 제시한 노무현 대통령과 개구리의 닮은 점 다섯 가지를 소개해주었다.

"올챙이 적 시절 생각 못한다."
"시도 때도 없이 지껄인다."
"가끔 슬피 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생긴 게 똑같다."


이 유치하고도 천박한 비유를 놓고 우리 가족의 아침밥상 위에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지만, 가족들의 반응 표현 한가지씩만 우선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중1 아들: "너무 유치하네요. 어른들이 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고1 딸: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신앙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처럼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에는 애국심이 전혀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요. 고작 그런 수준, 그런 자질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애국심을 기대하겠어요. 있어봤자 자기들 이권에 대한 욕심뿐이지. 그런 사람들은 정치가나 정치인이 아닌 정치배라고 하셨지요, 아빠가?"

초등학교 교사 아내: "그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자신의 한계와 치부를 전혀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덮어놓고 찍어주는 생각 없는 유권자들도 문제고요. 지역 감정이나 수구적인 관점 하나로 표를 몰아주는 사람들만이 국민의 전부인 줄 알고 다른 국민들을 마구 깔보는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의 정치 엘리트라니…."

팔순 노모: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수준이 고것밖에 안 된다나. 생각하고 말할 게 그렇게 없어서 그런 불량한 말장난이나 하며 노닥거리다니…. 노무현 대통령이 아무리 미워도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차리고 살아야지. 그렇게 무식한 처신들을 예사로 하고 그러면, 국민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사람들한테서 뭘 배울 겨. 만날 물고 뜯고 험담하는 거나 배우지. 신사가 하나도 없어."


식사 후에 아내와 아들녀석은 곧 학교로 가고, 나와 어머니와 딸아이는 좀더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데 모을 수가 있었다.

"올챙이 적 시절 생각 못한다"에 대해서

노무현의 올챙이 적 시절은 전혀 부끄러울 게 없다. 한마디로 떳떳하고 아름답다. 노무현이 올챙이 적 시절을 생각 못하는 것이 한나라당이나 수구 세력에게 득이 되면 됐지 손해 될 건 없다. 노무현이 과거를 생각 못하는 것보다 한나라당 사람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다. 독재 권력에 빌붙거나 주구노력을 하며 국민을 억압하고 이득을 취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왜 생각 못하나.

"시도 때도 없이 지껄인다"에 대해서

노무현의 말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경청해 본 적이 있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집잡을 궁리부터 하는 자신들의 속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성찰을 해본 적이 있나. 노무현이 전임자들보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그만큼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투명성과 화합에 대한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구리가 "시도 때도 없이 지껄인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개구리는 절대로 시도 때도 없이 울지 않는다. 봄철 농촌의 밤을 장식해주는 개구리 소리는 자연의 향연이고 생명의 율동이지 결코 시끄럽거나 혐오스러운 소리가 아니다. 개구리 소리를 일러 "시도 때도 없이 지껄인다"는 것은 너무도 조악한, 그야말로 무지 무식의 소치다.

"가끔 슬피 운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고 '가끔 슬피 운다'는 관점을 성립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도 울 때는 울어야 한다. 피도 있고 눈물도 있는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이기에 앞서 인간이어야 하고, 대통령이기 전에 인간이어야 하는 것은 그 눈물로 규정될 수도 있다. 눈물 이 대통령 직무 수행에 보탬이 되면 됐지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개구리가 "슬피 운다"는 것 역시 무지의 소치다. 개구리는 절대로 슬피 울지 않는다. 슬퍼서 우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농촌의 밤을 장식하는 풍성한 개구리 소리를 일러 '슬피 운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개구리 소리에다가 상상적 관점을 어설프게 끌어다 붙이는 억지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에 대해서

개구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들의 궤변이다. 개구리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개구리를 잘 보면 어디로 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앉은 자세로 미리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앉은 상태에서 90도 옆으로 뛰기도 하지만, 그것은 앞에 나타난 물체에 대한, 그리고 지형 조건과 관련하는 반사적이고 방어적인 동작일 뿐이다. 누가 보더라도 개구리의 뛰는 방향을 능히 예상할 수 있다.

개구리가 뛸 방향도 감지하지 못한 나머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관점에나 사로잡히는 그 둔감성과 치졸한 안목으로 무슨 정치를 하겠다고 설치는 것인가.

"생긴 게 똑같다"에 대해서

이 지적에 대해서는 잘생긴 아들을 낳지 못한 내 어머니도, 예쁜 얼굴을 타고나지 못한 나도 똑같이 한나라당 사람들에게 무안한 심정이다. 그러나 부끄러울 건 없다. 그들에게보다는 오히려 개구리들에게 미안해지는 심정이다. 개구리가 우리 인간들에게 유익한 생물임은 세상 사람이 다 한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미국에서 건너온 황소개구리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토종 개구리는 제비, 잠자리와 함께 해충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생물이다. 그런 이로운 생물에다가 못생긴 사람의 얼굴을 비유하니, 그러는 인간들의 못된 소갈머리를 생각하니 정말 개구리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못생긴 얼굴이 잘생긴 얼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속은 비어 있으면서 얼굴로 한 몫 하려는 사람, 비겁하고 음흉한 내면이나 치부를 감추고 있는 잘생긴 얼굴보다 정직하고 온화하며 늘 웃음을 머금은 부드러운 얼굴이 훨씬 인간미를 발산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 그리하여 나도 늘 그런 얼굴이고자 한다.


이렇게 한나라당 사람들의 '노무현 대통령 다섯 가지 개구리 비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우리 가족은 재미있게 웃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한나라당 사람들이 고맙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내 팔순 노모께서 마지막 정리를 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개구리야. 우물 안 개구리. 우물 안에서만 사니까 그렇게밖에 보지 못하는 거고, 개구리의 눈으로 보니까 노무현 대통령도 개구리로 보이는 거지."

이런 어머니의 말에 딸아이가 또 마지막으로 토를 달았다.

"문제는요, 그 사람들이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들은 변화도 원치 않고, 스스로 변화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딸아이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지식 정보의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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