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반포 557돌을 기리는 10월 9일 한글날 국민참여통합신당의 김근태 원내 대표는 서글픈 하루를 보냈다. 한자로 표기된 국회 본회의장 명패를 통합신당이 자체 제작한 한글 명패로 바꾸려고 했지만 박관용 국회의장 등의 반대로 무산됐기 때문이다. 국회에서조차 우리말 우리글의 소중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김근태 대표는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에서 한자 명패 대신 한글 명패를 쓰는 것은 정말로 당연한 일"이라면서 "대한민국의 얼굴인 국회에서 한자 명패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권위주의적 관행"이라고 성토했다. 김 대표는 또 통합신당의 한글명패 교체 요구에 대해 일부에서 한건주의 정치, 이벤트 정치로 폄하하는 데 대해서도 한글의 가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속좁은 소견이라고 지적했다.
김근태 대표는 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할 때부터 한글 사랑을 몸소 실천해 왔다. 한 때 의도적으로 영어를 섞어 쓰지 않았을 정도로 우리말 우리글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강하다.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이던 15대 국회 시절에도 한자 명패를 한글 명패로 바꾸려고 시도했고 16대 국회에서도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기 위해서도 애를 쓰고 있다.
한글날을 앞둔 8일 국회의사당 본청 통합신당 원내대표위원실에서 김 대표와 함께 한글 명패와 한글날의 국경일 제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일문 일답.
- 국민참여통합신당 의원들이 한자 명패를 한글 명패로 바꾸려는 이유는?
"작은 것부터 개혁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국회에서 한자 명패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권위주의적 관행이다. 통합신당 의원들의 국회 명패를 한글로 바꿈으로써 거창한 구호보다는 의정 활동 속의 작은 것부터 개혁하면서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한글 명패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가?
"국민의 대표 기관이자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의원 명패를 '한자'에서 '한글'로 바꾸는 것은 의미있는 변화다. 또한 48년 제헌국회가 제정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에 따른 공문서 한글전용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 예전에도 한글 명패를 사용하게 하려다 국회 사무처의 승인을 받지 못한 적이 있는데.
"92년 한글학회 등 '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이 국회의사당을 방문해 국회의원 299명 전원의 이름을 모두 한글로 새긴 명패를 당시 박준규 국회의장을 만나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무처에서는 한글명패 사용이 규정에 없다는 절차상의 이유를 들어 허용하지 않았다. 이 분들은 당시 유일하게 한글명패의 뜻에 동조했던 국민당 원광호 의원에게 명패를 전달했다."
-올 한글날에도 본회의장의 한자 명패를 한글 명패로 바꾸려고 했는데 일단 무산됐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회 사무처에서는 한글 명패를 만드는 데 대해 '관행'을 이유로 들어 찬성하지 않고 있다. 굳이 한글 명패로 바꾸려면 원내 대표의원들끼리 합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관행을 무시하고 한글 명패를 허용했을 때, 일부 의원들이 영문 문패를 요구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답변을 해왔다. 대한민국 국회이기 때문에 한글로 국민의 대표 이름을 표시하는 게 당연하다."
- 다른 당에서 어떤 태도인가?
"8일 오전 원내 대표 의원회담이 열린 자리에서도 한글 명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른 당의 원내 대표들은 한자 명패를 써온 '관행'을 따르자고 주장했다. 그래서 '외국 인사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회에 방문하여 한자 명패를 보면 우리나라에 아예 글이 없는 줄로 착각할 수 있다'면서 '다른 당에서 반대를 한다면 통합신당만이라도 한글 명패를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건 안된다'고 말했다. '규정에도 없다'는 것이다. 일부에선 행정부가 한글-한자를 병용하기 때문에 입법부도 따르는 게 좋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는 '행정부의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입법부의 원칙을 정하여 실행하면 된다'고 말했다."
-15대 국회 때도 한자 명패를 한글로 바꿔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는가?
"한자 명패를 한글 명패로 바꿔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원내 총무가 '김근태 의원 같은 거물이 그렇게 작은 문제로 튀려고 하느냐'고 했다. 솔직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국회 명패를 우리글인 한글로 쓰고 싶다는데 이것이 왜 '작은 문제로 튀려는 행동'이라고 눈총을 받아야 하는가."
-16대 국회에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이번 국회에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기 위한 법률안이 통과되기는 힘들다. 지금은 주5일 근무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 아직 한글날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우리나라의 휴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국회의원들과 국민의 여론이 좀더 형성되어야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드는 일도 본격적으로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기 위해 애를 쓰는 분들이 볼 땐 아쉽겠지만 지금 상황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자는 뜻으로 한글날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행정자치위원회에 상정된 것도 의의가 있다는 말이다."
-16대 국회에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지 않으면 이 법률안은 폐기되고 만다. 그렇다면 17대 국회에서 국민참여통합신당이 다시 이 법률안을 발의할 용의는 없는가?
"이 문제는 특정 당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당을 뛰어넘는 활동이 필요하다. 다른 당 의원들 중에서도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힘을 모아 발의하는 게 좋다. 17대 총선에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드는 데 찬성하는 분들이 많이 당선되기를 바란다."
- 언제부터 한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는가?
"7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한문학자 임창순 선생(1914-1999)이 한글에 대해 쓴 글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한문학자인데도 한자만 중요하다고 한 게 아니라 '한글을 써야 한다'고 쓴 것이다.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누구든지 전문가들은 자기 영역을 신비화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한문학의 대가인 임 선생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의 능력과 인격과 품격을 갖추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말과 글이다. 그 다음이 외국어다."
- 세계화를 위해 영어 공부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주장에 동의한다. 나는 70년대 군사 독재 시절에 영어를 쓰는 사람들을 미워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영어 쓰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며칠에 한번씩 전화로 영어회화 공부를 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외국어 실력을 쌓는 것도 또 하나의 능력이다. 민족적, 사회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외국어 공부도 필요하다. 우리의 감정을 한글로 표현하되,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와 중국어 같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야 제대로 세계화를 할 수 있다. 한글을 강조한다고 해서 영어와 한자를 반대한다면 너무 방어적, 폐쇄적인 주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외국어 때문에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민주화 운동을 할 당시에는 영어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제도권에 들어온 뒤로 영어를 쓰곤 했다. 내가 한글만 쓰면 주위에서 '여전히 고집이 센, 재야 운동권'으로 취급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글만 쓰려는 나에게 눈총을 보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글 사랑 정신이 흔들리곤 했다."
-한글날을 문화국경일로 제정하자는 주장이 있다. 2000년에 신기남 의원 등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기 위한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아직까지도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글날은 당연히 국경일이어야 한다. 한글날은 원래 공휴일이었는데 90년에 쉬지 않는 보통의 기념일로 격하되었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나랏말을 기념하는 유일한 나라이며 전 세계의 많은 석학들이 한글의 과학성과 문자학적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문자의 창제는 국가의 건립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가치를 생각할 때 한글날은 당연히 국경일이 되어야 한다."
-한글날이 13년째 국경일로 승격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글의 우수성과 역사적 의미를 도외시한 채 단순히 '하루 쉬는 날'로 경제적 측면의 효과만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도한 영어 열풍과 외국어 남용을 볼 때 점차 한글의 중요성이 잊혀져 가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원인이라고 본다."
-한글의 가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한글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우수한 문자이며, 우리의 정신과 역사를 담고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한글은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창제 동기와 원리가 밝혀진 문자라고 한다. 우리말과 글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그 가치를 높여야 한다."
- 한나라당의 박원홍 의원이 발의한 한자교육진흥법안을 어떻게 보는가? 아울러 한자조기교육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우리말을 풍부하게 하고 향후 한자문화권과의 교류를 생각할 때 현재 형식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한자교육을 내실화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자교육진흥법안이 의도하고 있는 '생활 속에서 한자 사용을 독려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은 '내실있는 한자교육'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우리 국어정책의 원칙과 방향에 관계된 법안을 공청회나 여론 수렴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정부와도 협의하지 않고 발의한 점은 문제가 있다."
-국민참여통합신당은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국어정책을 펼칠 예정인가?
"국적 불명의 외래어 남발, 방송언어 오염 및 사이버 공간에서의 국어 파괴까지 국어사용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의견에 공감을 한다. 현재 국민참여통합신당에는 한글전용 여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당은 우리말과 글의 정확한 사용, 올바른 국어 교육 및 장기적으로 국어의 발전이라는 큰 방향에서 몇 가지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 아래서 국어 정책을 펼칠 것이다."
- 온 나라가 영어 광풍에 휩싸여 있다. 이로 인해 사교육비 지출이 엄청나게 늘고, 우리말 경시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물론 국제화 시대에 맞춰 영어 교육도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어 때문에 우리말과 우리글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제화 시대에 맞는 영어 교육의 중요성과 '영어 광풍'에 휩싸여 있는 지금의 현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현재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 중 공교육 부담금 1위, 사교육비 1위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잘못된 교육열, 무분별한 사대주의, 취업을 위한 '영어 강박증' 등을 단지 부모나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보다는 언어 정책, 교육 정책, 취업 정책 등 국가 정책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