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도 있겠지만 구림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들일을 가는 사람도, 걸어 가는 이도, 우산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촌로들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그곳 마루에서 발을 내디뎌 고무신을 신는 일마저 굼뜨기 한량 없고, 말을 걸어도 묵힌 된장 같은 대답이 한 박자 걸러 되돌아 온다. 황토를 켜켜이 밀어 넣어 만든 낮은 돌담도 느리게 휘어져 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 아래 모든 풍경이 느린 재생 화면처럼 천천히 지나간다.
긴 시간은 모든 것들을 닳게 하고 완만하게 만드는 듯하다. 그들은 2200년을 이 땅에서 살아왔다. 앞으로도 2200년을 더 살아갈 땅에서 무에 그리 서둘게 있으리.
구림의 역사는 삼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의 바다는 간척된 농토로 변하여 옛 자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지만 구림은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부산, 인천항 정도의 가치를 지녔을 이곳은 반도의 산물이 모여 중국과 일본, 혹은 더 먼 나라까지 오고 가는 중요한 교역항이었다.
먼 옛날, 배가 들어 오면 짐을 부리는 사람들로 항구는 분주하고 긴 항로를 헤쳐 온 뱃사람들은 주막에 들어 거나하게 술잔을 들며 객고를 달랬을 것이다. 이 곳엔 조선소, 커다란 창고, 거간꾼, 짐꾼, 그리고 이들을 지키는 군사시설, 교육기관까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융성했던 이곳의 옛 영화를 말해 주는 것 가운데 ‘구림도기’가 있다. 이곳의 수 많은 가마터에서는 8~9세기 경 이땅에서 최초로 유약을 발라 구워낸 ‘시유도기’가 만들어 졌는데, 이곳에서 나는 황토로 만들어진 구림도기는 뱃길을 따라 반도 전역이며 먼 나라에까지 퍼져 나갔다. 전라도의 황토가 뱃길을 따라 반도며 세계 각곳으로 퍼져 나간 셈이다. 이런 융성한 기운을 타고 신라 말의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최씨 여인이 계곡에서 목욕을 하다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었는데 덜컥 임신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열 달이 지나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 하여 숲속에 내다 버렸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숲엘 다시 가 보니 비둘기 떼가 아이를 보호하고 있어, 이를 신령스럽게 여겨 도로 데려다 길렀다. 그 아이가 성장하고 출가하여 도선이 되었다. 그로부터 이 마을의 이름은 구림(鳩林)이 되었다”
그로부터 이곳은 도선의 구림, 구림의 도선이 되었는데 세간에 알려진 대로 도선의 사회적 영향력은 엄청나서 풍수지리설의 처음과 끝에 그가 있으며, 태조 왕건이 한번도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지만 고려왕조 출현의 정당성과 국가 이데올로기를 그로부터 수혈 받았다. 승려였지만 구림이라는 왕성한 경제, 정치, 문화, 국제적 공간 속에서 성장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만하다.
또 하나 구림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 가운데는 왕인 박사가 있다. 영암에서는 축제까지 열며 왕인을 추모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역사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의 역사서에 백제로부터 건너 왔다는 것이 유일한 기록인데 일본에 큰 도움을 줬으니 그들이 돈 내서 큰 축제를 벌이는 것은 당연하나 우리 땅에 살았던 기록이 없는 이를 찾아내 기리는 일은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남긴다.
구림에 오면 도갑사를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도선국사가 세운 이 곳은 고찰다운 풍모를 간직하고 있는데 도선국사의 업적을 기록한 유일한 비문이 새겨진 ‘도선수미비’, 국보 50호 ‘해탈문’, 배 모양의 큰 돌그릇인 ‘도갑사석조’를 눈 여겨 볼만하다.
이외에도 구림은 그 오랜 세월만큼 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는데, 5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구림마을 대동계’의 모임 장소였던 ‘회사정’을 비롯해 왕인이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다고 전해지는 ‘상대포’, 마을의 여러 곳에 산재한 ‘구림도기 가마터’와 이를 현대적으로 되살린 ‘영암도기문화센터’ 등이 있다.
굳이 알려진 유적을 따라가고 싶지 않다면 마을 속의 황토 돌담길을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거닐어 보는 것도 좋을 법 하다. 천천히 걸을수록 진하게 느껴지는 오래된 숲과 흙의 향기를 맡으며 2200년의 시간 속을 유영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거기에다 월출산에 떠오르는 달을 구림에서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영암 독천읍내 ‘독천식당’에서는 세발낙지에 갈비를 곁들인 ‘갈낙탕’이 여행객의 입맛을 돋우고 영암읍내의 ‘월출산식당’에서는 사라져 가는 ‘짱뚱어탕’의 진미를 맛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