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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대북송금 특검 사무실에 출두하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지난 6월 대북송금 특검 사무실에 출두하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 연합뉴스
이처럼 이익치 회장은 현대의 비자금을 받은 정치인에게는 '저승사자'이지만 이들을 소추(訴追)하는 검찰에게는 '수호천사'나 다름없다. 이씨는 박지원 전 비서실장에게 현대비자금을 제공했다는 이른바 '150억' 사건과, 권노갑 전 민주당 상임고문에게 현대비자금 200억원을 제공했다는 이른바 'α(알파)' 사건의 국내 유일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른바 '현대비자금 150억+α'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대검 중수부가 지난 8월 19일 느닷없이 이 사건의 주요 참고인인 이익치 회장 감싸기에 나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문효남 대검 수사기획관은 이날 브리핑 도중에 "현대쪽에서 이씨를 '배신자'로 본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데, 수사팀에서는 이씨가 본인에게 득이 될 것을 기대해서 진술한 게 아니라 고 정몽헌 회장이 (200억 전달 사실을) 시인하자 이씨도 '대세'를 인정해 따른 면이 많다고 한다"며 "이씨가 처음부터 수사에 기여한 것은 아니다"라고 이씨를 적극 옹호했다. 요컨대 α건을 맨 처음 발설한 이는 이씨가 아니라 정 회장이고, 이씨는 나중에 마지못해 시인했다는 것이다.

문효남 기획관은 검찰이 이처럼 이례적으로 한 참고인의 '입지'에 대해서까지 설명하는 이유가 뭐냐고 기자들이 묻자 "(언론 보도가) 사실과 달라 이씨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어서"라며 "수사팀에서 기회가 있으면 설명을 좀 해달라는 당부가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씨의 해명 요청을 받은 검찰이 비난여론의 바다에 빠진 '이익치 구하기'에 나선 셈이다.

그러나 이씨의 행적 및 진술과 관련해서 검찰과 언론이 애써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알다시피 현대비자금 150억+α 의혹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 건은 대북송금 특별검사팀이 현대 자금의 계좌추적을 하다가 발견한 '별건'이다. 그리고 특검은 지난 6월 25일 대북송금 의혹 사건 수사를 종료하면서 150억+α 건과 관련된 모든 수사자료를 대검 중수부에 넘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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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질심문의 왕자' 이익치

그런데 송두환 특별검사가 법원에 제출한 대북송금 의혹 사건 수사기록에 따르면, 이익치 회장은 이 사건과 관련해 특검이 구속·불구속 기소한 8인(고 정몽헌 회장 포함) 중에서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한 '대질심문의 왕자'이다. 특검 자료를 가지고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는 이씨를 '감싸고' 도는데, 정작 그에 관한 특검 수사기록을 보면 그의 진술을 별로 신뢰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우선 이익치 전 회장은 사실관계를 다투는 핵심 당사자인 박지원 전 비서실장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었던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 김재수 전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 현대측 인사들과도 낮을 붉히며 대질신문을 해야 했다.

이씨는 대질신문에서 정몽헌 회장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김충식 사장에게 대북송금 2억 불을 언급한 사실 등 자신에게 불리한 혐의에 대해서는 전면 부인으로 일관했다. 또 이씨는 네 번의 남북정상회담 예비회담(접촉)이 열린 싱가포르, 상하이, 베이징 등에 정몽헌 회장을 수행해 모두 참석해 현대가 대북사업의 대가로 북측에 5억달러(현물 5000만 달러 포함)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대북사업과 관련된 창구는 김윤규 사장이 하였기 때문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그 책임을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전가했다.

심지어 현대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씨는 평소에 여러 대의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며 현대의 대북사업 및 송금과 관련해 박지원 장관, 임동원 국정원장 등과 수 차례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었으면서도 특검 조사에서는 '휴대폰이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이씨가 현대비자금에서 건네진 CD(양도성예금증서) 150억원 건과 관련, 김재수 전 현대건설 부사장 겸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대질신문을 받을 때는 이씨가 김씨의 진술을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자, 특검팀 검사가 "진술인은 양도성예금증서가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는가요"라고 묻자 "잘 모릅니다"로 답하는 웃지 못할 장면까지 연출된다.

지난 6월 특검에 소환되는 고 정몽헌 회장, 김윤규 사장, 김재수 전 구조조정본부장(왼쪽부터). 이익치 회장은 '한솥밥'을 먹던 이들과 특검에서 대질신문을 해야 했다.
지난 6월 특검에 소환되는 고 정몽헌 회장, 김윤규 사장, 김재수 전 구조조정본부장(왼쪽부터). 이익치 회장은 '한솥밥'을 먹던 이들과 특검에서 대질신문을 해야 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오너와 후배 임원들에게 책임 전가한 이익치의 진술

또 특검 조사실에서 바로 마주보고 대질한 김씨가 "이익치 회장께서 '이름표 없는 CD 있잖아, 그걸로 일단 맨들어 놔'라고 말씀해 1억원짜리 CD 150장을 만들어 드렸다"고 진술하는 데도, 이씨는 그 면전에서 "이 사람은 새까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고 CD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를 한 적도 없습니다"라고 잡아뗐다.

이씨의 '거짓말 진술'이 가관인 것은 일반적인 범죄 혐의자들이 수사기관에서 부인하는 '사실과 다르다', '모른다', '기억이 없다' 정도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부인 진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김재수 본부장은 워커힐 아파트 뒤 산책로에서 이익치 회장에게 CD 150억원을 전달했다고 진술했지만 이씨는 이렇게 부인했다. 물론 이씨의 '부인'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워커힐 아파트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그곳에 살아본 적도 없고, 워커힐 아파트 뒤쪽에 공원이 없습니다. 지금 말하는 장소 자체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돈을 받으면 사무실에서 받지 왜 밖에서 받습니까."

그러나 대질신문을 시작할 때 "제 중학교 선배가 되시고, 회사의 선배도 되시고, 고 정주영 명예회장 시절 회장 비서실 선배로 되는 관계로 너무나 잘 아는 사이"라고 말했던 김재수 본부장은 조서 말미에 이렇게 진술했다.

"이익치 회장께서 정몽헌 회장을 도와서 대북사업을 하실 때 저나 김윤규 사장은 정말 존경을 하였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이익치 회장께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니까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이씨는 끝내 궁벽하게 부인하면서 '공'을 오너(정몽헌 회장)에게 넘겼다.

"저는 내용 자체를 전혀 모르고, 우리 기업의 상식으로 볼 때도 그런 돈은 오너가 핸드링하는 것이지, 월급쟁이들이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닙니다."

이익치의 변론 "순진한 특검... 전제주의적 현대재벌 생리 몰라 속은 것"

오너에 대한 책임 전가 조짐은 이미 이씨가 지난 6월 특검 조사를 받기 전에 변호인을 통해 특검에 제출한 '변론요지서'에 예고돼 있었다. 이씨의 변호인은 변론요지서에서 "피조사자 이익치는 도저히 대북송금 자금의 마련 및 송금에 관여할 형편이 아니었다"면서 그런 정황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다음에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을 승계하여 현대그룹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최대·최고의 지배자였고 특히 현대상선·현대건설·현대전자는 정몽헌 회장이 승계한 회사여서 정몽헌 회장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회사이고 정몽헌 회장이 유일한 지배자였으며, 그 임원인 김재수·김윤규·김충식·박종섭도 정몽헌 회장의 지시를 조금도 거역할 수 없는 심복부하들이므로, 그들에게는 정몽헌 회장 혼자서도 얼마든지 대북자금 마련과 송금을 명령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했는데, 그런 정몽헌 회장이 왜 무슨 힘이 부족해서 꼭 피조사자 이익치와 함께 그런 지시를 했다는 것인지―이는 혹시 한국의 재벌, 그 중에서도 가장 전제군주적인 재벌인 현대그룹의 생리를 너무 몰라서 현대 임원들의 거짓 책임전가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이 오너나 현대의 후배 임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의 후배 임원들이 거짓으로 책임을 전가한 것인데, 가장 전제군주적인 재벌(현대그룹)의 생리를 모르는 '순진한' 특검이 이에 넘어간 것 아니냐는 논리를 내세워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전의 정몽헌 회장은 특검 조사에서 "이익치 회장은 현대그룹의 대북사업과 송금은 그룹 총수인 정주영 명예회장과 그의 승계자인 정몽헌 회장 등 그룹 총수에 의해 근본적인 의사가 결정되어 지시된 것이며 자신은 대북사업 송금과 관련해서는 관여했거나 아는 바가 없다고 하는데 어떤가요"라고 검사가 묻자 덤덤하게 이렇게 답했다.

"회담을 할 당시 현지에 있었기 때문에 이건 대북송금 등에 대하여는 알고 있었을 것이고, 제가 출국하면서 사장들의 어려움을 박 장관을 통하여 해결해주라는 지시까지 하였기 때문에 전혀 몰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2000년 8월 현대증권 회장직 물러난 뒤 태도 돌변

지난 99년 9월 현대 주가조작 사건으로 구속되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지난 99년 9월 현대 주가조작 사건으로 구속되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 연합뉴스
고 정주명 명예회장 비서 출신으로 생전에 정씨를 아버님이라고 불렀던 이씨가 '형제'나 나름없는 정몽헌 회장이 자살했을 때 그의 빈소에 나타나지 못한 까닭이 여기에 있을 법하다.

현대가에 대한 그의 '배신'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IMF(국제통화기금) 고금리 체제에서 "주식을 사서 돈도 벌고 애국도 하자"는 논리로 전국을 돌며 '바이 코리아 펀드' 열풍을 몰고와 한 때 현대그룹을 대표하는 전문 경영인이었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1999년 9월 현대전자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된 것을 계기로 현대가와 척을 지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2000년 4월 남북한 당국 사이의 역사적인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거간'한 숨은 일등공신이면서도, 그해 8월 정부와 채권단의 '가신 퇴진' 압력 때문에 현대증권 회장직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그때부터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미국 체류 중이던 그는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이 연루돼 있다"면서 정 후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돌출행동은 2000년 7월 현대중공업이 현대전자 주식매각 과정에서 풋옵션 계약을 맺었다가 입은 손실 2억2000만 달러를 이익치 회장과 현대증권, 현대전자가 물어내라는 소송을 낸 데 대한 역공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는 이미 1심에서 패소해, 전 재산을 내놓아야 할 처지에 내몰려 있었다.

이익치는 이회성 등 '세풍' 사건 관련자들에게도 '저승사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 관련자들에게도 '저승사자'였다. 세풍 사건은 97년 대선 전에 모두 경기고 동문인 이회창 후보의 동생 이회성씨와 서상목 한나라당 의원(대선 기획본부장) 그리고 이석희 국세청 차장 등이 공모해 국세청을 동원해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강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98년에 그 실체가 상당 부분 드러났지만 핵심 당사자인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의 해외 도피와 서상목 의원의 체포를 막기 위한 한나라당의 '방탄국회'로 수사와 재판이 지연되어 최근에야 관련자 모두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대검 중수부 수사기록과 공판조서에 따르면, 이익치 회장은 이회성씨와의 대질신문을 통해 이씨 등을 검찰이 사법 처리하는 데 기여한 '협조자'였다.

97년 대선 당시에는 현대증권 대표이사 사장이었던 이씨가 처음부터 대검 중수부의 세풍 수사에 협조한 것은 아니었다. 이씨는 98년 9월 처음 조사를 받을 때만 해도 경기고 후배인 이석희 차장과 임채주 국세청장의 요청에 따라 현대그룹은 한나라당에 10억원을 선거자금으로 지원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외에도 현대그룹이 20억을 추가로 지원한 사실이 검찰 수사와 계좌추적 등을 통해 밝혀지자 그해 11월부터는 "사실은 위 국세청 직원 이외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의 동생인 이회성으로부터의 대선자금 지원요청이 있었다"고 실토하게 된다. 다음은 진술조서의 한 대목이다.

문: 그렇다면 진술인이 대선자금과 관련하여 이회성을 만났다는 것인가요.
답: 예. 1997. 11. 하순경부터 같은 해 12. 초순경에 걸쳐서 약 4~5회에 걸쳐서 조선호텔 1층 커피숍에서 만난 사실이 있습니다.

문: 진술인과 이회성, 이석희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답: 이회성은 경기고등학교 1년 후배의 선후배 관계로서 평소 연락을 주고받거나 친분이 있는 관계는 아니고, 이석희는 1996년 국세청 차장으로 취임하면서 저에게 전화를 하여와서는 경기고등학교 2년 후배인 것을 알게 되어 그후로는 종종 전화통화를 하면서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사이입니다.

문: 평소 친분이 없는데 어떻게 대선자금의 요청을 받게 되었나요.
답: 이석희 국세청차장의 주선으로 만나게 되었고, 또한 만나는 자리에서 이회성으로부터 대선자금 지원을 요청받았습니다.


이회성-이석희 요청받은 이익치, 한나라당에 현대돈 30억 지원

'세풍'의 주역 이회성씨. 그는 98년 12월 국세청을 동원해 대선자금을 불법 모금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세풍'의 주역 이회성씨. 그는 98년 12월 국세청을 동원해 대선자금을 불법 모금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당시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은 이회성씨와 헤어진 후 이계안 현대그룹 경영전략팀장(자금담당 부사장)에게 후원금 지급 여부를 알아보니 "한나라당에서 여러차례 연락이 왔으나 위에서 일체 지원하지 말라고 해 안했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러자 이 사장은 "나한테도 독촉이 오는데 좀 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해 일단 10억원을 롯데호텔 주차장에서 비밀리에 전달토록 한다. 그런데도 이 회장은 나중에 이회성씨로부터 "YS가 전혀 도와주지 않아 매우 어렵다, 선배님이 좀 도와달라"는 추가지원 요청을 받자, 이번에는 영수증을 처리한 기탁금 20억원을 추가로 지원하게 된다.

97년 12월 당시 이익치 사장의 지시를 받아 정치자금을 건넨 이계안 부사장은 검찰에서 "당시 현대그룹의 입장은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한나라당이 우세하다고 볼 수도 없어 관망하고 있던 차에, 현대증권의 이익치 사장의 지시가 있었고 또한 여당인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것에 대비해 보험금을 납부한다는 측면에서 추가로 정치후원금 20원을 기탁하게 되었다"면서 이익치씨가 개입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진술했다.

문: 왜 그룹차원의 정치자금을 현대증권 이익치 사장이 납부하도록 지시를 한 것인가요.
답: 이익치 사장은 경기고등학교 출신으로 한나라당 실세들과 인맥이 두터운 임원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전부터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이익치 사장이 실세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한편 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뿐만 아니라 김대중 후보에게도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이듬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면서도 대우그룹이 기탁한 이회창 후보 후원금 20억원과 관련해 대검 중수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에 반해 현대그룹은 이익치 사장이 지시한 비밀 지원액 10억원을 포함 30억원을 지원했지만 현대그룹은 정몽구-정몽헌 회장 가운데 어느 누구도 조사를 받지 않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92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김영삼 정부 5년 내내 시달린 현대그룹의 경우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구 회장 등이 '선거자금을 일체 지원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고 있던 상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대질신문에서 이회성씨는 이익치를 아느냐고 묻자 "평소 존경하는 (경기고) 선배"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익치씨는 대질조사가 끝난 뒤 검찰에 "대선자금을 도와주었더니 고생을 시킨다, 이회성을 도와주다가 구속된 사람들도 있는데 이회성이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면서 "오히려 이회성이 진실을 털어놓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선처를 구하는 것이 인간적 도리가 아니겠냐"고 진술했다.

영리한 박지원이 이익치의 '독' 묻은 돈 받았을까?

이회창 후보가 연루된 의혹을 받은 세풍 사건은 이른바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을 지칭하는 '총풍(銃風)' 사건과 함께 이 후보의 향보와 관련해 김대중 정부가 면밀하게 주시한 대형 사건이다. 따라서 박지원 비서실장이 수사 진행상황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즉 박지원씨는 이익치 회장의 증언으로 검찰이 이회성씨를 구속할 수 있었고, 이씨는 그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씨가 특검 수사에서 처음 CD 150억원을 건넸다는 이익치 회장의 진술이 나왔을 때 "내가 돈이 필요하면 정몽헌 회장으로부터 직접 받지 잘 알지도 못하고 세간의 평도 좋지 않은 이익치 회장으로부터 받겠냐"고 반문한 것도 이씨는 '정치자금과 관련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얘기한 것이다.

이익치 회장이 박지원 문광부장관에게 CD 150억원을 건넸다고 하는 시점은 2000년 4월 상순경이다. 그러데 이익치 회장은 98년 11월 후배 이회성씨를 '배신'한 전력이 있고, 99년 9월에는 그 자신이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따라서 그런 사정을 잘 아는 박지원 장관이 이익치 돈은 '쥐약'인줄 알면서 그 돈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권'과 무관한, '독'이 묻지 않은 돈도 많았을 터인데 말이다. 물론 그 당시 독 묻은 돈이라도 받지 않으면 안될 정권 차원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면 혹시 모르지만.

서울 출신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전형적인 'KS마크'인 이익치 회장은 '꾀돌이'라고 부를 만큼 영리한 사람이다. 물론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인 박지원 장관 또한 완벽주의자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해낼 만큼 뛰어난 '재사'로 소문나 있다.

결론, '꾀돌이' 이익치 vs '재사' 박지원의 진실게임

지난 6월 16일 특검에 소환되는 박지원 전 장관이 기자들 사이를 뚫고 승강기로 이동하고 있다.
지난 6월 16일 특검에 소환되는 박지원 전 장관이 기자들 사이를 뚫고 승강기로 이동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씨는 현재 박지원씨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대로부터 비자금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한 권노갑씨 사건의 사실상 유일한 증인이다. 검찰에 따르면 권씨는 비자금을 요청할 때 고 정몽헌 회장, 이익치씨, 그리고 김영완씨와 함께 있었다. 그 가운데 정 회장은 고인이 됐고, 김영완씨는 해외 도피중이다. 검찰로서는 이씨가 더없이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더욱 이씨의 '입지'를 보호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 회장이 먼저 권노갑씨에게 200억원을 건넨 사실을 진술했고 이씨는 그 뒤에 마지못해 시인했다는 검찰 발표와 달리, 검찰은 이씨를 소환조사한 다음날인 지난 7월 22일 권씨를 출국금지했고, 정 회장을 처음 조사한 것은 그보다 나흘 뒤인 7월 26일이었다.

따라서 이씨가 먼저 권씨의 혐의 부분을 털어놓았고, 그 뒤에 권씨에 대한 출국금지와 정 회장 소환이 이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때문에 검찰이 이씨의 형사처벌을 최소화하고, 그 대가로 이씨가 권노갑-박지원씨에 대한 뇌물공여 사실을 증언하는 이른바 '플리 바기닝'(Plea Bargaining) 거래 의혹마저 제기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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