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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영당 전경
송호영당 전경 ⓒ 오창석
조선 중기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훈구 세력(勳舊勢力)'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 왕조를 창건한 개국 공신들과, 세조의 쿠데타에 공을 세워 정권을 잡은 이들, 중종 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 세력 등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여 역사의 흐름에 생기를 불어 넣은 한 시대의 주체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의 꿀맛에 취해 시대의 변화를 수용할 힘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역사의 수레바퀴 앞을 막아선 사마귀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눌재 박상의 영정
눌재 박상의 영정 ⓒ 오창석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달은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그들을 대체한 세력은 '사림(士林)'이었다. 사림의 연원은 조선의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와 길재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복하여 지방으로 낙향한 이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향촌에 기반을 두고 끊임없이 후학들을 길러 내 중앙 정계로 진출시켰다. 이런 가운데 1515년(중종10년) 담양 부사로 있던 눌재 박상(訥齋 朴祥)은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신씨복비소(愼氏復妃疏)를 왕에게 올리게 된다.

소(疏)는 중종 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에 대한 복위를 주장한 것으로, 폐비 신씨는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박원종 등에게 살해 당한,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이었다.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로 있다가는 자신들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해서 왕을 압박해 폐비를 관철시켰는데, '이는 의리와 도를 저버린 일'이므로 신씨를 복비 시키고 박원종 등은 국모 폐출의 죄를 물어 관작을 추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상소로 인해 박상은 귀양을 가게 되는데 이 문제를 두고 조정은 논쟁에 휩싸였고, 그 동안 무오, 갑자사화의 여파로 약화되었던 사림이 의리와 명분을 내세우며 결집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권력자의 의지에 반하는 주장이란 목숨을 잃을 뿐만 아니라 멸문지화까지 당할 수 있는 엄혹한 시대였음을 놓고 볼 때, 실로 의기 넘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송호영당에 모셔놓은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위패
송호영당에 모셔놓은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위패 ⓒ 오창석
이러한 실천적 의리 중시는 그의 이전 행적에서도 나타난다. 1505년(연산군 11년) 전라도 도사로 부임한 그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애첩의 아비인 '우부리'라는 자가 권세를 등에 업고 남의 토지를 빼앗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의 온갖 비행을 일삼고 있는 것을 보고, 잡아다 장살(때려 죽임)해 버렸다.

왕의 장인뻘이 되는 자를 잡아다 죽인 행위는, 절대 왕정의 군주라 하더라도 타락한 폭군인 연산군을 임금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그의 높은 도덕적 지향과 기개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어서 연산군이 체포 명령을 내리자 그는 제 발로 상경길에 올랐는데 나졸들과 길이 엇갈려 붙잡힘을 면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종 반정이 일어나 목숨을 구했다. 1519년 기묘사화를 당해서는 모친상으로 인해 화를 면하였는데 조광조가 능주로 귀양을 오자 광주 밖으로 나가 맞이 하며 의리를 다하였다.

광주시 무형문화재 제16호 눌재집 목판각은 원집(原集) 7권, 속집(續集) 5권으로 되어있다
광주시 무형문화재 제16호 눌재집 목판각은 원집(原集) 7권, 속집(續集) 5권으로 되어있다 ⓒ 오창석
그는 학자로서도 <동국사략>을 저술하며 고려말 이색, 정몽주 등의 절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고 하서 면앙정 송순 등 당대의 학자, 문인들과 깊은 교우를 가졌으며 1515년에는 청백리에 뽑혔다. 그의 기개 높은 절의 정신과 실천은 당대의 사림에 큰 영향을 끼쳐, 기묘사화를 거치며 크나큰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중종 말년에는 다시 사림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정신은 후대에도 이어져, 조카인 사암 박순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우고 이황, 이이, 성혼, 기대승 등과 교우하며 조선 중기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꼽힌다. 그는 1565년 대사간 재직시 을사사화를 일으켰던 윤원형을 탄핵, 파직하여 부패한 훈구 세력을 일소하였고 선조 때 14년간 영의정으로 재직하며, 사림 정신에 기초한 조선조 중흥의 새 기운을 불어 넣었다.

조선 왕조가 500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저력은 끝없는 자기 갱신을 통한 도덕적 완성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고자 했던 사림의 노력이 밑바탕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500여년 전 그들이 걸어간 시대와 삶의 길을 보며 '개혁'이란 짐을 어깨에 메고 헉헉대고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본다.

사암 박순의 영정
사암 박순의 영정 ⓒ 오창석
눌재, 사암이 나고 자란 광주 광산구에는 그들의 문집을 판각한 눌재, 사암 목판각집과 위패가 모셔진 송호영당(松湖影堂)이 있으며 그분들을 기려 이름 붙인 눌재로와 사암로가 있다. 가까이에는 후손이며 일제말 신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시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가 있다.

눌재의 후손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
눌재의 후손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 ⓒ 오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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