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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이 피었어요.
눈꽃이 피었어요. ⓒ 김강임
밤새 불어댔던 바람이 체감온도를 내리니, 가을이 그냥 지나갈까 걱정스럽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이렇듯 가을의 끝자락에 서면 사람들은 저마다 그 '마지막 한 잎'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그 '마지막 한 잎'이 곧 '희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가을 해를 붙들고 떠난 70리 길은 '신선이 산다'는 한라산 영실.

한라산. 제주 사람에게 한라산은 삶의 터전이요, 전설과 태고의 신비가 깃 든 곳이다. 특히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주는 한라산의 풍경은 숲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단풍숲과 기암괴석
단풍숲과 기암괴석 ⓒ 김강임
1100도로를 타고 99번 도로에 접어들자 양옆에는 붉게 타들어 가는 단풍으로 가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 야! ---. 어머머머! 저것 좀 봐" 가슴속에 담겨진 그 많던 감탄사로는 다 형언할 수 없는 게 원망스럽다. 단풍나무 숲을 지나면 영실등산로 입구에 다다른다.

차에서 내리자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다시 발길을 멈추는 순간이다. 단풍이 물든 기암괴석 속으로 타들어 가는 숲의 아름다움. 이걸 어떻게 다 가슴속에 담아갈 수 있을까?

해발 1280m 영실
해발 1280m 영실 ⓒ 김강임
해발 1280m 영실. 바위 앞에 새겨진 돌 표지판 앞에서 등산화를 끈을 질끈 동여매고 첫발을 내디딘 순간 먼저 온 손님이 숲 속에서 인사를 한다. 숲은 산새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어서 외롭지만은 않겠다.

영실의 산림식생은 크게 서어나무, 개서어나무, 물참나무, 졸참나무로 구성되는 낙엽활엽수림대와 소나무 및 구상나무가 대부분인 상록침엽수림대, 산철쭉, 털진달래 등으로 구성되는 왜성저목군락, 눈향나무 등의 편형저목군락이 분포하고 있는 빼어난 자원을 갖고 있다.

특히 오백나한, 오백장군 등으로 불려지는 영실(瀛室)은 신령스러움 그대로이다. 지난 날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 나라의 제를 모실 때에도 반드시 영실 곁에 있는 존자암에서 영실을 지나 백록담에 갈 만큼, 영실은 가히 세인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선경이었다.

계곡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숲
계곡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숲 ⓒ 김강임
숲은 계곡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졸졸졸 흐르는 계곡 사이에는 동글동글한 돌 틈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이 동글동글한 돌은 바다에만 있는줄 알았더니,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들어와 우물을 만들고 있다. 돌 틈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계곡 물에 손을 담그니 손이 시리다.

한라산 영실 숲은 2001년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 운동과 유한킴벌리가 주최하고 산림청이 후원한 제2회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영실 소나무림이 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고목이 숲을 이루고
고목이 숲을 이루고 ⓒ 김강임
한라산 최고의 가을 단풍 코스로는 단연 영실코스를 들 수 있다. 들쭉날쭉한 기암 괴석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오르막길로 접어들면 가파른 산길이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등산로 아래로 깊게 패인 영실계곡과 주변을 둘러친 웅장한 거벽은 아마도 이곳이 과거의 거대한 화산 분출구가 아니었나 짐작케 한다.

단풍이 융단을 깔은 듯
단풍이 융단을 깔은 듯 ⓒ 김강임
영실계곡의 숲은 융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서 있다. 들꽃이 피어 있는 낭떠러지 사이에 한 그루의 나무가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서 있다. 단풍. 안개 그리고 저 산등성 너머에 비치는 햇빛.모두가 전설처럼 느껴진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핸드폰을 열고 목록에 기록된 첫 번째 임자인 남편에게 단풍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안개에 덮인 기암괴석의 아름다움을 생중계 했다. 오늘은 영실의 숲만 보기로 했는데도 왜 자꾸만 기암괴석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까? 오백장군의 이야기를 떠오르니 차귀도에 떨어졌다는 막내둥이가 측은한 생각이 든다.

숲 사이로 보이는 기암괴석
숲 사이로 보이는 기암괴석 ⓒ 김강임
한라산 영실의 매력은 영주십경 하나인 영실기암. 해발 1400∼1600m지점의 거대한 계곡 우측에 천태만상의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게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더욱이 숲과 어우러진 이 모습을 바라보면 여기가 무릉도원이다. 병풍바위 앞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아침 일찍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벌써 하산을 한다.

" 안녕하세요. 힘드시죠? 안녕히 가세요!."
참 오랫만에 들어보는 이웃들과의 인사다. 이곳에서 만큼은 모든사람들에게 한마디도 흘리지 않고 화답해 주리라. 자연이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초연하게 만들다니. 그래서 산은 항상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일까?

상강을 기다렸는데...벌써 구상나무엔  만설이
상강을 기다렸는데...벌써 구상나무엔 만설이 ⓒ 김강임
병풍바위를 지나 구상나무숲에 접어드니 이곳은 벌써 겨울이 한창이다. 하얗게 핀 눈꽃이 환상적이었다. 갑갑하던 숲만 걷다가 갑자기 거칠 것 없는 시야가 펼쳐지면서 겨울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했다.

첫서리가 내리는 '상강'을 기다렸는데 이곳에는 벌써 눈꽃이 피었다. 눈꽃이 핀 구상나무 숲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추억을 담기 위해 줄을 지었다. 잠시 여정을 풀었다.

선작지왓에 내린 하얀 눈꽃
선작지왓에 내린 하얀 눈꽃 ⓒ 김강임
한라산 주봉인 백록담 화구벽을 정면으로 윗세오름과 방아오름이 양쪽으로 나란히 늘어 서 있는 이 고산의 초원이 바로 '선작지왓' 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작지'는 조금 작은 돌을 말하고 '왓' 은 벌판이란 뜻의 제주 방언이다. 곧 돌들이 널려 있는 벌판이라는 의미다. 이 선작지왓의 비경은사계절 신비스러움을 준다. 봄에는 '털진달래' 와 '산철쭉' 으로 뒤덮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선작지와에는 들꽃들이 하얗게 눈꽃을 피워 장관을 이뤘다.

특히 진달래와 철쭉 사이에는 시로미와 눈향나무 등 키가 작은 관목류가 자라고 백리향, 한라구절초, 설앵초, 구름송이풀, 구름떡쑥, 큰방울새란, 산자고, 구슬붕이, 용담 등 이름도 아기자기한 들꽃들이 계절을 번갈아 가며 이 화원의 은밀한 곳에서 꽃을 피운다.

세오름을 사이에 두고 선작지왓 건너편의 들판에는 만세동산이라는 조그만 구릉이 있다. 이곳은 예전에 소와 말을 방목하던 목동들이 누워서 망을 보던 곳이라 하는데, 이곳에 드러 누워 백록담을 배경으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우마를 보면 저절로 영주십경의 하나인 고수목마라는 풍경을 그릴 수 있다.

윗세오름 정상엔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네요.
윗세오름 정상엔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네요. ⓒ 김강임
흐르는 구름따라 안개가 내려앉은 위세오름 정상에는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고 있었다. 통나무로 지은 대피소 안에는 컵라면으로 따뜻한 온기를 채우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이곳을 지나는 등산객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윗세오름의 가운데 봉우리인 누운오름은 이 일대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으로 꼽힌다.

정면으로 화구벽의 기암 괴석들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뚜렷하고 시야를 돌리면 제주 서쪽의 오름들과 산방산, 송악산은 물론 우리나라의 최남단 마라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한다. 그러나 안개에 덮인 누운 오름은 지척에 두고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마치 남북이 가로막혀 자유롭게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이산가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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