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를 두고 일각에서는 '복 받은 자들의 터'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터' 를 일구고 보존하는 것은 모든 이의 숙제이기도 하다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 있는 바위 하나에도 전설과 설화가 깃들어, 더욱 애틋한 자연. 다시 떠나는 서귀포 70경은 오랜 세월 바람과 파도에 씻기며 버티고 서 있는 외돌개를 찾았다.
오름과 바다 해안절경이 아름다운 삼매봉 해안가에 구비전승상으로 불리는 장군석이 있다. 외돌개라도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장군석은 둘레 약 10m, 높이 20m인 바위이다.
외돌개는 '장군석'에 얽힌 최영 장군의 지혜를 확인하듯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제일 먼저 '우-와-' 하고 환호성을 올린다. 이는 가을햇빛을 받아 바다가 요술을 부리기 때문이다. 아침바다는 금빛 물결에 반짝여 눈이 부시다. 또한 해질녁 외돌개 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온통 바다를 피로 물들인다.
그것뿐이 아니다. 그 금빛 물결 위에 떠 있는 외돌개의 모습은 또 한번 탄성을 자아낸다. 전망대 오른편에 쓰여진 비문에는" 외돌개는 화산이 폭발 할 때 용암이 분출하여 굳어진 기암으로 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바위이다. 이 외돌개가 선 고석포는 우두암 .선녀바위 등 기암괴석이 둘러싸여 남주의 해금강이라 한다" 라고 쓰여져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전설처럼 말이 없다. 그러나 손에 잡힐 듯 우뚝 서 있는 외돌개를 바라보면 그 전설을 파헤치듯 굳어진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외돌개에 대한 전설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제주도를 강점했던 목호의 난을 토벌할 때 외돌개 뒤에 있는 범섬이 최후의 격전장이었다 한다. 전술상 외돌개를 장대한 장수로 치장시켜 놓았는데, 목호들이 이를 보고 대장군이 진을 친 것으로 오인하여 모두 자결하였다 한다. 그때부터 이 외돌개는 '장군석'이라 불렀다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그래서 인지 전망대에서 외돌개를 보면 마지 장군의 모습처럼 우직한 모습으로 보여진다.특히 기암괴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병사가 방패를 앞에 두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그러나 육지에서 보이는 범섬은 섬 속의 섬으로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전술상 외돌개를 장대한 장수로 치장시킨 주변의 기암괴석을 감상하기 위해 산책로를 따라가 보면 또 다른 감회에 젖어든다. 바다를 옆에 끼고 산책로를 걸어보면 바다냄새는 없고 풀잎 향기가 그윽하다. 오래된 해송이 바다와 함께 펼쳐져 있으며, 넓은 잔디와 오름으로 이어지는 야생화. 새소리는 모든 이가 꿈꾸는 이상향이다.
그 동화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소의 머리 같다'는 소머리 바위 위에 서게 된다. 소머리바위 위에서 바라보는 외돌개 주변의 풍경은 '남주의 해금강'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바다 위에 금방 떨어질듯 쌓아올린 기암괴석은 마치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기와처럼 보인다. 이곳에서는 기암기석에게 내 마음을 다 주어도 괜찮다. 왜냐면 지척에 범섬과 문섬이 나를 에워싸고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책로를 걷다 보면 전설 속 외돌개는 간 곳이 없고, 보이는 것은 구름 걷힌 빈 하늘에 '가을사람' 뿐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할망바위라고 불러왔을까? 여기에도 또 하나 바위가 된 할머니와 고기잡이 할아버지의 애절한 설화가 얽혀 있다.
어느 노부부가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어느 날 멀리 고기를 잡으러 나가게 되었다. 걱정이 된 할머니는 매일같이 외돌개가 있는 자리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숨을 거뒀고 할머니는 오래도록 기다리다가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후에 외돌개가 된 할머니 곁으로 할아버지의 시신이 돌아와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한데 엉켜 큰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다시 헤어지지 말자고 서로 엉켜 큰 바위가 된 설화. 위기를 지혜로 극복했다는 최영 장군의 지혜. 그리고 가을 낭만 한 컷 가슴에 담아갈 수 있는 산책로.
외돌개 해안기암에 서서 세상을 보면 가을하늘에 희 노 애 락 4가지를 모두 그릴 수 있다.그리고 자연의 신비는 곧 나를 변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