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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석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만국기가 가을바람에 펄럭인다. 선생님들과 학부형들이 어제 운동장에 하얀 선을 그어 놓았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었는데, 날씨가 화창하다. 아침 9시30분 행진곡에 맞추어 지석초등학교 전교생 40명과 병설 유치원 10명, 어린이 입장을 한다.
20년 전에는 800명 넘게 모였던 학생수가 40명에 지나지 않지만, 숫자가 적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 2학기에 새로 부임해 오신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씀이 이어졌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계절입니다. 금년에는 유난히도 늦은 가을 장마에 마음 졸이시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지석 가을 운동회를 맞이하여 정말로 하늘이 높고 들녘의 벼이삭들이 넘실넘실 춤추게 하는 날씨는 우리를 진정 축복해 주고 있습니다.
황해도 연백평야 가까이 최북단마을 학교, 삼선리, 인사리, 지석리 들녘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학교, 작지만 큰 가을 운동회를 갖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율두산 기슭 아래, 교동의 넓고 푸른 들판 속에서 작지만, 큰 꿈들을 만들어 새 세상을 펼쳐갈 지석어린이 여러분, 비록 우린 숫자는 작아 보이지만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이렇게 큰 운동회를 알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동안 배우고 익힌 우리들의 재주를 어른들 앞에서 마음껏 자랑할 시간이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다 함께 두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파이팅 을 외쳐봅시다 지석 파이팅!"
개회식이 끝나자 드디어 운동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난 밤 우리 고사리 손들의 소망으로 맑게 갠 하늘, 그 하늘 아래 펄럭이는 만국기, 청백 양 팀에서 뜨거운 응원전이 펼쳐졌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지석 초등학교에서 미모를 자랑하는 정종숙 선생님의 지휘 아래 유치원 어린이부터 3학년 어린이들의 60미터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아이들의 행렬이 달리기 출발선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이 자기 엄마 아빠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린다.
"야, 승완아! 힘껏 달려!"
아이들은 이를 앙다물고 결승점을 향하여 힘껏 달린다. 잘 뛰면 일등이고 못 뛰어도 3등이다. 학부형 위원들이 아이들 팔뚝에 도장을 찍어준다. 모든 아이들이 삼색 깃발 아래 서 있다. 전교생이 다 3등안에 들었다. 참 좋은 학교이다.
나도 옛날에 삼색 깃발아래 서 있고 싶었는데, 나는 거의 삼색 깃발 아래 서 있지 못했다. 선생님이 내 팔뚝에도 1등 도장을 찍어주길 바랬지만, 5학년 때 운 좋게 딱 한번 3등을 해 본 것 외에는 나는 등수에 들지 못했다. 옛날 일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가을 운동회가 없었으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매일 이마에 청백 띠를 두르고 매스게임 연습을 했다.
매스게임은 전교생이 참여했고 또 학년별로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곤봉에 긴 끈을 달고 곤봉 돌리기도 했다. 곤봉을 돈을 주고 사지는 못하고 대신 나무를 깎아 곤봉을 만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한 시간 동안 곤봉 돌리기를 하면 곤봉 손잡이가 반질반질하다. 운동회날 가져갈 먹을거리를 장만하기 위하여 산에 올라가 임자 없는 산밤을 땄다. 그래서 으레 가을 운동회 하면 밤이 생각난다.
학교 정문 옆으로는 국밥 장사들이 늘어 서 있고 풍선이며 장난감 장사들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아이들 넋을 쏙 빼 놓는다. 그 시절 운동회가 없었으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낟가리가 끝난 쓸쓸하고 아득한 벌판, 무거운 수수 그림자, 비로소 다가올 긴 겨울의 침묵을 알리는 해 저문 하늘가의 기러기 떼를…. 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며 견딜 수 있었을까.
운동회 경기 종목도 많이 달라졌다. 가을 운동회의 백미인 기마전도 사라졌다. 학생수가 모자라니, 협동심을 배양하는 경기로 대치되었다. 아이들은 재미있는지 모르지만 어딘가 쓸쓸하다.
모든 사람이 재밌어 하는 장애물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매트 위에서 재주를 한번씩 넘고 가로 막대를 넘는다. 그물망도 없다. 그래도 아이들이 최선을 다한다. 점심시간 바로 직전 '맛있게도 냠냠' 바구니 터트리기가 그나마 가을 운동회 분위기를 살려준다.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손을 잡고 나와 선생님의 호각 소리와 함께 힘껏 오재미를 던진다. 청 팀 바구니가 먼저 터졌다. 바구니에서 색종이가 쏟아져 나오고 '즐거운 점심시간'이 펼쳐진다. 나무 그늘 아래 잔디밭에 동네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다. 먹을 게 풍성하다.
더러 햇밤을 삶아온 집도 있지만, 밤 대신 포도나 사과, 양념통닭이 등장했고 삶은 계란도 종적을 감추었다. 병으로 된 ○○사이다도 캔 음료로 바뀌었다. 매미가 스르르 울고, 잠자리들이 낮게 비행을 하고, 아빠들의 짓궂은 농이 오고 간다. 할머니들은 어린 손자들 챙기기에 바쁘시다.
아이들은 먹을 생각은 안하고 자기들끼리 왔다갔다 노느라 분주하다. 내가 김밥을 먹으며 아람 엄마에게 한마디했다.
"아람 엄마, 올해 상수리 많이 달렸다는데 작년처럼 올해도 극성스럽게 많이 주울 거예요?"
"아뇨, 곧 가을 추수를 해야 하는데 바빠서 상수리 주울 시간 있겠어요."
"정말이지?"
"모르지요. 막상 남들이 줍는 거 보면 가만 있겠어요?"
"그러면 그렇지!"
점심시간이 끝나고 가장 행렬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제각기 다 다른 복장과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운동장을 돈다. 사내 녀석들이 치마를 입고 입술에 립스틱을 칠했다. 본부석 앞에 잠깐 정지해서 자기들끼리 준비한 개인기를 선보이다. 다 배꼽을 잡고 웃는다. 예전의 떠들썩한 함성이나 응원전은 없지만, 아기자기한 가을 운동회가 계속된다. 이 다음에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가을 운동회를 어떤 모습으로 추억하게 될 지 그것이 궁금하다.
깊어 가는 가을, 지석초등학교 운동회도 가을 햇살처럼 반짝거린다. '운동회'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을 들뜨게 했던 가을 운동회, 운동장 한복판에서 나는 40년 전 운동회와 지금의 운동회를 동시에 맛본다. 부지런히 아이들 표정을 사진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