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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없듯이 아니, 흔들리지 않으면 이미 나무는 나무가 아니듯이 사람들은 흔들리기 마련이고 또 흔들리기 때문에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흔들림은 사람의 것이 나무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나무는 밖에 주어진 자극인 바람에 의해서만 비로소 흔들리지만 사람은 안팎의 동기에 의해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 마음속의 동요로 말미암아 더러 더 많이, 보다 심각하게 흔들리는 편이다. 사람들은 흔들리면서 산다. 아니 흔들리는 움직임, 그게 곧 삶인지도 모른다. 헤매고 나다니고 의심쩍고 미심쩍어 하고, 긍정과 부정을 오가면서 사람은 살아간다. 덜덜대고 덜컹덜컹 거리면서 겨우겨우 살아간다.
사람은 바람에 불리고 있는 풀이다. 다만 그는 걸어 다니는, 옮겨 다니는 풀, 풀의 잎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흔들림은, 흔들림 그 자체는 사람의 사람다움 바로 그 자체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고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이른바, ‘아이덴티티’는 우선 흔들림에서 찾을 수 있다.
무엇인가 할까 말까 해서 흔들리고 이런 저런 말을 입에 올릴까 말까 해서 순간순간 흔들리고 있는 게 사람이다. 이렇게 살까 저렇게 살까 꿍얼대면서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리고 그 타성으로 그 반작용(反作用)으로 다시금 흔들린다. 하기에 인생살이 걸음새는 여인의 머리에 얹은 물동이의 물 속과 같다.
휘청휘청, 철렁철렁 살아가는 게 인생이다. 아니면 산길을 가는 사람의 걸음걸이와 비슷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비탈길을 오르는 사람은 허리를 알맞게 흔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산길에 익은 사람은 빈 몸으로 갈 때도 곧잘 흔들대면서 간다. 우리들 인생의 길이 무거운 짐을 진 채 가는 길이란 것은 틀림없는 일, 그래서도 우리들은 흔들면서 흔들리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것, 삶은 흔들림, 바람에 불리는 잎새와 같다.
3년 전 교동에 엄청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밤새 바람소리에 잠을 설쳤다. 날이 새자마자 나가보았더니 교회마당 적송(赤松) 서너 그루가 뿌리 채 뽑혀 널부러져 있다. 수십 년 동안을 잘 자란 나무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뿌리 채 뽑힌 것이다. 한번 넘어진 나무를 무슨 수로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 넘어진 적송의 뿌리를 매만지고 있자니 일순 서러움이 북받쳐온다. 그렇게 큰 나무가 고깟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다니….
그런데 키 작은 나무들은 언제 바람이 불었냐는 듯이 멀쩡하게 서 있다. 소나무가 쓰러진 바로 옆 상수리나무도 멀쩡하다. 나무도 바람을 잘 타야 한다. 내가 바람을 이기려고, 바람과 정면대결하면 나는 넘어지고 만다. 바람을 잘 타야 한다. 바람개비처럼 바람을 잘 이용해야 한다.
더러 가지는 부러지기도 하지만, 뿌리 채 뽑혀 넘어지지는 않는다. 만경창파(萬頃蒼波) 잔잔한 바다에 떠 있는 돛배는 안전하기는 하지만, 빨리 가지 못한다. 오히려 거센 바람을 만난 돛배는 더 빨리 갈 수 있다.
나는 어떠한가? 바람을 잘 타는가? 그것이 삶의 지혜이다. 바람에 몹시 흔들리면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은 잠깐이면 지나가고 만다. 유년시절 예방주사를 맞기 위해 길게 복도에 서 있는 것 같다. 맞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내 인생을 반듯하게 살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인생살이는 직선이 아니다. 인생은 굽이요, 재다. 세상의 어느 고개가 반듯하게 곧은 선을 긋고 있는가? 세상의 어느 재가 고속도로에 그어진 주행선처럼 내 뻗쳐 있는가?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일찍이 “사람은 구하는 동안 헤맨다”고 아주 잘라서 말했다. 구한다는 말은 진실, 가치, 이상, 믿음… 등등을 구한다는 뜻이다. 빛을 구하거나 하다못해 셋방 하나를 구하는데도 우리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한참 흔들리고 나서 비로소 작은 결정 하나에 다다르는 게 곧 인간이다. 하물며 진실, 믿음, 가치, 이상 등을 두고는 다시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그렇다. 흔들리고 흔들리는 것, 그게 나의 본질이고 나의 뿌리이다. 흔들려서 나는 사람이 되고 드디어 내가 된다. 혼인을 할까 말까? 혼인을 하되 저 사람을 대상으로 할까 말까? 이 한 가지만 보아도 인생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가름하는 갈래길, 바로 그것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 갈래길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한참을 망설여야 한다. 한동안을 두고 마음이 흔들려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결정을 짓는다. 내가 나답게, 나의 삶을 선택하게 되는 순간이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젊은 동안에는 흔들림이 심한 편이다. 나이가 들면 흔들림도 약해진다.
인생은 강물과도 같다. 강물은 곧게 가지 않는다. 휘어져가고 출렁이면서 간다. 흔들리면서 가는 강물, 그게 곧 인생이고 우리들 각자의 자기증명 바로 그것 아닌가?
처서(處暑)가 지나 가을로 가는 길목, 조석(朝夕)에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그러나 바람이 언제 태풍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내가 바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내 몸을 바람에 맡긴다. 바람을 잘 타려면 내가 부드러워져야 한다. 풀처럼 부드럽고 나지막하게 엎드려서….
바람 속에 나무 혼자 섰다 바람은 우리애기 울음소리 그 속에 스민 듯한 바람 가만히 창에 귀 기울이며 내다보는 나무는 혼자서 무얼 견디며 저리 섰는 나무일까 흙 속 돌 틈으로 뿌리는 뻗어 갇힌 들짐승의 절망을 울어 온 나무일까 저녁노을 별 하늘에 까닭 모를 동경이 피고 지거나 때로 물 밀리듯 부푸는 그리움으로 해서 부르짖음 같은 갈증이 그 마음에 일어 신의 이름 앞에 평화의 입맞춤을 비는 저 나무는 그렇듯이 기도하는 나무일까 엷은 어둠을 눈썹으로 밀어 내며 나무를 내다보는 나는 눈으로 나무를 보는 나일 것인가 깊은 속마음의 계곡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을 맞이하여 스르릉 소리 내는 영혼의 絃琴(현금) 그 어느 한 가닥에 은은히 울림하여 내가 나무를 보는 나일 것인가 어쩌면 꽃빛같은 달밤에 하얀 貝殼(패각)의 살결을 쓰다듬는 연연한 바다풀의 손길 같은 사랑으로 내가 나무를 보듯 누가 또한 나를 보아 주기 소원인 마음으로 내가 나를 살피듯 나무를 보는 나인지도 모른다. (김남조 詩. 바람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