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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너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구나. 내가 명색이 글 쓰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너를 보낸 지 거의 두 달이 되도록 지금까지 글 한 줄 쓰지를 못했단다. 그동안 너의 49재를 지내고 나서는 누구 말처럼 훌훌 털고(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아쉬워하겠니?), 평소 너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글로 써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머리 속에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며 지내왔는데, 이제 정작 글 쓰기를 시작하려 하니 그 많던 생각들이 말짱 다 비산(飛散)하여 막막한 허공이 되어 버리는 것만 같구나.
나는 이 글을 단지 너를 위한 추모, 또는 세상을 먼저 떠난 사람에 대한 의례적 미화로서만 쓰려는 게 아니다. 이 글은 너의 짧은 삶에 대한 행장(行狀)이자 일대기이며, 우리 이공학계의 암울하고 황막(荒漠)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들의 삶이 얼마나 무상하고 허망한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사색을 담아보는 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 사고들에 대한 사람들의 무심함과, 살아남은 사람들 위주의 이기주의적 수습 태도, 반성과 참회가 없이 책임 모면에만 급급해 하는 일그러진 세태에 대한 조명도 함께 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큰 사고가 났을 때마다 의례적으로 반복되는 말이기는 하다만, 다시는 이런 비참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하나의 단초가 되도록 하려는 간절한 의도도 들어 있단다.
아들아!
이제는 불러도 대답을 할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린 내 아들아!
내 모든 것, 내 생명 두 개, 세 개를 주고서라도 네가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랑하는 내 아들, 소중한 내 아들아!
너는 나에게뿐 아니라 우리 집안 전체의 희망이고 기대였으며 든든한 기둥이었고, 또 여러 가족 구성원들의 꿈이고 미래 그 자체였지. 네 작은 몸 위에 그런 엄청난 부담의 짐을 지우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넌 나와 우리 가문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네가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다니 이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니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치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그 꿈을 깨고 나면 다시 예전의 그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그런 마음이란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연구실엔 몇 개의 크고 작은 달력이 책상 앞, 창문 가, 의자 옆 등에 걸려 있거나 놓여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5월 달 그 모습 그대로 정지된 채 까맣게 죽어 가고 있단다.
5월,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계절의 여왕'이니,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달이니 하지만, 금년 5월은 나에게 '가장 잔인하고 잔혹한 달'이 되고 말았구나. 사실 5월이란 계절은 얼마나 싱그럽고 아름다운 시절이냐. 온갖 나무와 풀들이 그 생생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다른 계절에는 볼 수 없는 향기로운 꽃들이 아낌없이 그 자태를 뽐내는 그런 계절이 아니냐.
50 중반을 넘어선 나도 해마다 5월이 되면 괜히 마음이 풍성해지고 어디론가 그 자연의 신비로운 미소를 찾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니, 젊은 사람들이나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
그러나 올해 5월, 그 중에서도 더할 수 없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중순의 13일, 이 날 오후는 나에게 캄캄하고 아득한 지옥, 영겁의 암흑 속으로 추락해 버리는 그런 날이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네가 사고를 당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신음을 토하고 있을 그 순간에, 나는 한가하게도 동료교수들과 모여 앉아 농담이나 지껄이며 있었으니, 이게 얼마나 악랄한 악마의 장난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역설이었단 말이냐.
정말 한 치 앞도 내다 볼 줄 모르는 몽매한 인간의 무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표가 아니겠느냐. 또 무명(無明)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다는 중생의 가엾은 표본이 아니겠느냐.
이 세상에 부모의 명색을 가진 자라면, 자식이 이 세상을 하직하며 마지막으로 부르짖는 고통을 옆에서 지켜 주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갖기 위해 손이라도 한번 꼭 잡아 주어야 제대로 된 부모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는 우리에게 그런 부모 노릇도 못하게 하고, 허무하게도 썰렁한 병원 침상에 누워 눈도 감지 못한 채, 네가 사랑하는 우리 가족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한 채, 남의 손길에 의해 임종을 맞이하고 먼 길을 외로이 떠났으니 이 얼마나 가슴 쓰라리고 억장이 무너지는 노릇이라는 말이냐.
영안실에서 너의 그 날카로운 시선의 사진을 영정으로 모시고, 조문 오신 분들을 만날 때 나는 이성이 모조리 달아나 버린 텅 빈 몸, 빈 껍데기이자 허물로만 남아 한갓 시간의 여울에 얹혀 주저앉아 있어야만 했단다.
어쩌자고 아직 어린 네 두 누이동생들의 가녀린 어깨 위에 상주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너는 그 높다란 단 위에서 무심하게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만 있어야 했단 말이냐. 너를 가르치던 선생님들과, 네 까마득한 선배들과, 살아 있었더라면 어깨를 툭툭 치며 농담을 건넸어야 할 친구들과, 또 이 아버지의 동료 교수들, 선배님들, 심지어는 나를 가르치셨던 은사 선생님들까지 네 사진 앞에 서서 오열하며 절을 하고, 넌 민망하게도 그분들의 절을 받으며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단 말이냐.
또한 이 세상의 이법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그런 상황, 어찌 부모가 되어 자식의 영정 앞에 절을 해야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역리(逆理)가 태연하게 벌어질 수 있는 것이란 말이냐.
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내가 죽어서 너와 네 동생들이 조문 오신 분들을 맞이하고, 내가 남긴 유품들을 정리하고, 또 이런 추모의 글을 네가 써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순리이고 상식이 아니겠느냐.
왜 너와 나의 위치가 이렇게 바뀌어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지 않으면 하루도 제대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놓았단 말이냐. 아무리 세상에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정해지지 않았다지만, 너를 이렇게 보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아직도 도무지 수용이 되지를 않는 일이란다.
너를 보낸 그 날로부터 그 동안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 같기도 해서 나에겐 마치 시간 감각이 사라진 것만 같구나. 불과 이틀 전만 해도 멀쩡하게 살아 연구에 몰두하던 네 몸을 화장(火葬)하여, 네 할아버지 산소 주변에 내가 직접 몇 줌의 가루로 변해버린 유해를 뿌렸는데도, 정신 빠진 사람처럼 문득 네가 전화를 걸어올 것 같아 전화기를 바라보며 기다리기도 하고, 어디 멀리 출장을 갔다가 이제 돌아왔다고 집에 들러 초인종을 누를 것만 같아 출입문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기도 한단다. 그만큼 너와의 이별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를 않고, 현실로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너를 떠나 보내고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집에 틀어박혀 살다가 보니, 평소에도 표준에서 미달이던 체중은 이제 52㎏이 돼 버렸다. 그 때 이후로 머리를 손질하지도 못해 머리칼이 귀 아랫부분까지 덮어 버린 지 오래다. 평소에 너도 이발소 가는 것을 매우 귀찮아해서 긴 머리칼을 덥수룩하게 하고 다녔는데, 지금 내 모습이 바로 너의 그런 모습이란다.
사고 후 두 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 사후 수습이 제대로 되지 못해 너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구나. 수사 당국에서 늑장을 부린 탓도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곳곳에 작용하여 일을 어렵게 만드는구나. 다만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하여 너의 후배들이 실험실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데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고, 또 네가 하고자 했던 일들, 그것을 다른 분들이 이어서 계속 해 나갈 수 있도록 기념사업을 해 달라고 학교측에 요구하고 있단다.
그것이 너의 평상시 성품에 비추어 마땅한 일인지 아닌지는 잘 판단할 수 없지만, 네 이름 석 자는 우리나라 이공계와 네가 다녔던 학교에 영원히 남기고 싶은 것이 우리 가족의 작은 욕심이고 뜻이란다. 먼 훗날 네가 다시 이 세상에 환생하여 올 수 있다면, 네 이름으로 된 재단의 지원을 받아 안전하고 편안한 실험실 환경에서 마음껏 연구하고 공부하여 인류를 위한 획기적인 연구업적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제 다음 편지에서부터 네가 이 세상에 와 살아갔던 자취를 되새겨보면서, 나와 우리 가족의 너에 대한 사랑, 네가 공부했던 곳의 열악한 현실, 꿈 많던 한 공학도를 허무하게 앗아간 제도와 구조, 이기심으로 가득한 우리 주변의 추악한 세상 인심, 그리고 이왕 네가 먼저 떠나기는 했지만 도대체 우리에게 태어나고 늙고 죽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해 봄으로써, 네가 없는 이승의 내 삶과 생각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는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와 이 세상 사람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 글은 긴 편지를 시작하는 것이니 만큼 이 정도로 대략의 성격과 허두(虛頭)만 떼도록 하겠다. 살아서 나누지 못한 대화를 이런 형식의 일방적 편지로 대신해야 하는 모순에 대해 다시 한번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오늘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자.
부디 편안히 쉬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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