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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호주에 갔을 때 눈여겨본 거리 풍경 두 가지가 내 기억에 명료하게 남아 있다.
하나는 길가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들의 모습이다. 자전거들은 한결같이 잠금 장치가 없었다. 일부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잠긴 채로 세워져 있는 자전거는 한 대도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도 부러워서 괜히 신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신호등 앞에서 정차하는 차량 행렬의 모습이다. 신호 대기를 위해 정차하는 차들은 앞차의 꼬리 끝에 바짝바짝 붙는 법이 없었다. 차 한 대는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두고 멀찍멀찍 떨어진 상태로 정차를 하는 것이었다.
그 풍경이 내 눈에는 그저 경이롭게만 보이고 호기심도 발동해서 가이드에게 무슨 연유라도 있는지 물었다. 가이드는 웃으며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땅이 넓다보니 사람들 마음에 저절로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가 그렇게 교통 문화에서도 자연스럽게 습관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이야기였다.
거리에서는 빠르게 걷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어디에서든 보통 걸음으로, 조금은 느린 걸음을 걸으며 생활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대개 온화한 표정으로 보였고,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미소를 머금고 목례를 하곤 했다.
참 부러운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러 가지 자연 조건과 실질적인 상황 등을 종합해볼 때 호주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은 예전부터 들어왔지만, 그것을 피부로 쉽게 실감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구석들이 있겠지만, 나는 지금도 거리의 신호등 앞에서 숨막힐 듯한 정차 대기를 하고 있을 때는 가끔 호주의 그 여유로운 정차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그들의 그 여유가 부럽고, 그런 여유를 생성시키며 떠받쳐주고 있는 자연 조건도 부럽다.
지리적 또는 지정학적 조건과 환경 조건, 그리고 역사적 조건들이 사람들의 관념이나 인식, 습관 등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심대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거의 숙명적인 사항일지도 모른다.
생래적으로 '여유 공유'라는 것을 도저히 갖고 누릴 수가 없을 것만 같은 우리의 일반적 체질에 대한 고찰은 곧잘 '숙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자칫 비관적이고 체념적인 관점이나 상황으로 우리를 유인하려 든다.
비록 비관적이고 체념적인 관점 앞에서 괴로움을 겪게 되더라도, 이 문명 시대를 사는 지성인들에게는 그것에 대한 첨예하고도 치열한 인식이 참으로 필요하다. 광범위한 고찰과 통찰 속에서 좀더 뜨겁게 고뇌하며 극복의 명제를 키워가야 하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무시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좁은 공간에서나마 스스로 한발 떨어질 줄 아는 여유, 한발 물러난 상태로 저편의 사물을 좀더 폭넓게 조망해보려는 아량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 노력만이 우리의 생래적인 감정적인 기질과 조급성 따위를 효과적으로 극복해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요즘 발생한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장에서의 보수단체들의 '반북시위'와 북한측의 대응 자세를 보면서도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속성을 체감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보수단체들의 반북시위는 그들의 온갖 주장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무모하고도 철없는 행위다. 보수 단체들의 반북 논리야 역사적 시대적 산물이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에는 좀더 많은 숙고가 따라야 한다. 시기와 장소를 선택함에 있어 파급 효과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파급 효과가 얼마나 큰 부정적인 작용을 낳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들에게 그런 생각의 여유와 여지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회의도 없지 않지만, 이번처럼 시기와 장소의 함의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전투적인 방식은 스포츠 정신으로 모인 외국인들 앞에서는 더더욱 무모한, 참으로 유치한 자기모멸과 자학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은 외국인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보수단체들의 반북시위에 대한 북한측의 저돌적인 대응 방식을 보면서도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젊은 기자들이야 자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보수단체들의 자극적인 반북시위를 뻔히 보면서도 북한 기자들이 자제를 한다는 것은 도리어 이상한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자제는 그들에 대한 큰 문책과 안위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보수단체들과 북측 기자들의 충돌 상황을 보면서, 그리고 북측 기자들의 격렬한 몸짓에서 나는 좀더 '처절함' 같은 것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실로 어떤 이중적인 연민 같은 것을 느껴야 했다.
하나는 그들에게서 남한 보수단체들의 편협성과 극렬성 이상으로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충성심에 철저히 얽매인 행태를 보는 것만 같은 심정에서 연유하는 연민이었고, 또 하나는 이미 어떤 패배를 예감하는 분위기 속에서 더욱 극렬히 저항하는 것인지도 모를 그들의 등뒤에 아직 완고하게 버티고 있는 체제 장벽 어디에도 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여지가 너무도 없다는 사실에서 연유하는 연민이었다.
만일 그들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어서 남한 보수단체들의 자극적인 시위를 아예 못 본 척 무시해 버릴 수 있었다면, 그 후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나로서는 흥미로운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젊은 기자들이야 행동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런 충돌로 스스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북한 선수단 지도부가 북한 고위층의 어떤 지시나 조율에 의해 감정적이고 반사적인 대응이 아닌, 남한 보수단체들의 치졸한 행동을 아예 무시해 버리는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면,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파급 효과는 어떤 양상으로 발전할 것인가? 나로서는 결코 버리고 싶지 않은, 생각할수록 흥미로운 일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번 우리 민족에게 생래적으로 부족하고 취약한 정신적 여유와 대범성 문제를 뼈아프게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정신적 여유와 대범성은 창조적인 사고와 밀접히 연관한다. 또 창조적 사고란 그대로 '자유'를 의미한다. 그것이 북한 사회에서는 철저히 제한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북한 체제의 속성과 실상은 세계인이 다 안다. 북한사회의 경직성과 획일성과 폐쇄성이 제왕적 독재 권력의 강압적인 국민 통제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주술적인 사상 교육의 효과가 매우 크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것에 대한 남한의 대응 방식에는 참으로 많은 지혜와 치밀성이 요구된다. 민족 통일이 우리 시대의 최대 명제이고, 언젠가는 기필코 통일이 되리라는 전제를 우리가 수용하고 산다면 거기에는 좀더 많은 끈기와 인내, 다양하면서도 평화적인 방법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동포애에 기반하는 따뜻한 인도주의가 절대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 어떤 국면에서도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부작용의 돌출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평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한 국민들이 더욱 자신감과 유연함을 지니고 계속적으로 바람과 햇볕과 계절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며 나아가야 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시기와 장소의 함의를 무시하는 일부 보수단체들의 자극적인 반북시위는 참으로 무의미하다. 그들의 그런 일들이 민족 화해와 통일의 길에 보탬이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전혀 이성적이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일에 나선 일부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까지 마구 파는 행위를 볼 때 같은 신앙인으로서 안타까운 마음 한량없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좀더 넓은 사고와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마음의 여유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와 지혜는 우리에게 세상을 크고 넓게 보는 대범성을 갖게 하고, 우리를 좀더 어른스럽게 한다.
북한은 남한에게, 남한은 북한에게 일시적인 상대일 뿐이다. 5천년의 역사 속에서 분단 50년은 일시일 뿐이고, 앞으로 얼마간은 더 지속될 통일 노력과 그 과정이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여러 가지로 불균형적이고 차별화 되어 있는 북한을 효율적으로 상대하며 통일의 길로 조금씩이라도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민주국가인 남한 사회부터 좀더 지혜롭고 대범하고 어른스러워져야 한다. 그리고 어느 분야보다도 정치인들이 쩨쩨한 소인 기질들을 벗어버리고 어른스러운 모습들을 지녀야 한다.
눈만 뜨면 듣게 되는 정쟁(政爭)의 소리들은 정말이지 지겹고도 역겹다. 제 딴에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고 대단히 함축적이고도 적확(的確)한 표현을 구사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각이 있는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정쟁에서 우선은 전혀 어른스럽지 못한 유치함과 천박함을 느끼기가 일쑤다.
정치인들의 속성과 정당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정권 쟁탈이 정당의 제1목표라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양질의 애국심과 높은 이상이 온전히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우선은 나라를 생각한 다음에 당을 생각해야 하고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걸핏하면 국민을 들먹이지만, 그것을 곧이듣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그들에게는 국민은 안중에도 있고, 있다면 오로지 선거구민 뿐이다. 그리고 지역감정 등으로 조작이 가능한 선거구민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일수록 전체 국민을 무시하는 무지와 독선, 오만이 울울창창하다.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한다면, 출범한지 얼마 안 되는 새 정부를 도울 줄도 알아야 한다. 나라의 경제가 어렵다면, 그 경제 문제에다가 노사 분쟁까지 겹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부를 보며 마냥 질타나 하고 무슨 큰 성과라도 얻은 양 즐기기만 할 게 아니라, 해법을 찾기 위해 같이 고민하며 지혜를 보태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인의 큰 몫이고 의무이며, 야당의 위상을 스스로 키우는 일이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채근할 것은 채근하고, 격려하고 도울 것은 또 그것대로 챙길 줄 아는 상생정치의 풍토를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한다면, 그 노력만으로도 다음에 정권교체를 쉽게 이룰 수도 있고, 정권을 잡았을 때의 국가 경영 부담도 훨씬 줄어들 수 있음을 오늘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비아냥거리고, 전혀 어른답지 않은 중학생 수준의 험담이나 펑펑 퍼붓고 한다면 자신에게는 부분적으로 유리할지 몰라도 나라와 국민들에게는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 6개월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 지지율에 대한 조사 결과도 나왔다. 여론조사 기관에 나타난 지지율과 네티즌들의 자진 참여에 의한 지지율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노무현 정부에 대한 국민 지지율의 큰 폭 하락은 분명한 것 같다.
나 역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실망한 것들이 있다. 얼마 전에 발표한 '고(故) 정몽헌 회장의 명복을 빌며'라는 글에서 내 실망감의 일단을 표현한 바도 있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 실망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모든 기대를 접고 노무현 정부를 부정적으로 볼 생각은 없다. 온갖 악조건들 속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 어렵게 나아가고 있는 노무현 정부에게 아직은 기대를 걸면서 지지를 보내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역대 정권으로부터 받은 실망과 배신감을 생각하면 정치 지도자를 대하는 국민들의 태도는 예의나 존경이기보다 경계심과 비판이어야 한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선의적인 말들에 못지 않게 악의에 찬 일방적인 매도들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증오에 가득 찬 욕설에 가까운 거친 표현들 앞에서는 섬뜩함과 함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인터넷 상에 회자된 노 대통령에 대한 '개구리 비유'는 관점에 따라서는 유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설령 유머라 하더라도 건강한 유머는 아닐 터이다. 유머에는 모략의 기운과 악의가 없어야 한다. 인신공격적인 내용의 그것이 설령 시중에서는 유머가 될 수 있을지라도, 일국의 비중 있는 정치인들이 주요 당직자회의 석상에서 함부로 입에 올리며 노닥거린다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행태이고, 우리나라 정치 풍토의 조악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 사회의 울울창창한 익명의 숲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속성의 하나인 성급함과 극단적인 편협성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거리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는 수 많은 차량들이 바짝바짝 붙어 있는 상태에서도 서로 출발을 서두르고 앞차의 조금 늦은 출발에 경적을 울려대는 그 조급성을 울창한 숲 속에서도 왕왕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부터 깨어나고 변화되어야 한다. 정치인은 국민을 조작하고 이용해 먹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을 일깨우고 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참다운 정치인과 정치가가 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끝까지 정치판을 더럽히는 정치배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아직은 우리나라에 정치인이 아닌 정치배들이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유와 지혜와 대범함을 지니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좁쌀 같은 정치배들이 많아서 우리가 함께 헤치고 나아가야 할 저 숲 속에는 오늘도 가시덤불이 무성하고 성급한 경적음이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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