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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훈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지금은 분명 생물 시간인데도 그네들이 펴놓은 것은 영어나 수학에 관련된 책들이라는 것. 사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3학기 초부터다. 하지만 그때부터 수업 시간 중 자습을 행하는 친구들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수능 시험 공부가 급하다고 하더라도, 역시 수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내신 성적과 직결되는 수업 시간에 자기 공부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또한 적발되었을 시에는 꼭 약간의 체벌이 따를 만큼 그것이 용납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추석이 지난 요즘에 이르러서는 수업 시간에 몰래 자습을 하는 현상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대해서 선생님들은 전반적으로 불쾌하다는 반응이셨고, 아예 몇 분의 선생님들께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못 박으셨다.

"내 수업 시간에 다른 과목 공부할 생각 절대 하지 마라. 그것만큼 바보짓이 없는 거다. 공부란 건 말이다, 무엇보다도 학교 수업을 바탕으로 해야하는 법이다. 그런 건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공부를 한다고 수업 시간에 딴 짓 하는 녀석치곤 공부 잘하는 놈을, 너희들 선배 때부터 보질 못했다. 또 내 수업 시간에 수능 공부 한다고 설치다가 걸리는 놈 있으면 가만 안 놔두겠다."

이에 반해 학생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수업 시간 중 자습을 행하는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훈계하기보다는 다른 시각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습을 이해해 주시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아, 이거 우리나라 교육이 문제야. 내 시간에 딴 공부 하는 것도 다 교육 구조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는 거야. 문학 수업 가르치라고 해 놓고 수능은 봐야 하지 이게 어디 문학을 가르칠 만한 상황이냐? 어디서 문학의 가치를 논할 수 있겠냐? 이러니 너희들이 문학책 밑에 딴 책을 숨겨 놓고 공부 할 수밖에 없지."

"(작문 시간 중 다른 공부하는 학생을 보시고)다른 거 공부하고 있네. 그래, 그게 차라리 공부 안하고 자는 것 보단 났다. 작문 말고라도 수능 공부 하는 게 낫지."

또한 어떤 선생님들은 아예 수업을 일찍 끝내시곤 남은 시간을 자습하라고 배려하시기도 한다.

최근 들어 이렇듯 학생들이 자습을 지향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 당사자들 입장에서조차 그것을 편한 마음으로만 하고 있지는 않다. 그야말로 수업 시간 교과서를 펴고 그 밑에 깔아 자습을 할 수 있는 상황.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들을 꾸짖으시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평소 수업시간에 제자들을 직접적으로 걱정해주시며 교육 전반에 대한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해 주시던 선생님들이 아닌가. 그분들을 상대로 수업 시간 중 일련의 배신(?)을 하게 되는 우리 자신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어떤 친구가, 대뜸 원래 자리가 맨 뒤인 나에게 찾아와서는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자리 바꾸자고? 왜 다른 거 공부하게?"
"응, 내가 맨 앞자리라서 선생님들한테 딱 들키잖아."
"그 선생님 시간에 다른 것 공부해도 뭐라고 안 그러시는 것 같던데……."
"그래도 너무 보이는 데서 그러면 죄스럽잖아. 너 이번 시간 수업 들을 거면 바꿔 주라."


수능이 드디어 40일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에 따라 학생들이 느끼는 압박감 또한 대단한 것이어서, 흔히들 수업 시간에 내신과 관련된 학과 수업을 듣기보다는 대학 가는데 직접적인 시험인 수능 시험을 대비하여 공부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게 된다. 사실 수능 공부는 그야말로 자기 공부인지라 개개인마다 해야 할 공부라든지 방식이 각자 다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점차적으로 수업 시간에 보조를 맞출 수 없는 괴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변명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3이 되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수능을 치르기 위해 주어진 1년이 심리적으로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속화시키는 것이 내신과 관련된 수업과 시험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다지 유쾌하지도 못한 마음을 뒤로 하고 제 갈 길을 구해서 갈 수 밖에는 없는 우리들이다.

ⓒ 서강훈
오늘도 수업 시간에 자기 공부를 하기 위해서 다른 책을 폈다. 며칠 뒤에는 모의 고사 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이런 상황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곰곰이 생각해 볼 때 과연 어디서부터 이런 일이 생겨났는가 하는 의문도 들고…….

아마도 그것은 우리들만의 얕은 궁리로는 풀어나갈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성격의 문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념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즉 선생님들의 수업을 듣기 위해 존재하는 학교, 교실에서, 다른공부를 하겠다며 다른 책을 펴야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으며 그러한 현상이 몇대째 대물림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사실 문학에 대해서, 철학(윤리)에 대해서, 우리 나라 역사(국사)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은 것이 많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러한 것들을 진정으로 지향하기 보다는 지양해야 하는 분위기다.

대학에 간다는 것도 어쩌면 그런 부조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어쩌면 수능이란 것은 대학가는 데 필요한 소양보다는 대학으로 도피하기 위한 능력치를 가늠하기 위한 잣대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우리의 상황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딜레마다. 당사자들에게 세상은 그러한 딜레마를 인식할 수 있는 여유조차 쥐어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딜레마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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